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남효선_동해연안의 문화여행]겨울, 산중서 기다림을 보다 기다림은 느릿느릿한, 그러나 질긴 힘
- 남효선
겨울, 산중서 기다림을 보다 기다림은 느릿느릿한, 그러나 질긴 힘
기다림은 색깔입니다.
기다림은 나뭇잎을 떨군 겨울, 자작나무를 흔드는 바람입니다. 바람은 계곡 바위를 어르며 흐르는 투명의 강을 얼리는 얼음 빛입니다. 바람이 세찰수록 자작나무 흰 살갗은 더욱 또렷해집니다.
기다림은 진홍빛 잎사귀를 다 떨군 채 온 몸으로 눈발을 맞고 있는 산벚나무, 키만 훌쩍 큰 산벚나무 적갈색 껍질입니다. 산벚은 눈발에 맞서 요동도 없이 온 몸을 내맡기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골바람을 막으려 사방을 송판으로 막고 나지막하게 지붕을 덮은 산골집, 구들을 덥히는 흰 연기가 하늘로 오릅니다. 기다림은 발갛게 구들을 덥히고 머리를 풀어 하늘로 오르는 흰 연기입니다. 다홍빛 불꽃을 피워 올리며 장작은 제 몸을 태워 팔십 노모의 구들을 따뜻하게 데울 것입니다.
겨울로 들어서는 들녘은 온통 기다림으로 가득합니다. 온 한 해 동안 제 핏줄을 살리고 제 살점을 채운 소중한 낱알들을 모두 비우고, 들판은 바람 속에 알몸을 맡기고 있습니다. 눈발이 잦아들고 따뜻한 바람이 불면 다시 핏줄이 돋고 힘줄이 불거질 것입니다.
기다림은 '비질'입니다.
여든 네 해 동안 산중마을을 지켜 온 ‘언남’ 할미가 강아지 두 마리와 함께 문 앞길을 싸리비로 쓸고 있습니다. 할미가 혼자 키우는 염소도 새끼를 데리고 할미 곁을 맴돕니다. 언남할미가 밥상을 물리고 제일 먼저 서두르는 일은 대문 앞 고샅길을 쓰는 일입니다. 빗질을 멈추고 언남 할미는 대문 곁에 쪼그리고 앉습니다. 할미의 흰 머릿결 위로 계란노른자만한 햇살이 한 줌 내려앉습니다.
언남할미의 ‘두지(나무로 만든 창고)’ 추녀 끝에 ‘배추 시래기’가 바람에 흔들립니다. 겨우내 언남할미의 양식이자 대처로 나간 자식네들에게 보낼 어미의 손맛입니다.
300년은 족히 넘었을 투방집을 지켜 온 칠십 할미가 인기척에 손바닥만 한 싸리문을 열고 고개를 내밉니다. 방안은 환한 대낮임에도 컴컴합니다.
할미와 할애비는 오래된 감나무가, 뒷산의 꿀밤나무가 그렇듯 산중 외딴 투방집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면 얼었던 텃밭을 갈아 종자를 뿌릴 터입니다.
온 백발의 할애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문밖으로 나옵니다. 라디오의 노랫소리가 모기소리만큼 가늘게 할애비와 함께 문밖으로 느릿느릿 걸어 나옵니다.
아비의 아비의 아비가 물려 준 투방집을 평생 지키고 가꿔왔듯이 할미와 할애비는 말하지 않아도 제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듯 순한 눈빛으로 낯선 방문객을 맞습니다. 할미가 틀니를 드러내며 환한 웃음을 꽃처럼 피웁니다. 초가지붕에 제 홀로 피어난 박꽃같습니다.
할미의 이름은 ‘얌전이’입니다. 호적 이름은 '통분(通紛)'입니다. 열여섯에 울진 ‘굴구지’ 마을에서 영양 수하 ‘베즘마을’로 시집 온 이래 친정인 굴구지마을과 영양읍내 장터 외에는 대처로 나가 본 적이 없답니다.
올 가을 엮어 올린 초가 영개(이엉)가 골바람을 맞아 더 샛노랗습니다. 초가 영개 끝에는 곳감이 제 몸을 얼렸다 녹였다 하며 검은 다홍빛으로 익어가고 있습니다.
할미와 할애비는 오래된 감나무가, 뒷산의 꿀밤나무가 그렇듯 산중 외딴 투방집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면 얼었던 텃밭을 갈아 종자를 뿌릴 터입니다.
일월산 자락에 보일듯 말듯 자리한 산중마을 수하리 '베즘골'에 사는 김대준 할아버지 부부는 300년이 훨씬 넘은 '투방집' 을 조부 때부터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자연을 제 몸으로 끌어 당겨 제 스스로 익힌, 느릿느릿한 그러나 질긴 힘입니다.
산모롱이를 돌때까지 할미와 할애비는 골바람 속에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영양군 수비면 수하마을 '베즘골'에서 찍었습니다.
- 글쓴이 : 남효선
-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안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공부하였다. 1989년 문학사상의 시 부문에서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였다. 한국작가회의, 경북작가회의, 안동참꽃문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둘게삼』이 있다. 현재 시민사회신문의 전국본부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