문화포커스
- [남효선_동해연안의 문화여행]소금굽는 ‘여망이’ 장씨의 ‘봉화 소천장 행상기’
- 남효선
소금굽는 ‘여망이’ 장씨의 ‘봉화 소천장 행상기’
소금의 길, 울진십이령... 바지게길에 새긴 평생(1)
영남내륙 사람, “선질꾼 없으면 산모 미역국도 못끓였다”
십이령길, 소금내와 미역내가 엮은 선질꾼 민속의 현장
산림청, 십이령길 28Km 원형 복원...울진의 ‘올레’길로 각광
십이령길은 동해바다와 영남내륙을 잇는 길 중, 오늘까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옛길이자 물류유통로이다. 십이령길은 울진 두천에서 들어서면 ‘바릿재→평밭→새재→느삼밭재→너불한재→저진치→한나무재→넓재→고치비재→멧재→배나들재→노루재 순으로 이어진다. 십이령길에는 곰삭은 울진 앞 바다 소금과 미역냄새가 난다.
선질꾼 장씨는 새벽 첫닭 울음과 함께 쪽문을 열고 고무신을 꿰찼다. 하늘은 잔뜩 구름을 품은 채 꺼무룩하다. 신발을 꿰자 ‘불가(백사장)’ 쪽으로 한달음에 내달린다. 오늘은 흥부장날이다. 장이 서기 전에 오리 쯤 떨어진 불가 염전으로 가서 흥부장에 내다 팔 소금(전오염, 煎熬鹽)을 장만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씨가 여망이로 일하는 염전은 집에서 한 오리 가량 떨어진 ‘염전둑’ 불가에 있다. 150평 한마지기 기준으로 여섯 마지기 규모이다. 흥부에서는 제법 규모가 큰 염전이다. 염전 주인은 장씨 숙부이다.
장씨는 땡볕에 구슬땀을 흘리며 보름동안 염전에서 낮밤도 없이 뒹굴었다. 한 보름 염전에 뒹굴어 얻은 흰빛의 소금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린다. 이번 염전은 여느 때보다 빛깔이 더욱 흰 것이 맛도 월등했다. 소금 굽는 동안 내내 비 한 방울 없이 날씨가 쨍하니 맑은 덕분이었다.
장씨는 울진 갯마을에서 호가 난 ‘여망이’다. 여망이는 소금 굽는 장인을 일컫는 울진 동해안 지방의 방언이다. ‘여망이한테 시집 올 처녀가 있는가?’라는 향언(鄕言)이 있듯, 여망이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닌데다 불같은 땡볕에서 보름이나 한 달 이상을 염전에서 살아야하기 때문에 여망이 일을 선뜻 하려는 사람이 좀체 없었기 때문이다. 장씨는 열 살 나던 해부터 숙부네 염전에서 소금기술을 익혔다. ‘지차네 자식(맏집이 아닌 동생 집안)’이라고 애시당초 서당이나 학교 문턱에는 가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래도 서당 어깨 너머로 천자문 조금과 ‘드문드문 읽을 수준’의 한글을 깨쳤다.
울진지방, 특히 흥부 동네 염전둑 소금은 멀리 강릉지방까지 명성이 자자했다. 색깔도 곱거니와 맛이 일품이었기 때문이다. 울진지방의 천일염은 ‘간수물(바닷물)을 가마솥에 끓여’ 얻는 ‘전오염(煎熬鹽)’이다. 김호종교수(안동대)는 6~70년 전까지 흥부 염전을 비롯하여 울진 갯마을에는 250여개소의 염전이 있을 만큼 왕성하게 전오염을 생산했다고 밝혔다. 염전이 당시 정부의 인허가 사업임에 반해 크고 작은 염전이 250여개소 있었다는 것은 농업 토대가 열악한 울진지역 사람들이 삶의 전부를 소금 굽기에 매달렸다는 것을 시사한다.
서해와 남해와는 달리 동해바다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아 서해안식 천일염은 당초부터 생산할 수 없다. 때문에 울진사람들은 불가에 논처럼 염전을 만들고 일정기간 동안 ‘소써래질’로 바닷물을 증발시킨 뒤, 집채만 한 가마솥에 불을 지펴 끓여서 소금을 만들었다.
동해안 최고의 천일염 생산지, 울진 흥부 염전
가마솥에 끓인 전오염...십이령 타고 영남내륙으로
김호종교수, 6~70년전까지 200여개소 염전 “성황”
먼저 불가에 구덩이를 파 150평 규모로 논처럼 염전을 뜬다. 바닥에는 점질이 좋은 붉은 황토진흙을 단단하게 다져 넣는다. 바닷물이 모래밭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염전 둑에는 바닷물이 흐를 수 있도록 보(洑, 물길)를 만든다. 또 염전 곁에는 한 질이 넘는 깊이로 웅덩이를 판다. 역시 바닥에는 황토진흙을 단단하게 다져 넣는다. 이 웅덩이는 염전에서 써래질로 증발시킨 ‘간수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간수웅덩이 곁에 화덕을 만든다. 화덕은 아궁이가 네 개 달린 규모이다. 화덕 위에 가마솥을 걸고, 네 모퉁이에 긴 나무를 세워 ‘영개(짚으로 이은 지붕)’을 얹는다. 가마솥은 당시 무쇠주물을 구하기 어려워 흥부 앞 바다에 지천으로 널린 백합, 섶(홍합), 따개비 조개껍질에 톳나물, 진저리 등 바닷나물을 끓여 만들었다. 모양은 사각형 모습이다. 소금가마를 만들 때 톳나물 따위의 바닷나물을 반드시 넣었다. 바닷나물에는 아교성분이 있어 점성이 강했기 때문이다.
소금을 끓이는 도중에 갑자기 퍼붓는 소낙비를 막기 위함이다. 이렇게 염전이 갖추어지면 장마가 오기 전인 4월부터 본격적인 소금생산에 들어간다. 장마기간에는 소금을 생산할 수 없어, 이 무렵에는 소금굽는 일을 제쳐두고 밭일에 매달린다.
소금일이 시작되면 장씨는 아침도 거른 채 새벽 첫닭 울음과 함께 염전으로 내닫는다. 먼저 염전에 바닷물을 퍼 올린다.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불가에 둑을 만들고 일곱척이 넘는 황장목(금강소나무, 적송)에 홈을 판 ‘홈통’을 염전에 걸쳐놓고 용두레로 홈통에 바닷물을 퍼 담는다. 물대기가 끝나면 염전에 소를 대어 써래질을 한다.
이미 해는 중천에서 폭염을 퍼붓는다. 불볕이다. 지어미가 이맘때면 새참 겸 늦은 아침을 이고 온다. 그나마 아침밥이어서 ‘꾹죽’이아니라 밥이다. 드문드문 이밥(쌀밥)이 섞인 꽁보리밥에 ‘짠지(김장김치)’와 고추장이 반찬 전부다. 이만한 밥도 못 먹는 집이 허다한데 비하면 비록 점심 겸 먹는 늦은 아침이지만 그나마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데는 그만이다. 늦은 아침을 끝내고 잠시 쉴 틈 없이 다시 소금밭 써래질에 매달린다.
보름 남짓 매달린 끝에 마침내 ‘간수 웅덩이’에 간수물이 찰랑거린다. 간수물을 가마솥으로 옮긴다. 순전히 물지게로 퍼 나른다. 간수물이 가마솥에 가득 차면 이윽고 불을 지피기 시작한다. 네 개의 아궁이에서 거의 일정한 화력으로 불을 지핀다. 밤낮없이 하루 반을 불을 지피면 마침내 눈보다 하얀 소금이 ‘후두둑’ 튀기 시작한다. 여망이 장씨는 이때가 제일 기분이 좋다고 했다. 여섯마지기 염전을 가꾸는 데는 장씨를 포함해서 모두 네 명의 소금쟁이가 매달린다.
소금이 구워지면 염전주와 일꾼이 모여 소금을 분배한다. 염전주나 일꾼이나 똑같은 몫이다. ‘새경(품삯)’은 따로 없다. 써래질하는 소도 똑같은 몫을 분배받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소금은 흥부장을 통해 팔려 나간다. 소금장이 서면 멀리 강릉에서 ‘흥부 소금’을 구하기 위해 장사치들이 소달구지를 끌고 모여든다. 흥부소금이 워낙 ‘때깔도 곱고 맛 이 뛰어나’ 장이 서기 무섭게 팔려 나간다.
소금굽는 기술자도 한 몫...써래질 소도 한 몫
십이령 첫 들목, 바깥말래... 50년때까지 양조장, 주막 등 50여호 규모
바깥말래 주막거리는 선질꾼들 민속문화 보고
말래의 행정명은 '두천(斗川)'이다. 주막거리가 형성됐던 말래는 엄밀하게 '바깥말래'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양주장 1개소, 주막집 5개소 등 50여 호가 마을을 이루었듯이 산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규모가 큰 주막거리이다. 지금은 10여 호가 거주한다.
장씨는 자기 몫으로 받은 소금 네 가마니 중에서 한 가마니를 들어 ‘바지게(지게다리가 없는 지게, 이를 지고 행상을 하는 장사치를 ‘선질꾼’이라 부른다)’에 얹힌 단지에 붓고, 그 속에 갓 잡아 온 고등어 세 손(여섯마리)을 박아 넣는다.
오늘날 안동시의 특산물로 자리잡은 ‘간고등어’의 효시이다. 지게등받이에는 문어 두 마리와 ‘고포산 돌곽(자연산 건미역)’ 두 단을 얹었다. 장씨는 아침 겸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바지게를 지고 ‘덕구 저수지’를 돌아 쉬치재를 넘어 ‘말래(斗川)’로 내닫는다. 십이령길을 지나 봉화 소천장에 가기 위해서이다. 십이령길을 넘는 행상들은 크게 두 종류이다. 하나는 ‘소장수’들이며 또 하나는 ‘바지게꾼’이다. 이 중 바지게꾼이 바로 선질꾼이다.
선질꾼들은 2·7일장인 울진장과 3·8일장인 흥부장(興富場)에서 주로 해산물인 소금·간어물·미역 등을 구매하여 바지게에 지고 십이령을 넘어 봉화 소천장으로 가서 그 주위의 내성장(乃城場)·춘양장(春陽場)·법전장(法典場)인 장동장(獐洞場)·재산장(才山場)에서 잡화와 약품 및 양곡·포목 등을 물물교환하여 되돌아 왔다. 또 봉화에서도 간간이 행상이 울진에 오기도 하였다. 도중에 무뢰한(無賴漢)들이 상품을 탈취해 가기도 하고, 선질꾼에게 장세를 과도하게 요구하기도 하여 일제강점기까지도 무척 애를 먹게 되자 봉화인으로서 유력한 자를 동료로 정하여 그들의 상행위(商行爲)를 보호케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들을 기린 불망비가 바로 십이령 초입에 서 있는 '내성행상불망비'이다.
십이령을 넘나들며 평생을 보낸 선질꾼(바지게꾼)들이 목숨보다도 애지중지 했던 ‘행상불망비’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성행상불망비(乃城行商不忘碑)’이다. 쇳물을 부어 돋을글자를 새긴 철비이며 2기다. 한 기는 ‘내성행상반수권재만불망비(乃城行商班首權在萬不忘碑)’이며, 또 한 기는 ‘내성행상접장정한조불망비 (乃城行商接長鄭韓祚不忘碑)’이다. 1890년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내성행상불망비는 말래마을에서 십이령으로 오르는 초입인 '바릿재'에 있다. 당시 봉화 소천장을 관리하던 접장 정한조와 반수 권재만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 울진 선질꾼들이 비용을 염출해 세운 공덕비이며 철로 돋을 글자를 새긴 쇠비석 2기이다. 경북도 문화재자료이다. 불망비 뒤로 십이령 첫 고개인 바릿재로 오르는 길이 연필금처럼 보인다.
흥부장터에서 늦은 세시 쯤 장거리를 마친 장씨는 해거름 쯤 말래 주막거리에 들어선다. 말래의 행정명은 '두천(斗川)'이다. 주막거리가 형성됐던 말래는 엄밀하게 '바깥말래'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양주장 1개소, 주막집 5개소 등 50여호가 마을을 이루었듯이 산중에서는 보기드물게 규모가 큰 주막거리이다.
주막거리에는 벌써 낯익은 선질꾼 서넛이 주막에 걸터앉아 막걸리 잔을 돌리고 있다. 고초령을 넘어 온 매화리 사는 임씨와 ‘돌재’를 지나 ‘사계마을 눈물고개’를 넘어 온 전씨가 손을 흔든다. 바지게를 진 채로 임씨가 건네는 막걸리 한잔을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마신다. 금세 속이 환해진다.
임씨와 전씨의 바지게에는 보기에도 등이 시퍼런 고등어가 소금단지 안에 가득 채워져 있다. 등받이에는 바닷바람에 잘 말린 황열기 네 손이 바람에 흔들거린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게 맛깔스럽다.
밤이 되자 부엉이가 속절없이 산중 주막마을을 울린다. 주막집에 갓 구워 온 소금 한 주발을 방세와 밥값으로 치루고 일치감치 잠자리에 누웠다. 새벽 네 시 경이면 십이령길을 넘어 소천장에서 장거리를 팔고 서둘러 십이령을 되짚어 말래 마을로 되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잰 걸음을 옮겨도 봉화 소천장과 춘양장을 보고 흥부로 되돌아 오는 데는 꼬박 엿새가 걸린다.
십이령은 울진 말래마을에서 봉화 소천마을에 이르는 열두고개길을 통칭해 부르는 이름이다. 동해로 뻗친 태백의 열두 고개를 넘어야 하는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십이령고개길은 십이령에는 사실 없다.
새벽이 밝자 장씨는 임씨와 전씨, 선질꾼 동무들 열댓명과 주막집을 나서 발재를 넘었다. 고무신에는 감발을 동였다. 발재 초입에 서 있는 ‘내성행상불망비’ 앞에서 장씨는 두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행상불망비는 ‘봉화 소천 장터 관리자의 은공을 기리기위해’ 장씨의 웃대 선질꾼들이 비용을 갹출해 세운 철비이다. 접장 정한조와 밥수 권재만이 유별나게 울진 선질꾼들에게는 은덕을 많이 베풀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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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성황당 |
불망비 뒤로 십이령 첫 고개인 바릿재로 오르는 길이 연필금처럼 보인다. 언제나 십이령길을 나설 때면 제일 먼저 치성을 드리는 곳이 평밭 성황이다. 평밭 성황은 평밭에 뿌리를 내린 ‘권씨네’가 가신처럼 모시는 성황당이다. 평밭에 이르자 권씨가 논둑을 바르고 있다. 모내기 준비에 나선 모습이다. 장씨 일행은 평밭 성황당에 ‘비손’을 하며 ‘소천장 운수’를 빌었다. 성황목으로 우뚝 서 있는 엄나무 가지에 새순이 파릇파릇 물이 올랐다. 엄나무는 ‘개두릅나무’로 불리며 가지에 가시가 돋아있어, 예부터 민가에서는 사립문 위에나, 마구간 위에 가지를 동여매어 걸어두었다. 악귀를 쫒기 위해서이다. 평밭 성황 곁에 서 있는 엄나무는 어른 둘이 팔을 벌려야 겨우 잡을 수 있을 만큼 큰 고목이다. 언제나 십이령길을 나설 때면 제일 먼저 치성을 드리는 곳이 평밭 성황이다.
평밭 성황은 평밭에 뿌리를 내린 ‘권씨네’가 가신처럼 모시는 성황당이다. 임씨가 주막거리에서 꿰차고 온 막걸리를 한잔 올렸다. 장씨는 ‘제 논 한마지기’를 갖는 게 소원이다. 평밭 성황에 비손을 한 뒤, 장씨는 논둑을 다듬는 권 영감의 손길을 그윽한 눈길로 한참을 쳐다본다.
평밭을 지나면 길은 두천내를 따라 시내 둑길로 이어진다. 둑길도 앞선 선질꾼들이 품을 보태 만들었다. 해 마다 큰물이 나면 둑길 보수는 선질꾼들의 몫이다. 새재에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장씨 일행은 말없이, 차오르는 숨만 고르며 새재를 올랐다. 찬물내기에서 갈라진 계곡물이 새재를 타고 내리쏟는 작은 소(沼)에 원앙 한 쌍이 새봄을 즐기듯 물살을 헤집는다.
내성행상불망비·새재성황당·통왕리 비석 등 선질꾼 민속의 현장
소금과 미역의 길, 십이령...생태관광숲길로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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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성황당 |
통왕리 석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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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 |
작은빛내길 |
새재에서 소광천(작은빛내)까지 내리막길이다. 장씨일행은 거의 뛰듯이 작은빛내로 내달았다. 얼굴이 환하게 비치는 작은빛내에 얼굴을 박고 물을 마신다. 속까지 훤하게 뚫리는 것처럼 맑고 차다. 장씨는 한참을 물을 들이켠 뒤 얼굴을 씻었다. 찬물내기를 지났다.
새재 성황에 바지게를 풀고 비손을 올린다. 새재 성황은 평밭 성황과는 달리 장씨같은 선질꾼들이 갹출하여 세운 산신성황당이다. 영험이 좋았다. 선질꾼들은 당시 골기와를 구해 성황당 지붕을 얹었다. 당시로서는 큰 비용을 들인 셈이다.
흥부장터에 사는 한약방 주인 장씨에게 부탁해 상량문도 짓고 성황건립기도 갖췄다. 장씨도 건립기에 이름 석 자를 올렸다. 새재성황에는 해마다 정월 보름 자시에 제를 올렸다. 새재성황을 막 나서자 붉은 해가 둥실 떠올랐다. 푸른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는 언제 봐도 붉고 탐스러웠다.
샛재의 성황은 강원도의 대관령 서낭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예전에는 당 안에 여자 화상이 그려져 있었으나 몇 차례의 중수 끝에 지금은 당시 성황당을 지을 때 기부를 했던 사람들의 명단만 적혀 있을 뿐이다. 샛재 성황의 영험성은 주변 마을까지 잘 알려져 있다. 실제 샛재에 살았던 사람들이나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호랑이의 피해를 입거나 다친 일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대관령 서낭신을 받아 세운 샛재 성황...영험높기로 이름나
구비구비 열두고개길, 감칠맛나는 '대추곰'...샛재성황 주막집이 만든 별미
장씨 일행은 성황 추녀 끝에 처마에 솥을 걸었다. 열명 남짓 먹을 수 있는 밥솥이다. 솔가지를 주워 불을 지핀 뒤 소금 간을 맞춰 늦은 아침을 먹었다. 임씨가 대통을 꺼 낸다. '대추곰'이 가득 들어 있다. 한 모금씩 나눴다. 입안에서 달짝한 냄새가 금세 풍긴다. 가도가도 끝없는 십이령 열두 고갯길에서 마시는 '대추곰'의 잘 삭은 맛은 가히 일품이다. 한참이 지나도록 대추곰의 달큰한 맛이 입안을 맴돈다.
‘대추곰’은 말린 대추를 고아서 삭힌 음료로서 ‘대추감주’라고도 하며, 내륙지방에서 흔히 맛볼 수 없는 음식이다. 당시 말래마을에 들어 와 허기진 배를 골아가며 십이령을 넘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대추곰을 기억한다. 선질꾼들이 뻔질나게 드나들던 6~70년 전, 바깥말래엔 대추곰을 파는 점방이 있었으며, 샛재 주막에서도 주막집의 별미 음식으로 대추곰을 팔았다. 열 두 개의 고개 길에서 만나는 대추곰 한 모금이 주는 청량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맛이다. 달콤한 맛의 대추곰은 산길을 오르내리는 장돌뱅이들이 유일하게 당분을 섭취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으리라.
새재성황 바로 밑에 자연석 바위를 통째로 깎아 세운 ‘울진 현감 이(李) 모의 선정비’가 서 있다. 장씨가 퇘하고 침을 뱉는다. 임씨도 전씨도 따라 뱉는다. 새재 성황에 바지게를 풀고 비손을 올린다. 새재 성황은 평밭 성황과는 달리 장씨같은 선질꾼들이 갹출하여 세운 산신성황당이다. 영험이 좋았다. 선질꾼들은 당시 골기와를 구해 성황당 지붕을 얹었다. 당시로서는 큰 비용을 들인 셈이다.
새재에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장씨 일행은 말없이, 차오르는 숨만 고르며 새재를 올랐다. 찬물내기에서 갈라진 계곡물이 새재를 타고 내리쏟는 작은 소(沼)에 원앙 한 쌍이 새봄을 즐기듯 물살을 헤집는다. 소로 쏟아지는 폭포가 봄볕 아지랑이를 한껏 물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소광천(작은빛내)까지 내리막길이다. 일행은 거의 뛰듯이 작은빛내로 내달았다. 얼굴이 환하게 비치는 작은빛내에 얼굴을 박고 물을 마신다. 속까지 훤하게 뚫리는 것처럼 맑고 차다. 장씨는 한참을 물을 들이켠 뒤 얼굴을 씻었다. 찬물내기를 지났다.
찬물내기를 지나자 하늘을 찌르듯 쭉쭉 곧은 황장목 솔밭이 나타난다. 금강송이다. 이곳에는 황장목 가지 하나라도 부러뜨리면 경을 친다. 나라에서 엄하게 관리하는 곳이다. 적송군락이 내뿜는 솔내음이 코끝을 감싼다. 머리가 맑아지며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상쾌하다. 더러 재물 있는 집안에서 나라 산림간수들 몰래 적송을 베어 집을 짓기도 하지만 여망이인 장씨는 언감생심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찬물내기를 지나자 하늘을 찌르듯 쭉쭉 곧은 황장목 솔밭이 나타난다. 적송이다. 이곳에는 황장목 가지 하나라도 부러뜨리면 경을 친다. 나라에서 엄하게 관리하는 곳이다. 적송군락이 내뿜는 솔내음이 코끝을 감싼다. 머리가 맑아지며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상쾌하다. 소광리 금강소나무림은 산림청에서 '금강소나무생태경영림'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울진군과 군민들이 금강소나무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범군민적 운동을 펼치고 있다.
황장목 솔밭을 지나 느삼밭재를 넘어 너불한재에 올랐다. 고개 아래 광회천이 하얀 거품을 뿜으며 흐른다. 광회천은 태백에서 발원해 영양, 안동을 지나 남해로 흘러드는 낙동의 한 줄기이다. 여기서부터 봉화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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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을 언제 가노/ (후렴)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 한 평생 넘는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 서울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꼬불꼬불 열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 대마 담배 곡물 지고 흥부장을 언제 가노/ 소금 미역지고 소천장을 언제가노/ 오나 가나 바지게는 한평생 내 지겐가/ 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꼬불꼬불 열두 고개 언제 넘어 고향 가노.” |
임씨가 소리를 뽑는다. 임씨의 소리자락에 장끼 한 마리 놀란 날개짓으로 허공을 찬다. 소리는 고개를 넘어 황장목 솔밭을 흔들고 작은빛내를 휘감는다. 임씨의 장타령은 언제 들어도 구슬프다. 소천장 배나들에 도착하자 허기부터 진다. 장터에는 이미 낯 익은 장사치들이 여럿 모여 서 있다. 멀리 낙동강 끄트머리인 김해 부근에서 거룻배를 타고 온 장사치도 눈에 띈다.
150리 산중 길을 걸었다. 말래 주막거리를 떠난 지 꼭 사흘째 되는 날이다. 장씨 일행은 소금과 문어, 미역을 후딱 거간꾼에게 넘기고 담배와 곡물로 맞바꿨다. 햇미역이라서 ‘금(가격)’도 좋았다. 장을 보는데는 삼십분도 채 안 걸린다. 그만큼 흥부 선질꾼들이 십이령을 넘어 지고 오는 소금과 해산물 물목이 소천장꾼들에게는 인기가 좋았다.
사실 봉화, 영주, 안동 사람들은 흥부 선질꾼들 아니면 소금 한 톨, 간고등어 한 점 구경 못할 일이다. 그것뿐만 아니다. 산모 산후치레도 흥부 선질꾼 아니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산모 미역국은 순전히 흥부 선질꾼들이 지고 오는 고포산 미역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울진 고포산 '돌곽(자연산 미역)'은 우리나라 최고의 자연산 미역이다. 조선조에 임금에게 진상될 만큼 맛이 뛰어나며, 현재 울진군 특산물로 브랜드화 되어있다. 20올 기준 1단에 20여만을 호가한다. 돌곽이 한창 수확되면 노동력이 떨어진 노인들은 '갈고리'로 해풍과 파도에 밀려오는 미역을 건진다. 미역자생지인' 짬'은 마을 어촌계에서 공동 관리한다.
장씨 일행은 거간꾼에게 넘기고 남긴 소금 한 주발로 국밥 한 그릇과 탁배기 두어 잔을 걸쳤다. 서둘러 장씨 일행은 십이령길을 되짚어 발길을 재촉한다. 부지런히 걸어야 사흘 밤낮이 꼬박 걸릴 터이다. 장씨의 바지게 광목 보자기에는 딸애가 그토록 갖고 싶어 하는 ‘하얀 코고무신’과 ‘분홍색 댕기’ 한 쌍이 곱게 담겨있다.
산림청.울진군, 십이령 바지게길 "복원"
'보부상체험공간, 금강송 체험공간, MTB 코스, 산림생태학습 공간' 조성
새재성황사에서 열 발자국 쯤 아래쪽에 매우 귀중한 석비 한 기가 서 있다. 자연석 바위를 통째로 깎아 세운 비다. 정작 이 모 현령의 영세불망비가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자연석 석비 오른쪽 하단에 새겨진 지명 때문이다. '통왕리(通王里). 그랬다. 분명 통왕리이다. 이 비석에 의하면 새재일원의 행정명칭은 통왕리이다. '왕이 통과한 마을'이란 의미에서 바라본다면 통왕리라는 지명은 울진지방 고대사의 베일에 묻혀 있는 '안일왕 신화'와 '실직국왕 신화'의 비밀을 푸는 또 하나의 단초이다. 더구나 '안일왕산성'(安逸王山城)은 '통왕리'를 명기한 석비가 서 있는 새재에서 동북방향으로 2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 모 현령의 선정비에 명기된 통왕리의 세 글자가 울진 고대사로 걸어 들어가는 소중한 출입구인 셈이다.
- 글쓴이 : 남효선
-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안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공부하였다. 1989년 문학사상의 시 부문에서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였다. 한국작가회의, 경북작가회의, 안동참꽃문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둘게삼』이 있다. 현재 시민사회신문의 전국본부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