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임은혜_연극으로 만나는 세상]연극, 공동체를 향한 디딤돌
- 임은혜
연극이 있는 마을
청송군 송생리 후평 마을에 살고 있는 상훈이와 상희, 옆 마을 한실에 사는 태창이를 만난 건 1년 전 겨울이었다. 나무닭움직임연구소[주1]가 이곳으로 작업장을 옮겨온 지 2주일 즈음 됐던 것 같다. 연습장 마룻바닥을 깔기 위해 나무판을 손질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호기심 반, 수줍음 반의 얼굴로 찾아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서커스 한다면서요? 할머니들이 그렇게 말하던데요!"
몇몇 어르신들이 찾아와서 뭐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을 때 연극하는 사람들이라고 대답했는데 그분들은 '연극'이라는 말조차 모르고 계셨다. 그래서 우리 단체가 갖고 있는 천막극장 자재들을 보여드리며 이것을 설치해 놓고 배우들이 연기를 한다고 설명해드렸더니 그제야 알겠다고 하셨다. 그분들에게 연극이란 까마득한 옛날, 장터에서 본 유랑 서커스단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마을에 서커스단이 이사 왔다고 소문이 돈 것이다.
아이들은 한동안 비어있던 폐교가 자기들의 아지트라고 했다. 자신들의 놀이터가 타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넘어간 것을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연극하는 사람들이 마을에 왔으니 뭔가 구경할 게 생길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는 듯 했다.
방학인데 무엇 하며 지내냐니깐, "그냥 방구석에 쳐 박혀 있지요 뭐..." 라고 사투리 섞인 말투로 대답해서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학원을 다니지 않는 아이들, 논두렁 밭두렁을 뛰어다녀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얼굴, 온종일 놀고 또 놀다가 무언가 새로운 놀 거리를 찾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한 아이들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도시 아이들과는 달리 우직하고 맑아 보이는 이들을 그냥 놔둘 수가 없었다. 아이들을 위해 매주 토요일마다 ‘공연예술놀이터’를 시작했다. 닥종이 인형을 만들었고, 포이[주2]와 장다리(키다리)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아이들은 토요일마다 어김없이 찾아와서 공연예술 기능을 익혔고, 우리는 아이들을 통해 마을 소식을 접했다.
아이들은 청송 사과축제에서 처음 열린 사과연극제에도 참가하게 되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사과에 얽힌 이야기들을 찾아내어 만든 그림자극이었는데 사과연극제 개막작으로 올려졌다. 상희는 장다리를 타고 관객 앞에서 해설을 했고, 상훈이와 태창이는 스크린 뒤에서 조명과 그림자 인형을 조작하며 공연을 했다. 상희는 수줍음 많던 평소 모습과 달리 씩씩하게 사과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태창이와 상훈이는 차분하고 집중력 있게 그림자극을 진행했다. 이전까지 사과축제에서 구경꾼으로만 맴돌던 아이들이 연극을 통해 지역 축제의 한 부분을 담당한 것이다.
2008 사과연극제에서 관객들과 함께한 제주도 놀이패 '한라산’ 공연
지난해 10월, 처음 시작한 사과연극제는 성공적이었다. 극단이나 상설 극장 하나 없는 청송에서 연극을 접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나무닭 천막극장을 가득 메웠고, 야외 마당극장 역시 성황리였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배우들의 움직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지켜보시다가 신명 나면 박수를 쳐주고 '얼씨구' 하면서 추임새를 넣으며 어깨를 들썩거리셨다. 도시의 정돈된 극장에선 도저히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배우들과 함께 호흡하고 기운을 주고받으며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어내는 힘, 그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공동체의 열망과 신명이었다.
지난해 여름엔 서울 구로지역에 있는 방과후 공부방 청소년 40여명이 송생리에 와서 숲 속 공연예술 캠프를 쳤다. 나무닭이 서울에서 활동할 때 만났던 아이들인데 청송으로 작업장을 옮기게 되어 산과 강이 있는 자연 환경 속에서 연극캠프를 하게 된 것이다. 서울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고 있는 이 아이들에게 자연과 함께 했던 3박 4일의 공연예술 놀이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일 것이다. 탈을 만들고, 포이를 돌리고, 그림자극을 창작하고, 마을 어르신들의 다정한 격려와 풀벌레와 새소리로 둘러싸인 청정의 공간은 도시문화에 찌들고 움츠려있던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열게 했다.
마지막 날, 아이들은 송생리 후평마을 어르신들을 모시고 그동안 자신들이 배우고 익힌 것을 공연했다. 모닥불을 피우기 위한 장작을 모으고, 무대를 만들며 공연장소를 준비했다. 잔치 음식 준비 팀은 부침개를 부치고 국수도 장만해서 대접했다. 홍보팀은 초대장도 만들어서 마을에 돌리고 일하고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어깨를 주물러드리며 자기들이 준비한 공연을 보러 오라던 아이들의 열기가 아직도 마을에 남아있다.
언제나 어둡고 고요하기만 한 후평 마을의 여름밤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은은한 달빛과 모닥불을 조명 삼아 아이들이 빚어내는 그림자극과 몸짓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마을 사람들과 그곳의 모든 생명들까지 노래하고 춤추는 밤, 기존의 질서를 멈추고 새로운 세계가 창조될 때의 활력과 생명력으로 돌아가는 느낌, 우리는 거기서 공동체의 유토피아를 체험했다.
숲 속 공연예술놀이터에서 공연하는 아이들 - 그림자극과 포이 돌리기
송생리 아이들은 도시 아이들이 보여준 공연에 대한 답례로 짧은 연극을 보여주었다. 자신들이 직접 구성하고 연출하여 탈을 쓰고 장다리를 타고 포이를 돌렸다. 더 이상 심심해서 어찌할 바 모르던 아이들이 아니었다. 공동체의 문화가 사라진 마을에 예술의 싹을 틔우고 활기를 불어넣는 문화 일꾼들이었다.
이젠 송생리에는 '서커스' 대신 '연극' 이란 말이 있다. 언제든지 내보일 수 있고 다른 지역의 문화와도 교환할 수 있는 작은 공연자들과 그들만의 소박한 연극이 있다.
마을 공동체를 향한 소망
나무닭은 시골로 이사 오면서 마을 대대로 전해오는 민속이나 전통예술을 접할 수 있지 않을까, 농사 주기에 따른 마을 고유의 공동체 문화가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가구 수가 22개 정도 밖에 안돼는, 초등학생 네 명, 최소 연령 성인이 62세인 우리 마을은 마을 풍물패도 없을 뿐더러 읍면동 체육대회에서 매년 꼴찌를 면치 못하는 곳이다. 다행히 작년에는 나무닭 사람들이 장구와 꽹과리를 치면서 응원을 한 덕분에 처음으로 응원상이란 걸 받게 되었다.
전통이 단절되고 공동체가 해체된 마을은 생기를 잃어간다. 새해를 맞이했지만 신년행사도 없고, 입춘굿, 정월 대보름굿 등 마을 공동체가 한 해의 풍요를 기원하는 놀이나 전통 의례가 없다. 마을 큰 마당은 신작로와 콘크리트길로 갈라져버렸고, 마을 잔치 때마다 울려 퍼지던 풍물 가락과 민요가 있던 자리엔 노래방 기계와 뽕짝 가요들이 들어와 앉아있다.
선조들의 지혜와 문화가 살아 숨쉬던 농촌이 쇠락해가고 있는 건 이곳만이 아니다. 전국 어디에서나 농촌은 문화가 없고 환경이 열악한 곳, 자식 교육과 출세를 위해선 떠나야 할 곳으로 낙인 찍혀있다. 이제 땅과 생명을 살려내던 농업은 국가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축소되어야할 업종으로 천대받고 있다.
가끔씩 나무닭 사람들은 서로 묻는다. 우리 마을이 언제 사라질까? 30년쯤? 20년쯤? 젊은 농부가 없는 이 마을은 어쩌면 10년도 안되어 사라질 위기에 닥칠지 모르겠다.
마을과 더불어 연극을 하겠다고 시골로 왔는데 스러져가는 마을을 보게 된다. 어떻게 마을을 살려낼 수 있을까. 연극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마을의 문화를 살리기 위한 실마리를 옛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우리네 선조들은 마을 공동체 안에서 여러 신들과 어울려 살았다. 서낭당에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신을 모셨고, 마을 입구에는 공동체의 건강과 평안을 지켜주는 장승이 있었으며 마을 곳곳에 솟대를 세워서 보이는 세계 너머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계절의 주기에 따른 파종, 경작, 수확이라는 노동의 흐름 속에서 노동요를 부르고, 풍물을 울리고 탈춤을 추면서 공동체의 풍요를 기원했다. 가뭄이 들거나 장마가 지고, 전염병이 돌고 흉년이 들 때도 굿판을 벌이면서 마을의 탈을 함께 풀어나가는 강인한 연대의식이 있었다.
마을 공동체를 지탱해주는 힘이 바로 마을의 오랜 전통 속에서 일구어온 공동체 놀이와 예술이었다.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구성진 노동요 한 자락씩은 부를 수 있었고, 마을 어른들이 치는 풍물 소리에 익숙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풍물 장단을 전수받았으며 보이지 않는 세계와 죽은 자들의 내력을 보여주는 무당의 구술과 몸짓에 익숙했던 사람들의 연극적 상상력은 오늘의 대중과는 비교할 수 없이 심오하고 놀라웠다.
연극은 깊고 강한 인연과 공통된 역사와 세계관으로 맺어진 공동체의 산물이다. 공동체의 문제를 함께 나누고 집단의 유토피아를 재현하며 사회 구성원을 엮어내는 놀이가 본래 연극의 모습이었다. 공동체의 소망이 연극을 통해 눈앞에 펼쳐지는 동안 관중은 죽은 것처럼 보이는 자연의 생명이 다시 살아남을 믿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주술적으로 소통하고 강렬하고도 범세계적인 욕망, 순결한 신앙적 열망에 휩싸이는 특별한 경험, 이것이 바로 연극이었다.
이러한 연극에서는 배우와 관객이 분리되지 않았다. 배우와 관객 모두 동질의 소망을 지닌 공동체의 일원이며 연극은 그들의 삶이 예술로 자연스럽게 이행한 것이요, 집단의 소망을 재현한 것이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연극의 본질은 만남이다. 제각각 따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여 공동의 역사와 이야기, 동질의 놀이를 갖게 하는 연극은 건강한 공동체를 엮어가는 디딤돌이다.
이제 따스한 햇살이 땅 속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흙 속에 웅크려 있던 씨앗들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처럼 주왕산으로 가는 길목, 송생리 후평 마을에도 공동체를 향한 풀뿌리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 주 -
1) 필자가 소속된 연극 단체이다. 몸, 마음, 소리, 사회의 움직임 등, 다양한 움직임 안의 보편성을 찾는 작업을 한다. 탈, 꼭두, 그림자, 신화 속에 담겨있는 놀이를 결합한 제의 연극을 연구하고 공연한다.
2) 뉴질랜드 원주민들이 사냥할 때 사용하던 도구로 손목 돌리기 연습을 하며 놀던 것인데 우리나라 쥐불놀이와 비슷하다. 끈에 공을 매달아서 여러 가지 기술로 돌리는 놀이다.
- 글쓴이 : 임은혜
- 극작가, '나무닭움직임연구소'는 청송군 청송읍 송생리에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