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백소애_쑤세미의 골방에서 만화읽기]본격 한국식 잔혹 스릴러《이끼》
- 쑤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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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끼》1,2,3/ 윤태호/ 아이비에스넷 | ||
내 이름은 류해국. 고교 때 학급일지를 맡은 적이 있다. 반 아이들의 출석과 조퇴, 가정사 등을 기록했다. 아이들의 사생활을 구체적으로 기록했고 그건 그들과의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었다. 나의 이러한 기록 능력은 사회생활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8년간 건실한 중소기업의 총무과에 근무하면서 직원들의 정보를 관리했고 그들의 삶과 아픔을 이해하려 애썼다. 가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여느 남편들과는 달리 아내와 내 집 마련의 고통을 나누려고 애썼다. 어느 날 본의 아니게 어떤 사건에 휘말렸다. 별일도 아니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상대가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거짓으로 일관했다. 게다가 졸지에 가해자가 되어 약식기소처분으로 벌금형까지 받았다. 벌금은 가벼웠으나 수천 배의 수치심은 나를 덮었다.
힘없는 소시민이라 이렇게 함부로 구는 것인가, 담당 검사는 자신의 말대로만 한다면 모두가 즐거운 주말을 맞을 거라며 비아냥거렸다. 결백을 위해 8개월간 이리저리 뛰어다녀 업무에 좀 소홀했지만 다행히도 직장동료들은 이해해줬다. 무엇이든 기록하고 정리하고 그냥 넘어가질 않는 진돗개 근성 때문인가, 날 엿 먹였던 검사는 업무상 배임으로 좌천됐다. 그러나 난 업무태만으로 직장에서 쫓겨났다.“류대리 걱정 마, 파이팅!!”날 이해해준다는 동료들의 눈빛은 싸늘했고 직장에서의 평판은 엉망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마누라가 가입된 커뮤니티 사이트에 들어가 봤다. 마누라의 닉네임으로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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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 검사, 감독, 사감선생, 가정이고 일이고 다 팽개치고 혼자 정의로운 척……. 미친 거 아닐까요? 개자식이에요.” |
윤태호. 1999년 대한민국 만화대상작《야후》로 대한민국 만화사를 새로 썼던 그가《이끼》로 돌아왔다.《몬스터》,《20세기 소년》의 우라사와 나오키(浦沢直樹)가 일본에 있다면 우리에게는 윤태호가 있다. 2007년 대한민국 만화대상 우수상을 수상한《이끼》는 올해 개봉을 목표로 영화작업이 한창이라고 한다. 영화의 분위기상 봉준호나 최동훈을 원했던 마니아들의 바람을 뒤로 하고 강우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많은 이들을 실망시켰다.
그러나 작가 자신은 “영화와 만화는 다르니 결과가 기다려질 뿐”이라고 한다.《이끼》는 그 자체가 시나리오로 쓰여도 될 만큼 박진감 넘치는 화면구성과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한때 윤태호를 문하생으로 두었던 허영만은 그의 작품을 호평하며 “이끼를 보자니 이제라도 칼라 공부를 해야겠다. 윤태호에게 지지 않겠다”고 했다.《이끼》는 온라인 만화웹진 ‘만끽’에 연재되다가 2008년 초 웹진이 문을 닫으면서 중단되었다. 이후 그해 8월 미디어다음에서 다시 연재를 시작해 작년 9월에 완결했다. 현재 42화까지를 묶은 단행본이 3권까지 나왔다.
《이끼》는 류해국이라는, 사내의 이야기다.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류해국이 그렇게 싫다고 7년간 가까이 찾아뵙지 않았던 아버지를 찾아간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직장을 잃고 이혼을 하고 서울을 등지던 날 류해국은 좌천된 검사에게 전화를 건다. 검사는 류해국에게 ‘상처뿐인 영광’을 안고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 류해국은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깊은 굴’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동네 사람들은 친절하게도 벌써 사망자확인을 다하고 상 치를 준비까지 마쳐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정확한‘사인’을 궁금해 했고 이장은 의원을 불러다 준다. 정확한 사인을 묻는 그에게 의원은 노환에 의한 자연사라 답했고 류해국은 67세 남자의 ‘노환의 의한 자연사’에 의문을 갖는다. 그러자 의원이 되레 울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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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누가 죽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
몇 년째 들여다보지도 않더니 마을사람들이 건사해주니 이제와 아들노릇 하는 거냐며 사람들은 불쾌해한다. 그제야 류해국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오지 않았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버지와의 인연을 정리하고자 발인을 결정하고 장례를 치른다.
쓸데없이 의심하고, 확인하려 하고, 아니다 싶으면 물어대는 늑대근성.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놓고도 또 드러내는 지긋지긋한 그놈의 근성을 류해국은 이‘굴’에서 끊어버리고만 싶다. 류해국은 돌아갈 곳 없는 현실에서 마을에 정착한다. 그러나 이장과 마을사람들의 의문의 행동과 이유 없는 적대감에 그는 찜찜함을 감출 수 없다. 의원의 말을 비롯해 마을사람들의 의심스러운 행적은 류해국의 뇌관을 건드렸다. 그러다 아버지의 죽음에 이들이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갖고 하나하나 추적해나가기 시작한다. 이장 천용덕과 의문의 점방집 여인 이영지를 비롯해 모든 마을 사람들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뒤를 캐기 시작하는데 그 또한 마을사람들에게는 감시의 대상이 되고 만다.
아버지의 삶을 이해할 수 없는 류해국은 작가의 전작 <야후>속의 주인공 김현과 닮았다. 보일러공 아버지는 사고 친 양아치 아들 김현을 때린다. 잠든 아들에게 연고를 발라주는 아버지...잠든 척 하는 아들...잠들지 않았음을 아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아들은 소름끼치게 싫다. 어느 날 그 싫던 아버지는 낡은 건물 속에서, 마치 그 건물처럼 무너져 내린다. 아들은 간신히 살아난다. 아들은 몇 번은 죽어본 사람의 눈을 가지게 된다. '야후'란 스위프트의 소설《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인간 모습을 한 짐승 이름이다. 즉 짐승 같은 인간이라는 뜻이다.
김현은 대통령 직속 ‘수도경비특수기동대’에 들어가 성수대교 붕괴, 대구 가스폭발사고, 데모진압 등의 현장에 투입되어 무자비한 공권력을 휘두른다. 그러다 삼풍백화점 참사현장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보면서도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며 자신의 비겁함과 사회에 대한 분노를 터트리며 수도경비특수기동대를 탈영한다. 서민들에게 막강했던 공권력을 우롱하며 김현은 자신의 방법으로 이 사회에 저항한다. 건물더미에서 핏발 선 눈으로 "너는 괜찮냐!"고 외치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과 공권력의 하수가 되어 살았던 지난날에 혼란스러운 김현은 90년대 세기말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짐승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사는 인간들에 대한 분노를 세기말 거대한 서울을 상대로 맹폭하는 김현의 모습을 통해 사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김현이 좀 더 사회에 직접적인 저항을 했다면 류해국은 사소한 정의를 지키려 한 사람이다.
류해국이 마을에 들어가서 느낀 점은 외부인은 토착민을 이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장, 경찰, 의원, 마을사람 모두 그들의 생활공간을 거점으로 외부인에게 틈을 주지 않는다. 거기엔 공권력도 소용없다.‘십 수 년 이장질에 구름은 못타고 산 몇 개는 옮겼다’는 천용덕의 말에는 소름이 끼칠 정도다. 마을사람들에게서 공격을 받고 위험을 감지한 류해국은 검사 박민욱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박민욱은 붙잡아 따지고 들춰내고 일 만드는 류해국이 넌더리나지만 그와의 만남 이후 거짓인생을 살았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있었던 터, 본능적으로 류해국의 도움 요청을 받아들인다.
이들이 이장과 대립하면서 하나둘 밝혀지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스릴러 형식으로 만화를 보는 내내 긴장감을 놓칠 수 없게 만든다. 아버지와 마을사람들의 숨은 사연, 그리고 의문의 여인 슈퍼 집 여자 이영지, 마을의 수장인 천용덕의 이야기가 한 꺼풀 벗겨질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 어디에선가 이러한 일이 충분히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이끼는‘전 세계 습기 있고 그늘진 곳에 서식하는 식물’이다. 고목이나 바위, 습지에 두루 분포되어 있는 세상의 이 모든 부조리함에 오늘도 사소한 정의를 지키려는 많은 소시민들이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전반에 걸쳐 그들의 삶에 천착하고 사회와 인간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을 발표해 왔다. 또래 중 윗세대 허영만, 이현세 처럼 매체 자체를 뒤흔든 작가가 안 나왔다며 그런 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는 윤태호 작가, 한국 근현대사를 자신의 눈으로 다룬 그의 다음 작품‘인천상륙작전’이 몹시도 기대된다.
- 글쓴이 : 백소애
- 강원도 태백 출생. 아이큐는 낮지만 머리가 좋다고 굳게 믿고 있음. 변덕이 심하고 우유부단하나 따뜻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조카들에게 헌신적이며 인간성 또한 좋다.....고 믿고 있다. 학생 때 교무실에서 밀대자루로 바닥 밀면서 은밀히 훔쳐본 생활기록부에는 ‘예의 바르나 산만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한참을 갸우뚱 하다가 담임이 수학선생님이었기에 그냥 이해하기로 함. 다소 후진 취향을 지니고 있으나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쓸데없는 걱정과 호기심이 많음. 같은 계획을 몇 년째 하고 있으며 역시나 올해도 다이어트와 앞머리 기르기에 도전할 생각이며 과메기에 없어서는 안 될 다시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 웹툰도 괜찮지만 만화책은 역시 종이책으로 보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날로그 건어물녀. 좋아하는 것은 무한도전, 오뎅으로 만든 떡볶이, 삼겹살에 매실소주, 비오는 날, 생활의 달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괴짜가족 류의 저질유머. 비 오는 날 무한도전 틀어놓고 배 깔고 누워 만화책 보면서 빈둥거리며 사는 것이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