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황구하_시로 거니는 상주]상주읍성 골목따라 발밤발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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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거니는 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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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상주 시내 골목골목을 천천히 돌아다닙니다. 몇 년 전 『상주읍성』의 저자 김상호 선생께서 읍성 역사와 관련된 건물, 골목, 풍경의 특징을 가려 정한 40여 곳을 둘러본 것이 그 첫걸음이었는데요. 그중 10여 곳을 정해 그림으로 기록하는 사람들, 상주 어반스케치 ‘골목’ 팀의 소식을 접한 건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상주읍성은 1385년에 축성되었습니다. 시내의 왕산을 중심으로 남성동, 서성동, 성하동, 인봉동에 걸쳐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사료만 남아 있지만 그 흔적을 더듬어 그림으로 기록한다는 일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매주 목요일, 현장에서 10회에 걸쳐 작업이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첫 모임 날 장은경 화가를 필두로 하는 팀(김기옥, 김상미, 김후남, 박현정, 신은경, 이은미, 최복련)과 김상호 선생의 안내를 받으며 열 군데를 천천히 돌아보았습니다. 왕산역사공원, 저잣거리, 가장 좁은 골목, 객사 골목, 시장 속 골목, 행복한 골목, 꽃창포 골목, 자전거 골목, 여인숙 골목, 사창(司倉) 골목 등이었지요.
왕산은 상주 시내 한가운데 둥그렇게 솟아있는 작은 산입니다. 상주읍성의 중심으로 산 아래 남쪽에는 1910년까지 상주목 관아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저잣거리로 들면 상산백화점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1925년경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이 건물은 튼튼한 외벽, 연한 분홍빛, 장식 문양도 고풍스럽습니다. 6·25 때는 잠시 우체국으로도 사용됐다고 하는데 내부는 어떨지, 세월이 이만큼 흘러왔으니 많이 달라졌겠지만 궁금증을 자아내는데요. 건물 앞을 지날 때면 영화 「암살」의 백화점 장면 음악 소리가 발자국 따라 흘러오는 듯합니다.
상산백화점
상산백화점 건물 바로 옆에 상주에서 가장 좁은 골목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늘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비스듬히 기대어 있지요. 가장 좁은 폭이 80센티미터 정도로 이곳은 한때 넓은 광장이 있어 시장으로 이용되었다는데요. 일제 강점기 민간에게 이전되어 지금은 이 골목만 남은 것이라고 합니다. 복작거리는 도심 속 불과 몇 걸음의 짧고 좁은 골목인데요. 양쪽에 맞닿아 있는 작고 좁은 문과 창문으로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가 도란도란 넘어옵니다. 창문 안쪽은 밥집이 운영되고 있더군요.
골목 중간쯤 꽁꽁 닫힌 새시 문에 붙은 ‘다운정’이라는 이름을 보자 오래된 기억이 훌쩍 날아들었습니다. 시 동인지 출판기념회를 마치고 시인들과 어울려 왕산 앞 어느 노래방을 갔습니다. 모두 마이크가 터질 듯 노래를 부르고 나오니 어느새 도심은 어둠에 깊게 덮여 있었지요. 그런데 흥이 남은 모 시인께서 맥주 한 잔을 산다며 근처 깜빡이는 골목의 불빛 따라 시인들을 우루루 몰고 갔습니다. 작은 새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작은 탁자와 의자, 그리고 작은 주방과 작은 방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들어가 탁자에 둘러앉으니 공간이 꽉 찼지요. 이런 데가 다 있었네, 하며 모두 맥주잔 건배 인사를 하고 늦은 시간이라 금세 나왔는데요. 오랫동안 잠겨 있던 추억이 이렇게도 불쑥 튀어나오는구나 싶어 김상호 선생께 이야기했더니 “내가 알기로는 그게 옛날에 방석집이었을 건데….” 해서 한바탕 웃었습니다.
가장 좁은 골목
객사 골목은 객사에 진입하는 가장 넓은 골목인데요. 객사는 중앙에서 온 사신의 숙소로 이용되었습니다. 또한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 또는 궐패(闕牌)를 모시고, 지방의 수령이 삭망일(朔望日)과 국가 경축일 등에 대궐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올렸다.”(김상호, 『상주읍성』, 상주문화원, 2020)고 합니다. 동헌보다도 격이 높은 건물로 상산관(商山館)이라 했는데요. 상산관은 1940년 상주여자중학교로 옮겨 교실로 사용하다가 1992년 임란북천전적지로 옮겨졌습니다. 임란북천전적지는 집에서 아주 가까워 종종 산책을 하며 상산관 마루에 앉아 햇볕을 쬐거나 바람을 쐬곤 하는데요. ‘건물도 이렇게 터전을 옮기며 시간을 걸어다니는구나’ 생각하니 눈길 마주치는 골목골목의 품새 또한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전시 그림_객사 골목
시장 속 골목, 행복한 골목, 꽃창포 골목, 자전거 골목 등은 그동안 지역 예술가들이 담장에 그림을 그리거나 조형물을 설치해서 골목을 한층 환하게 해 놓았습니다. 쇠락해 가는 시장 골목을 일으켜 세우려는 몸짓이지요. 특히 꽃창포 골목집 벽에는 모자이크 타일 창틀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는데요. 그 안에 꽃창포를 그려서 고아한 한 폭의 그림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액자가 되었습니다.
제일약국 건물
시내 골목을 걸을 때면 춘광여인숙과 제일약국 길을 꼭 들르곤 했습니다. ‘춘광’이라는 이름과 ‘여인숙’이라는 공간이 주는 애틋함이 발길을 끌어당겼지요. 그런데 올해 춘광여인숙은 헐리고 새 건물을 짓기 위해 터를 고르는 중 매장문화재 정밀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내에 여인숙은 청주여인숙과 아리랑여인숙 두 군데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고풍스러운 품격을 보여주는 제일약국 건물 역시 약국 운영이 중단된 지 오래고 1층에 꽃집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아이들 어릴 때 약을 사던 기억이 새록하여 노오란 국화를 샀는데요. 건물에 그대로 박혀있는 ‘약’과 새 간판 ‘꽃’이 삶의 동의어로 느껴졌습니다.
사창(司倉) 골목은 상주읍성 안에 관청의 창고가 운영되던 곳인데요. 고려시대에 ‘만석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만석사라는 이름에 연이어 창고가 운영된 걸 보면 상주는 정말로 만석꾼의 큰 읍성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이곳에 있던 걸로 추정되는 보물 석조천인상과 옥개석 일부가 상주박물관에 있으니 그 역사적 깊이와 품은 또 얼마나 큰지 짐작이 갑니다.
전시그림_자전거 골목
상주 어반스케치 ‘골목’ 그림 팀은 여름부터 가을까지 작업을 해서 10월 중순 『추억 소환, 상주읍성 골목을 그리다』소책자를 내고 작은 전시회도 가졌습니다. 10개소 아홉 분의 그림 90점이 도시재생센터 벽면에 소박하게 부착되었습니다. 개개인의 색채가 돋보였는데요. 역사와 문화, 사람과 풍경이 저마다의 색으로 기록되었지요.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햇살과 바람과 비, 사람들의 말소리와 발자국까지 그림 속으로 번지고 스며들었을 것입니다.
골목팀 사람들
올여름 유난히 무덥고 비가 많이 왔는데요. 김상호 선생은 “때로는 얼굴에 송송 솟은 땀방울이 안타까웠고 장마 습기로 축축 늘어지는 도화지를 챙기면서 극한직업 방송 연출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면서도 “단순함을 찾아볼 수 없는 골목이란 주제로 그리기를 하면서 추억의 소환은 눈으로 보고 느끼는 감성과 손으로 그리면서 느끼는 감성이 다르다”(상주 어반스케치 ‘골목’, 『추억 소환 1, 상주읍성 골목을 그리다』, 상주기획인쇄사, 2023)고 했습니다.
또 장은경 화가는 “상주읍성 옛길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흔적으로 이어져 골목 속 골목으로 나뭇가지처럼 뻗어 우리들의 스케치북 한 장 한 장의 그림으로 담겨졌고 머무는 골목길마다 새로움을 느꼈다”(위 같은 책)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상주읍성 골목골목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일은 현재진행형인데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실천입니다. 어제를 따뜻하게 품고 한 발 한 발 내디뎌 오늘의 “골목 속 골목으로 나뭇가지처럼 뻗어 나가는” 게 우리의 인생길 아닐는지요.
서서 죽은 동제나무
시장 깊숙이 들어가면 닭전 골목, 뱀탕 골목, 고춧가루 골목, 쌀집 골목, 포목전 등을 만나게 됩니다. 며칠 전에는 솥전 골목을 지나가다 동제나무를 보게 되었지요. 허름한 건물이 헐리면서 그동안 가려져 있던 느티나무가 서서 죽은 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공사하느라 울타리가 쳐져서 맞은편으로 돌아가니 건물과 건물 사이 40cm 정도의 틈이 있어서 대여섯 걸음을 걸어 나무에게로 갈 수 있었습니다. 좁은 공간에 건물의 안위를 염려한 탓인지 나무는 인위적으로 생명을 끊어놓은 듯했는데요. 플라스틱과 스티로폼, 철제 등의 쓰레기 더미가 나무의 발등을 덮고 있었습니다. 한쪽 쓰레기 더미를 치우자 드러난 동제단이 비로소 숨을 쉬듯 보였지요. 전깃줄처럼 이리저리 엉켜 있는 골목은 이렇게 직접 걸어 들어가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골목은 세상을 앞에 두고 자칫 뒷걸음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골목문방구, 골목떡볶이, 골목식당, 골목포차, 골목양복점, 골목신발, 골목수선, 골목장의사 등 숱한 골목의 이름으로 밥을 먹고 옷을 입으며 세상의 큰길로 나아갑니다. 생로병사의 고해를 건너는 것처럼 때론 침울하고 때론 소란스럽기도 합니다. 세상에 지고 엎드려 펑펑 울기도 하고 다시 주먹 쥐고 눈물을 훔치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 삶은 지극히 좁고 적막한 이 골목, 여기서부터 걸음을 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된 건물과 아파트
저물녘 햇살이 붉게 내려옵니다. 세상의 속도에 밀려 늙어가는 건물 뒤편 아파트 그림자도 길어집니다. 발밤발밤, 또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오늘의 골목을 걸어갑니다.
- 글쓴이 : 황구하
-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