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만동_영화이야기]BLACK
• 김만동 2009-03-05

심라의 앵글로 인디언 가문의 장녀인 주인공 미셀 맥날리는 두 살 때 열병으로 시력과 청력을 모두 잃어버리고 어둠과 고요 속에서 헤매다가 열 살 때 데라둔 특수학교 데브라지 사하이 선생님을 만나 그의 사랑과 헌신으로 단어를 이해하게 되고 수화와 점자를 배워 숱한 어려움 끝에 대학에 입학한다. 세 번의 낙제 끝에 진급하지만, 스승을 만난 지 18년 만에 스승과 헤어지게 된다. 이미 알츠하이머의 기미를 알게 된 사하이가 미셀 의 자신을 향한 사랑을 거니채고 떠나버린 것이다. 사하이 선생님이 떠나고 12년 동안 주말마다 미셀은 교회에서 그가 자신에게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그녀의 선생님이 돌아오지만, 그는 이미 알츠하이머가 도져 말하는 법까지 깡그리 잊어버린 상태다. 자신에게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밝혀 준 사하이 선생님께 이제는 미셀 자신이 빛을 밝혀 주리라 다짐한다. 선생님과 헤어진 지 12년 만에, 선생님을 다시 만난 지 12일 만에 대학을 졸업하게 된 미셀은 졸업가운을 입지 않은 채 졸업식장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한다. 졸업가운을 입은 모습을 가장 먼저 선생님께 보여주기 위해 선생님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달려가고, 드디어 사하이는 기억의 실마리를 찾는다.

헬렌 켈러의 자서전과 비교해 보면 미셀 맥날리와 데브라지 사하이는 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님을 모델로 만들어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대저택에서 하인을 부릴 정도의 권세가에서 태어난 것이나, 두 살 때 열병을 앓고 나서 시력과 청력을 잃어버린 것이나, 여동생 사라의 요람을 뒤집어버린 것이나,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은 것이나, 열정적이며 헌신적인 선생님을 만난 것이나, 최초로 단어와 그 의미를 깨우치게 되는 단어가 ‘물(water)’이라는 것이나, 브라유 점자를 만난 것을 보면 그렇다. 영화의 처음에, 농아와 농맹아를 위한 헬렌 켈러 재단에 감사한다는 자막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미국이 인도로, 펌프가 분수로, 여자 선생님이 남자 선생님으로, 복합장애를 극복하고 24세에 대학을 졸업한 선구적이며 천재적인 인물이 지극히 평범한(?) 인물로 바뀐 것 말이다.

미셀 맥날리가 데브라지 사하이 선생님에게 바치는 헌사인 이 영화는 어둠과 고요 속에서 빛과 소리의 세계로 나아간 한 인물, 혹은 그 일을 가능하게 한 또 다른 한 인물의 눈물겨운 사랑에 대한 영화이다. 눈물겨우니만치 처음부터 끝까지 곰비임비 눈물을 흘려야 한다. 도무지 먹먹해져서 저릿한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금세 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쏟아야 하는 것 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이 마를 겨를이 없다.

이 영화는 어찌 보면 또 종교 영화다. 영화를 열고 닫는 장면의 배경이 교회이며, 미셀이 속한 모든 공간에는 종교적 이미지가 가득하다. 십자가가 줄곧 등장하는데, 미셀의 내레이션 첫 장면에서 여섯 개의 창문 속에는 십자가가 들어있고, 교회에서 돌아와 분수대에 앉아있는 선생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미셀이 성에 낀 차창을 닦은 모양도 십자가이며 킹에드워드 대학의 창문 또한 십자가 형태다. 그리고 사하이가 입원한 병실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놓여있다. 인류를 구원한 예수님의 큰 사랑은 그러므로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인 것이다.

이 영화는 몇 가지 면에서 인상 깊다. 스토리라인은 진부하지만 감동적이며, 배우들의 메떨어지지 않은 연기는 절묘한 앙상블을 이룬다. 음악과 조명은 빈틈없이 어울리고, 카메라는 문득 우리의 시점 밖에서 가만 우리를 응시한다.

영화의 각본 및 제작에도 관여한 산제이 렐라 반살리 감독의 제작노트를 빌리지 않더라도 영화의 내용은 매우 드라마틱하고 탄탄하다. 바탕이 된 헬렌 켈러의 이야기보다 훨씬 인간적이면서도 극적이다. 인물 사이의 헌신과 사랑, 열정과 신뢰를 촘촘히 잘 엮어놓았다. 도무지 뻔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지만 시재의 잦은 이동 속에서 상상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나, 더스틴 호프만, 문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라니 무케르지와 아예사 카푸르의 장애 연기도 놀랍지만, 참말이지 아미타브 바흐찬의 연기는 영화를 압도한다. 그의 눈빛, 그의 목소리, 그의 몸짓의 진정함이라니! 이들이 출연했거나 산제이 렐라 반살리가 감독한 다른 영화를 꼭 다시 만나고 싶다.

이 영화에는 어둠과 빛, 흑과 백의 은유가 음악처럼 흐른다. 원색은 숨죽여 흑백의 조화를 은근히 돕는다. 미셀의 내레이션 장면이나, 사하이가 입원한 병원 장면에서는 특히 흑백이 강조되는데, 키 조명보다도 보조 조명이나 후방 조명이 풍성한 화음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때마다 음악은 또 그레이를 거쳐 화이트로 폭발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언제나 눈부신 음악과 함께 있다. 분수대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손으로 만지며 처음으로 미셀이 단어의 의미와 형식의 관계를 깨닫는 장면에서 아역 배우의 연기를 더욱 도드라지게 받쳐주는 주제 음악이 그렇고,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미셀이 나탈리콜의 ‘사랑(love)’을 부르는 가수의 입을 손으로 만지며 춤추는 장면도 그렇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4박자 엉거주춤한 엉덩이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셀이 졸업 가운을 입고 사하이 앞에 서는 마지막 장면을 나는 잊지 못한다. 이윽고 쏟아지는 은빛 빗줄기 속에서 두 사람은 최초의 의미 단어 ‘물(water)’을 기억해내게 되는 것인데, 졸업 가운과 두 사람의 모자만 블랙일 뿐, 사하이의 옷과 건물과 비의 백색 난사는 화면을 삼켜버린다.

미셀이 같은 강의를 2년째 듣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페르난데즈 학장이 예술대 1학년 과정을 브라유 점자책으로 만들어 ‘선의를 행하는’ 장면에서 사하이는 출구를 잊어버린다. 이른바 알츠하이머의 발병이다. 이 장면은 미셀과 사하이 사이의 헌신이 다시 한 번 증폭되는 꼭짓점이자 반환점이 될 터인데, 그것은 벅벅이 하늘의 주재일 것이다. 동생 사라의 결혼식 전날 가족 모임에서 사라의 마음속 상처를 어루만지며 눈물로 화해한 장면이나, 졸업식 강연 마지막 ‘선생님’을 외쳐 부르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하이 앵글이다. 마치 하늘에서 누군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부감하고 있음을 일깨워주듯이.

눈을 감아도 내내 영화 속 장면들이 암암하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삶의 사하이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를 위한 사하이인가, 아니 미셀인가?

글쓴이 : 김만동

안동 경덕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