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황구하_시로 거니는 상주]때로 비 내리고 때로는 햇볕 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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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거니는 상주
때로 비 내리고 때로는 햇볕 나니
글 황구하
영암각
집 근처 천봉산 품에 깃든 성황사(城隍祠)와 영암각(靈巖閣)의 가을을 만나고 왔습니다. 아픈 시절 기도하듯 북천 징검다리를 건너 만산2리 안너추리 마을로 들었는데요. ‘너추리’라는 말은 천봉산이 호박 넌출(넝쿨) 같은 모양이라서 나온 이름이라 합니다. 천봉산은 석벽과 암반으로 이루어져 석악(石嶽)으로 불리는데요. 노악(露嶽. 노음산), 연악(淵嶽. 갑장산)과 함께 상주 삼악(三嶽)으로 꼽습니다.
안너추리 마을 입구, 막 물들기 시작한 느티나무와 돌로 쌓은 탑이 우직했는데요. 이 동네서 60년을 살았다는 전용식(75세) 어르신을 돌탑 아래 우연히 만났습니다. 옛날에 무슨 일로 오래된 돌탑을 헐어 들어낸 적이 있다는데요. 그때 엽전이 가득 든 단지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 후로 마을에 우환이 잦아 마을 사람들이 1997년 지금의 돌탑을 다시 쌓았다고 합니다. 돌탑을 빙 둘러 여러 개의 선돌이 있는데 불 화(火) 자가 음각되어 있었습니다. 마을을 위한 등촉(燈燭)의 의미로 다가왔는데요. 재앙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자연(水, 濕, 陰과의 조화)의 이치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돌로 된 제단도 보였습니다. 누군가 무슨 간절함이 있었는지 술병과 사탕이 놓여 있었습니다.
바로 위쪽, 도랑을 복개했다는 길 가운데에는 또 한 그루의 느티나무 고사목이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죽은 채로 서 있지만 살아 있을 때의 품새를 짐작케 했지요. 고사목 아래 키 큰 해바라기가 빙 둘러 서서 올 한해 소임을 다했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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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와 돌탑 |
고사목 |
고사목을 지나 왼쪽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오르막길 마을 집들과 계단식으로 이어지는 밭마다 감나무가 즐비했지요. 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습니다. 채 물들지 않은 이파리도 무성했습니다. 올해 가을장마로 감 농가들 피해가 많은데 이곳은 그나마 좀 나은 듯했습니다. 감나무는 물 빠짐이 좋은 곳에 심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곳이 그런 곳인가 봅니다. 길옆 어느 밭에는 무청이 푸르고 배추는 벌써 허리를 동여맸습니다.
길을 오르다 한 숨 돌리고 나니 영암각 건물과 느티나무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서서히 기우는 해가 이곳에 걸쳐 눈이 부셨습니다. 새소리도 맑게 울렸지요. 영암각은 커다란 바위를 모신 집입니다. 여기에는 전설이 있는데요.
옛날에 상주에 부임하는 목사가 북행을 하면 자주 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런 와중에 갓 부임한 어느 목사 꿈속에 커다란 바위 한 채가 나타나 도움을 청했답니다. 비바람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인데요. 오랜 세월 풍상을 겪어 지칠 대로 지쳤으니 소원을 들어준다면 고을이 태평하도록 보답한다고 했답니다. 목사는 생생하게 꿈에서 본 형상의 바위를 찾게 했는데 그 바위를 천봉산에서 찾았다지요. 마을 사람들과 뜻이 모아져 지금의 바위 집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영암각 안에 있는 바위의 높이는 9m, 둘레는 약 18m 정도 된다고 합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산이나 논, 밭에 있는 바위를 신성시 했습니다. 바위나 나무를 미륵이나 신목(神木)으로 섬기는 우리의 토속신앙을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영암각 뒤편 서향으로 앉혀진 성황사는 상주지역의 향리가 중심이 되어 고을 제사를 모셨던 장소입니다. 고을의 안녕과 나라를 위한 치제(致祭)를 한 것인데요. 이곳에도 전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안너추리 마을에 남매가 있었는데 일찍이 엄마는 죽고 계모와 살았습니다. 계모의 구박이 얼마나 심했는지 남매는 계모를 피해 천봉산 깊숙이 숨어들어 지내다가 굶어죽었답니다. 나무꾼이 나무하러 갔다가 죽은 남매를 발견하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무덤을 만들어 주었는데요. 죽은 남매가 나무꾼의 꿈에 나타나 절을 하면서 자신들의 죽음을 알리는 신상(神像)을 만들어 달라고 했답니다. 나무꾼과 마을 사람들은 남매 모양의 신상을 깎아 모시고 집을 지어주었다는 전설이지요.
또 어느 처자가 땔감을 하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기절했는데 눈을 떠보니 계룡산의 어느 암자였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불교를 수행하던 대사가 호랑이 목에 걸린 인골을 뽑아준 일이 있었는데, 그 호랑이가 은혜로 대사를 장가보내려고 처자를 데려갔다는 것입니다. 대사의 극진한 간호로 깨어난 처자는 대사에게 흠모의 정이 들었답니다. 고심하던 대사는 처자와 의남매의 인연을 맺고 평생 불교 정진에 힘썼다는데요. 대사가 입적 후 사리탑을 세운 것이 공주 계룡산 갑사(甲寺)의 남매탑이고, 처자가 살던 상주 천봉산에 성황사를 짓고 남매상을 모시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황사
성황사에는 남녀 목각 신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부부상이라고도 하고 남매상이라고도 하는데 원래의 신상은 2011년에 도난 되었고, 지금의 신상은 도난 이후 새로 만들어진 것이랍니다. 지금도 매년 음력 사월 초파일 노인회 주관으로 마을의 안녕을 축원하는 성황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성황신은 상주목 내의 여러 신 중에서 으뜸이며, 제례 때에도 3일 전 성황사(단)에 발고제(發告祭)를 지내고 여신제(厲神祭)를 지낼 만큼 상주목 내의 여러 치제 신 중에서 지위가 높았다”(김상호, 『상주읍성』(상주문화원, 2020))는 걸 잘 알 수 있습니다. ‘성황사’와 ‘서낭당’은 발음상으로 비슷한데요. 서낭당은 민간의 제사 대상이지요.
1990년 10월 상주시에서 지방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하여 성황사를 중수할 때 나온 상량문에
“위에 들보 얹고 보니/은하수 밝아 있고 하늘은 널찍하네/때로 비 내리고 때로는 햇볕 나니, 밝고 빛남이여 승천하는 기상일세(抛樑上兮/銀漢昭兮玉宇曠/時雨兮時暘/皥凞凞兮昇(天)氣像)” 그리고 “모든 집이 평안하여 모두가 농사일에 즐겁도록 해주소서(百堵俱安各自樂於桑榟)” (김기탁, 『상주 민속문화의 이해』(민속원, 2003))라는 구절이 눈에 띕니다.
돌탑
자연에 대한 경배와 나라와 고을, 개개인 삶의 정신적 풍요로움까지 소망하는 걸 볼 수 있는데요. “때로 비 내리고 때로는 햇볕 나”는 세상사, 질병과 재앙을 방지하고자 불교, 도교 및 토속신앙까지 포용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천봉산의 큰 바위들은 달바위[月巖]로 일반 서민들이 치성을 드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올라올 때도 그러했지만 커다란 바윗덩이가 저마다의 위용으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덩치가 큰 데도 모나거나 투박하지 않고 후덕하게 생겼습니다. “은하수 밝아 있고 하늘은 널찍하”니 돌탑의 품새 또한 기품 있고 넉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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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집 |
돌담 맨드라미 |
달바위 사잇길에서 아랫녘을 내려다보니 시내가 훤히 보이고 가슴이 확 트였습니다. 새소리 바람 소리 밟으며 천천히 내려오는 길, 하얀 억새가 석양에 반짝였습니다. 인적 드문 산골에 왔다가는 걸 마치 배웅이라도 하듯 산에서 만난 고양이 한 마리가 앞장서서 걸어주었습니다.
어느 집 돌담에 맨드라미가 붉게 서 있었습니다. 극지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건지요. 집 안쪽으로 저절로 발길이 끌렸습니다. 연세 지긋하신 아주머니께서 마당 한쪽 텃밭에 배추와 무를 돌보고 계셨는데요. 돌담이 예뻐 왔다고 하니 안 그래도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한 번씩 들어온다며 맞아주었습니다. 집 전체 둘레가 돌담이었습니다. 곡선으로 이어지는 돌담은 위치에 따라 계단식으로 쌓여지기도 하고 물살처럼 흐르듯 쌓이기도 했습니다. 작은 돌 큰 돌이 어우렁더우렁 편안하게 이끼를 품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자식들 걱정 끼치면 안 된다고, 오면 또 편해야 된다며 마당에 풀을 뽑고 채소를 기르고 꽃을 보는 게 일상이라며 웃었습니다. 하루하루 어루만지는 아주머니네 돌담이 세상에서 가장 큰 돌탑이라고 마음속으로 명명해보았지요.
호박 두 덩이
잘 익은 호박 두 덩이를 받았습니다. 무릎 관절 수술로 고생한 박순덕 시인께 잠깐 들렀더니 추운 날 죽이라도 끓여먹으라며 덥석 안겨주었는데요. “병원에서 내내 발이 떠 있다가 이렇게 발 디디니 세상 다 감사하네. 사는 게 호박 같아.” 호박 두 덩이, 저 풍덩한 둥긂이 어찌 그냥 이루어졌겠는지요. 깊게 패인 삶의 골이 모양을 튼실하게 잡아주었을 겁니다. 넝쿨은 넝쿨대로 또 온 힘을 그러모았겠지요. 비와 바람과 햇빛을 품고 잘 늙은 호박의 생애가 성황사와 영암각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달바위와 돌탑 같았습니다. 세상사 “때로 비 내리고 때로는 햇볕 나니” 부디 잘 익어가라는 천봉산 말씀이 들려옵니다.(♣)
- 글쓴이 : 황구하
-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