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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미경_기다림이 있는 예천, 그 속으로]함께의 가치를 세운, 금당실 송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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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 있는 예천, 그 속으로
함께의 가치를 세운, 금당실 송림
글. 전미경
사진. 예천문화원
자연이 그려놓은 숲은 늘 *돋을새김이었다. 바람이 그린 무늬가 그랬고 햇살이 새긴 결이 그랬다. 설렘에 더해진 미문의 만족이다. 빼어난 경관만큼이나 눈이 열리면서 걸음을 붙들어 세운다. 자연은 생성과 소멸의 법칙 따라 발전과 퇴화를 이어왔다. 멈춰야 보이고, 보아야 들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금당실 송림이다.
솔숲은 사시사철 변함없이 길손을 맞으며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한결같은 모습 그대로다. 송림에 첫발을 디딜 때의 느낌이 생명체의 꿈틀거림이었다면 두 번, 세 번 찾았을 땐 숲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온전히 마음을 빼앗기는 거였다. 보금자리를 갖기 위한 노력은 모든 생명체의 본능일 터, 자연은 늘 그렇듯 생명 보존을 위해 문지기가 되어야만 했다. 햇살과 바람이 길을 열고 그 틈새로 숨탄것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대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의 기지개였다.
천연기념물 제469호로 지정된 금당실 송림, 존재만으로도 쉼이 느껴지는 곳이다. 금당실은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해 온 마을로서 정감록이 예언한 십승지 중 한 곳이다. 재난이나 전쟁으로부터 피해 갈 수 있는 명당 중 명당으로서 주민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자부심이자 긍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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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 : 조각에서, 평평한 면에 무늬나 모양이 도드라지게 새기는 기법
송림은 마을 서쪽에서 남북으로 길게 띠를 형성하고 있는데, 조성 당시 방풍림과 수해 예방을 위한 숲이었다면 지금은 인접한 배움의 터를 지키는 학자수(學者樹)로도 손색이 없다. 군락을 이뤄 세대를 잇는 교두보로써 막중한 책임을 다하고 있다. 후진 양성과 함께 학자수의 몸 둘레도 아이들의 성장만큼이나 팽창하고 있다. 미래를 이끌 교정의 아이들이 솔의 정기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가지에서 잎에서 뿜어져 나오는 응축된 기상만은 절대 놓쳐선 안 될 일이다. 솔은 말하지 않아도, 들려주지 않아도 전해지는 메시지에 든든한 무게감이 실려 있다. 근주자적(近朱者赤)이라 하지 않았던가. 붉은빛을 가까이하면 주위도 함께 붉어진다고 했듯 솔향 가까이 서면 뼛속까지 그 기운이 스며드는 것만 같다.
솔 아래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하나의 우주를 닮았다. 가지와 가지 사이, 잎과 잎 사이, 그 안에 세상 이치가 다 들어 있는 듯하다. 적당한 간격을 둠으로써 서로 부딪혀 상처 입지 않을 거리엔 헤아리고 품어줄 이해도 담겨 있다. 솔숲은 삶의 고단함 잠시 내려놓고 한 박자 쉬어갈 여유를 안으로부터 흘려보내고 있다. 자연에 동화되어갈 수 있도록 배려한 안내다. 솔향 짙은 이 숲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면 생각이 열리면서 가슴에 뭔가가 꽉 차오른다. 거추장스럽고 주눅 든 마음도 금당실 솔숲에 들어서면 심신의 안정이 되살아난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 그랬고 지금처럼 따사로운 봄날이 그랬다. 비 갠 어느 주말, 구름이 걷히면서 말간 하늘과 마주할 때의 그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세상에 드리운 모든 불순물이 일순간 걷히는 것 같았다.
자연은 거짓을 모르는 대신 침묵을 가르쳐 왔다. 애써 들으려 하지 않아도 마음 맑은 날이면 자연스레 들리는 게 금당실 솔이 전하는 이야기다. 늘 같은 마음으로 차별 없이 사람을 대하고, 위로가 필요한 이에겐 생의 곁가지 하나 내어줘 따뜻이 감싸 안으라 일러준다. 시작과 끝을 한 뿌리로 내리는 동안 흔들림 없는 지조가 이미 귀감이다. 소나무 한 그루의 일생도 중요하지만, 수백 그루가 어깨 나란히 겯고 서로 보듬으며 의지해나가는 걸 보니 대견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함께의 가치가 주는 감동이다. 마을의 수호를 위해 몇 차례 벌채가 이루어졌음에도 지금껏 건강한 모습으로 건재하다는 건 송림을 지켜낸 동력이었을 테다. 보물적 가치를 지닌 금당실 송림은 앞으로 현세와 후세인이 지키고 보존해야 할 당면 과제이기도 하다.
송림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왔다. 그 덕에 거센 바람 온몸으로 막아내며 어디서도 찾기 힘든 잘 차려진 숲의 모습이 되었다. 어긋남 없이 서로 다독이며 올곧게 뻗어나가는 걸 보면서 나무의 덕행이 읽히기도 했다. 있어야 할 자리를 알고 물러날 때와 나아갈 때를 아는 지혜, 그것은 혼자가 아닌 함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껏 송림은 계절의 순환에 몸을 맡길 뿐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무성한 잎이 그늘로 자리하기까지 모든 걸 묵묵히 받아들이며 순응해야만 했다. 그 덕에 흔들림 없는 심지를 지닌 나무로 당당히 설 수 있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굽힘 없는 자세로 위용을 드러내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지금껏 많은 솔숲을 거닐었지만 이렇듯 위세 당당한 숲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로운 모습이다. 달콤한 입발림도, 진실에 가려진 거짓도 솔숲은 모두 알고 있는 듯 내딛는 걸음 위로 참의 의미를 일깨운다. 사유(思惟)로 이어진 숲의 길이다. 늘 단단한 줄만 알았던 둥치에 힘겨움을 매단 옹이가 간혹 눈에 띈다. 거친 삶을 대신한 흔적이다. 그 모습은 악착같이 견뎠기에 아픔과 고단함을 이긴 훈장이기도 하다.
솔방울, 솔가리가 바닥에 지천이다. 마치 융을 깔아놓은 듯 겹겹이 쌓여 있다. 향긋한 쑥이 그 위로 얼굴을 내민다. 제비꽃도 이에 질세라 여기저기 꽃망울을 터트린다. 때마침 나비 한 마리 날아와 몇 번의 원을 그리다 사라진다. 바닥에 서식하는 미생물에겐 더할 나위 없는 천국일 테다. 마음으로 쟁여지는 여유로움에 만족이 들어선다. 자연이 주는 혜택이자 최고의 가벼움이다.
그동안 솔숲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졌지만, 그 깊이를 다 헤아리지 못했다. 숲이 뿜어내는 소리를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은 탓이다. 무엇이 그토록 삶을 옥죄며 마음의 귀를 닫게 한 것일까. 숲은 단 한 번도 말이 없었다. 무언에 깃든 외침만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자연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기도 하지만 이렇듯 짧고 굵은 해답을 얻기도 한다. 솔은 오늘도 햇살이 열어 놓은 길, 바람이 지나는 길에서 옹이진 마음 다독이며 함께 가자고 기다림을 준비한다. 세상 중심에서 밀려난 이들을 보듬으라는 당부가 그 안에 담겨 있다.
버리고 버려도 버릴 것이 수두룩한 세상사, 행여 부질없는 일 앞에서조차 내려놓는 데 익숙지 않아 움켜쥐기만 했던 지난날이다. 그동안 의미 없는 일에 기울인 정성이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음이 부끄러움 되어 되살아난다. 어차피 버려질 것임에도 손아귀에서 쉬이 놓지 못하고 집착했던 시간이었다. 이제 모든 집착 내려놓고 비우는데 마음을 더 쏟아야 할 때다.
고요와 평화가 깃든 터전에 똬리를 틀며 세월을 이어오는 동안 어찌 말 못 할 설움이 없었을까만, 그 기막힌 사연을 견딘 노고가 이렇듯 기세등등한 나무로 우뚝 서게 했다. 웅장하고 위엄 있는 송림은 몇 번을 찾아와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 그대로다. 늘 그랬듯 호위병처럼 금당실을 지키고 있기에 역사와 전통 위에 세워진 마을의 보물로서도 손색이 없다. 나에겐 최고의 소나무 군락지임이 표명된 성스러운 날의 기록이다.
- 글쓴이 : 전미경
- -영주에서 출생하여 초,중,고를 다님 -대학에서 경영학을,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현대문학)을 전공함 -제21회 신라문학대상 수필 당선으로 등단(2009년) -2020년 경상북도 문화진흥기금 수혜 -수필집『이끼로 사는 이유』발간 -영주시민신문 오피니언 필진 -그늘지고 소외된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