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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소애_쑤세미의 골방에서 만화읽기]키마쿠라의 작은아씨들, 바닷마을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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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세미의 골방에서 만화 읽기
키마쿠라의 작은아씨들, 바닷마을 다이어리
글. 쑤세미
나는 나의 생을,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 쓰고 버린다.
우주는 그걸 다시 리필해서 보내는데
그래서 해마다 봄은 새봄이고
늘 새것 같은 사랑을 하고
죽음마저 아직 첫물이니
나는 나의 생을 부지런히 풀어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_이상국, 「리필」
바나나 피시 그리고 바닷마을 다이어리
나는 그때 여행 중이었다. 중국 중경(重慶)으로 가는 비행기 안이었는데 일본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Our Little Sister, 2015)’를 보게 되었다. 이륙과 동시에 봤으면 좋았을 걸, 영화가 중반부를 넘어설 무렵 비행기는 착륙하게 되었고 여행 내내 영화의 뒷내용이 궁금했다.
며칠 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머지 내용을 마저 볼 수 있었는데 사실 영화 내용은 ‘별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 ‘별것’ 아닌 것을 ‘별것’으로 만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これえだひろかず, 是枝裕和)감독의 디테일에 감탄하다 알게 된 사실은 이 영화의 원작이 따로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철학적 메시지의 걸작만화 《바나나 피시BANANA FISH》의 작가 요시다 아키미(よしだあきみ, 吉田秋生)의 작품이란다. 묵직한 주제를 하드보일드하게 펼쳐내던 작가가 이렇게 잔잔하고 일상적인 작품도 잘 만들 수 있다니.
유년의 명작동화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세계명작동화’나 ‘세계민화전집’ 등 시리즈로 한 세트인 책들이 책장에 꽂혀있었다. 실직한 동료 혹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아빠가 할부로 사들인 책이었다. 아빠가 엄마의 잔소리를 듣건 구입경위가 어떻게 됐건 간에 우리는 양장본 표지가 해질 때까지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나는 그중《작은아씨들》을 무척 좋아했다.
우리 자매처럼 네 명의 자매가 나오고 옆집의 부자 할아버지와 그의 손자가 함께 등장하는 이야기에 푹 빠졌었다. 특히 나중에 작가가 되는 둘째 조의 모습이 멋져보여서 작가의 꿈을 꾸게 되었다.
의젓한 맏이 메그와 말괄량이 조, 사랑스러운 베스와 귀여운 에이미가 나오는 《작은아씨들》. 그 시절 책을 읽으며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은 《빨간머리 앤》의 매튜(내가 읽던 시절엔 ‘머슈’라고 했다) 아저씨와 《작은아씨들》의 베스의 죽음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들지도 않았던 나는 가족 중 누군가 우리 곁을 훌쩍 떠나면 그 슬픔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가 염려스러워, 한밤중에 깨어나 홀로 울곤 했다. 그러나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슬픔을 잊곤 했다.
매미 울음소리가 그칠 무렵, 우리 집에 막내 여동생이 왔다.
백사장이 아름다운 바닷마을 카마쿠라에 사는 세 자매가 아버지의 부고를 들으면서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들은 집 나간 아버지가 외도로 낳은 이복동생 아사노 스즈를 장례식장에서 만난다. 스즈의 어머니는 이미 한참 전에 고인이 되었다. 스즈를 데리고 재혼해 새 삶을 시작하다 위암으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막장 같은 삶에, 자매들은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소중히 간직한 자매들의 어린 시절 사진과 실은 카마쿠라를 그리워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몹쓸 사람이지만 다정했던’ 아버지의 삶을 미워 할 수만은 없게 된다. 어린나이에 지나치게 철이 든 스즈의 모습이 안타까운 언니들은 카마쿠라에서 함께 살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여름소나기처럼 요란스럽던 매미 울음소리가 그칠 무렵’ 스즈는 카마쿠라 네 자매의 막내가 된다.
성실하고 의젓한 첫째 사치는 시립병원의 간호사다.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와 뒤이어 아이들을 버리고 재혼한 어머니를 미워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자신도 병원의 유부남 의사와 불륜관계에 있다. 술버릇 나쁘고 남자운도 나쁜 둘째 요시노는 마을의 신용금고에 근무하지만 외국계 금융기관에 다닌다고 뻥치며 어린남자에게 돈이나 뜯긴다. 스포츠 용품점 점원인 폭탄머리의 괴짜 셋째 치카는 에베레스트 등반에 실패해 발가락 세 개를 잃은 점장과 사귀는 중으로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다.
이렇게 개성 강한 세 자매와 솔직하고 용감한 축구소녀 스즈까지, 《바닷마을 다이어리》에는 완전체 네 자매의 소소한 일상과 마을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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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에 뜬 달, 매실이 익는 마을의 자매
다투다가도 오래 묵힌 매실주 하나로 화해하고, 한낮에 뜬 달을 보고 횡재한 기분이라고 즐거워하고, 카마쿠라의 낡은 주택에서 자연과 함께 살며 해변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렇게 자매들은 생활한다.
이야기는 어느덧 중학교 마지막 여름방학을 보내고 입시를 준비하게 되는 스즈의 성장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차분하고 감정의 기복이 크게 없던 스즈가 언니들에게 말을 놓고 화도 내고 진학을 걱정하는 영락없는 십대소녀로 성장하는 모습에 우리는 안도한다. 그리고, 온화하지만 책임감강한 첫째 사치와 다정하고 배려심 깊은 둘째 요시노, 밝고 긍정적인 셋째 치카.
사실은 이들이 막내 스즈로 인해 가장 많이 성장하고 그렇게 ‘멋진’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을 우리는 지켜볼 수 있다. 유부남 연인과의 인연을 정리한 사치는 병원의 완화케어병동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곳에서 삶과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접하며 인생의 가치를 깨닫고 성숙해진다. 연하에 철없는 남자만 사귀었던 요시노는 사카시타 과장과 함께 영업외근을 다니며 마을사람들과 교류하고 소박하고 우직한 사랑에 눈 떠간다. 셋째 치카도 남자친구의 히말라야행을 응원하며 또 다른 꿈을 키워나간다.
“이것저것 해보고 도저히 안 되겠거든 집으로 돌아오렴”
여자 축구부가 있는 기숙학교로 진학하게 된 스즈는 소감을 묻는 중학교 친구들에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데엔 익숙해져서 괜찮다.’고 한다. 입시설명회에 함께 간 큰언니 사치는 스즈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것저것 해보고 생각해보고 그래도 도저히 안 되겠다 싶거든 집으로 돌아와.”
스즈는 아마 졸업 때까지 그라운드를 누빌 것이다.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집과 가족이 있으니까. 바다 냄새 가득한 네 자매의 다이어리에 가득 찰 일상이 덤덤히 그려진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2006년부터 일본 만화잡지 월간 플라워즈(flowers, 쇼가쿠칸)에 비정기적으로 연재돼 현재 8권까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영화가 개봉된 후(2015년)에는 촬영지 투어를 가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그 시절과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까 가족 중 누군가가 우리 곁을 떠나면 여전히 슬프고 힘든 것은 사실이고 그것을 이겨낼 힘이 없다. 그럼에도 ‘이것저것 해보다 안 되면’돌아갈 곳은 가족의 품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도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으니 그저 부지런히 삶을 풀어낼 뿐이다. 우리 삶은 거듭 리필 되고 오늘 아침도 새롭게, 내일 아침에 또 새롭게, 그저 열심히 각자의 삶을 풀어내면 된다. 늘 새것 같은 사랑을 하고 해마다 새봄은 오니까 말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1-8/ 요시다 아키미 지음/ 조은하 옮김/ 애니북스)
- 글쓴이 : 백소애
- 강원도 태백 출생. 아이큐는 낮지만 머리가 좋다고 굳게 믿고 있음. 변덕이 심하고 우유부단하나 따뜻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조카들에게 헌신적이며 인간성 또한 좋다.....고 믿고 있다. 학생 때 교무실에서 밀대자루로 바닥 밀면서 은밀히 훔쳐본 생활기록부에는 ‘예의 바르나 산만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한참을 갸우뚱 하다가 담임이 수학선생님이었기에 그냥 이해하기로 함. 다소 후진 취향을 지니고 있으나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쓸데없는 걱정과 호기심이 많음. 같은 계획을 몇 년째 하고 있으며 역시나 올해도 다이어트와 앞머리 기르기에 도전할 생각이며 과메기에 없어서는 안 될 다시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 웹툰도 괜찮지만 만화책은 역시 종이책으로 보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날로그 건어물녀. 좋아하는 것은 무한도전, 오뎅으로 만든 떡볶이, 삼겹살에 매실소주, 비오는 날, 생활의 달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괴짜가족 류의 저질유머. 비 오는 날 무한도전 틀어놓고 배 깔고 누워 만화책 보면서 빈둥거리며 사는 것이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