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이어 예천의 종가 두 번째 이야기를 이어 갈까 한다. 우리지역을 포함한 경상북도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종가와 종가문화를 보유한 곳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종가 고택만도 120여 개소가 있으며, 비지정 건물들을 포함하면 240여 개소에 달할 정도로 널리 산재해 있다. 

종가는 오랜 세월동안 양반문화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향리의 중추적 버팀목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왔지만, 최근 급격한 산업화와  종손, 종부의 고령화 등으로 종가문화가 급격하게 훼손되고 소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떻게 보면 종가문화는 혼란한 현대 사회의 마지막 보루로써 정신적 가치관의 혼란을 극복하는데 큰 역할을 함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정신과 혼을 되찾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므로 현시대에 부활의 기로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들의 관심과 존경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결국 종가문화는 한국인만이 가지는 독특한 정신세계와 뿌리를 간직하고 있는 만큼 가장 한국적인 세계문화브랜드로 빛을 발할 것으로 확신한다. 이번 호에는 은은한 빛을 발하며 묵묵히 종가의 맥을 이어 가고 있는 예천의 두 종가를 소개 한다.

예천 의성김씨 남악종택

남악 종가

이번에 살펴볼 종택은 의성김씨 남악 종가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1541~1591)의 종택으로, 김복일의 종질이자 병자호란 때 척화신으로 이름난 불구당(不求堂) 김주(金迬:1606~1681)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1981년 지붕을 고칠 때 ‘인조 12년(1634)에 용문사의 승(僧) 운보(雲補)가 조성했다’는 내용의 명문(銘文) 기와가 발견되어 이 가옥이 세워진 연대가 확인되었다. 종택은 중요민속자료 제248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주는 병자호란 때 홀로 척화소(斥和疏)를 올렸고, 이후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최후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이 일로 인해 청음 김상헌과 함께 행장을 차려 두고 청나라로 끌려 갈 명을 기다리다 조정공론으로 풀려났다. 이후에도 그는 스스로 오랑캐를 평정하는 글을 짓고는 벼슬에서 물러났다. 유림에서는 그의 절의와 기개를 청음과 같다하여 숭정처사(崇楨處士)라 호칭하며 존경했다. 

예천군청 이재완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남악 종택은 사대부 양반가옥의 주택구성과 건축적 특성을 잘 갖추고 있는 매우 기능적이고 고졸(古拙)한 멋을 풍기는 가옥으로 민속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한다. 특히 사랑채인 가학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기와를 얹은 오량가인데, 앞면의 경사지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계자 난간을 두어 누각 형식의 품격 높은 외형을 가지고 있다. 누하주는 휘어진 곡재를 그대로 사용하고 사랑방의 반자는 우물반자로 꾸몄는데 처마 곡선을 우아하게 처리하여 나란히 서 있는 문간채의 초가와 더불어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남악종택  김종헌 종손 김위매 종부

현재 남악종택에는 15대 김종헌(71) 종손과 김위매(70) 종부가 살고 있는데, 스스로 종손과 종부의 삶 자체를 영광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이들로 부터 조상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남악 김복일 선생에 대해 설명할 때는 비장함이 비쳐질 정도로 엄숙하였다. 김복일은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태어나 예천 용문면 죽림의 초간 권문해의 누이와 결혼하여 처가 동네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예천 용문면에는 마을 앞 개천이 아홉 여울로 돼 있다 하여 구계(구렐)라 하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집들은 모두 반듯해 옛날부터 '구렐가서 집 자랑하지 말고 금당실 가서 옷 자랑 하지마라'는 속담이 서려있다고 한다. 

이곳 구계리에 정착한 남악선생은 의성 김씨의 오룡(五龍)이라 불리어지는 인물로, 그의 형제들이 나란히 대과와 소과에 급제하여 당대에 크게 이름을 떨쳤다. 

오룡이란 청계(淸溪) 김진(金璡:1500~1580)의아들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1522~1585), 구봉(龜峯) 김수일(金守一:1528~1583), 운암(雲巖) 김명일(金明一:1534~1570),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1538~1593)과 남악 김복일을 일컫는 말로서, 극일, 성일, 복일 형제는 대과에 급제하였고, 수일, 명일 형제는 소과에 합격해 붙여진 이름이다. 

사시찬요(四時纂要)

최근 남악종택 소유 고서적을 예천박물관에 기탁하는 과정에서 서적을 정리하다 빛을 보게 된 농서 『사시찬요(四時纂要)』가 큰 화제가 되어 소개 한다.

'사시찬요'는 서기 996년 당나라 한악(韓鄂)이 편찬한 것으로 1월부터 12월까지 시기별 농법이 기술되어 있으며 중국 최초의 농서인 북위(北魏)의 가사협(賈思勰)이 저술한 '제민요술(532~549)'과 송나라 진부의 '농서(1149)'사이에 편찬돼 농업사에서도 중요한 위상을 지니는 책이라 한다.

1403년 계미년에 만들어 1420년까지 사용된 조선시대 최초의 금속활자, '계미자'로 찍어낸 이서적은 한·중·일 삼국에서 자취를 감췄다가 1961년 목판본이 일본에서 발견됐고 2015년 필사본이 추가로 발견된 적이 있지만 금속활자본이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계미자본 고서 자체가 희귀한데다 서양 최초 금속활자인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최소 30년 앞서기 때문에 국보급 문화재로 추정된다 하니 큰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남권희 경북대 문헌정보학과 교수에 의하면 이 책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시찬요'로 송나라 태조 조광윤(趙匡胤)의 ‘광’자가 피휘(避諱)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송나라 시대의 책을 저본으로 삼은 것으로 추정되며 책의 형태는 11행 19자, 세로 19.7cm, 가로 12.3cm이며 계미자로 찍어낸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新刊類編歷擧三場文選對策)'과 동일한 판식으로 계미자본 중 유일한 과학기술관련 서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다. 그리고 “국가에서 간행된 계미자본 고서는 국보 제149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東萊先生校正北史詳節)’ 등 15권 정도가 알려져 있으며, 이들 대부분의 고서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만큼 이번에 발견된‘사시찬요’ 도 국가지정문화재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석문 종가

마지막으로 예천군 지보면 익장리에 위치한 석문종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석문종택은 조선 광해군 1년(1609)에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1577~1650)이 세우고 거주했던 가옥이며 경북 문화재자료 제492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래정씨 문중에도 종택과 고택이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문화재 지정이 미미하여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예천 석문종택

정영방은 풍양면 청곡리 별실(別室) 출신이다. 자는 경보(慶輔)이고 호는 석문(石門)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정식(鄭湜)의 둘째 아들로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의 제자이다. 1605년(선조 38)에 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혼란한 정치와 병자호란(1636년) 등으로 벼슬을 단념하였고, 학문 연구에만 일생을 보냈다. 시(詩)에 뛰어나고, 문장에 능했으며, 덕행과 효우가 매우 돈독했다고 전해진다.

정영방은 늘 이르기를 “세상 사람이 공로나 명예를 중히 여기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안타깝다. 이는 이기심의 유혹 때문이니, 큰 잘못이다”고 하였다. 특히 선생은 고향에 대한 애착심이 강하였다. 국가의 과한 노역과 세금으로 농민들의 형편이 어려워지자 용궁현(龍宮縣)의 세금을 줄여달라고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또한 선생은 ‘팔악보(八樂譜)’라는 시와 문집 3권, 그리고 『암서만록(岩棲漫錄)』을 남겼다. 나중에는 지보면 도장리 ‘익장(益庄)마을’에서 지포서실(芝圃書室)을 세우고, 독서를 즐기며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지보면 마산리의 완담사(浣潭祠)에 제향되었다. 

종택이 위치한 익장마을은 지보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5㎞ 정도 떨어져 있다. 이 지역은 본래 용궁군 내하면(內下面) 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 때 ‘도장리’라 하여 예천군에 편입되었다. 도장리는 ‘익장’, ‘구촌’, ‘학촌’, ‘이호’, ‘도경’, ‘해평’ 등의 자연촌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익장(益庄)은 ‘일쟁이’라고도 불린다. 

30여 가구의 동래정씨 세거지인 이 마을은 고려 공민왕 때 정치의 혼란을 개탄한 정승원(鄭承源)이 낙향하여 용궁현(龍宮縣) 구담(九潭)에 터를 잡았다가 그 후손들이 조선 초에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을이름은 이 마을 가운데 등성이인 대창마을에 자리한 속칭 ‘정묘(鄭墓)’의 지형에서 유래한다. 묘터의 지형이 미녀가 비스듬히 누워있는 옥녀측와형(玉女側臥形)이므로 화장을 더한다는 뜻으로 ‘익장(益粧)’이라고 하다가, 너무 직설적이라고 해서 ‘익장(益庄)’으로 바꾸었다는 전설이 있는 마을이다. 그리고 ‘지보(知保)’ 혹은 ‘지포(芝圃)’라고도 썼고, 이 마을 이름으로 인해서 ‘지보면(知保面)’의 이름이 되었다고도 한다. 

석문종택 오른편 태을산에 조선 8대 명당이라 불리는 ‘정묘’가 자리하고 있는데 풍수적으로 길지 중의 길지로 알려져 있다. 형세를 살펴보면 아름다운 여인이 단정히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는 형국을 하고 있는데, 마주한 비봉산 아래로 낙동강이 굽이쳐 들어와 흐르고 절묘한 음양의 조화를 이룬 명당이라는 것을, 풍수를 모르는 일반인도 금세 알아차릴 정도로 풍광이 빼어나다. 이곳 정묘의 주인은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정사(鄭賜)인데 이후 동래 정씨에서 배출한 정승판서만 17명이라 하니 어떤 땅을 선택하여 살았는가에 따라 후손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풍수적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된다. 

현재 종택에는 14대 종부 이필원(78)씨가 홀로 종가를 지키고 있다. 아들인 종손 정호윤(52)씨는 일찍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종손의 역할을 뒤로 미루고 있는 실정이다. 기별을 넣지 않고 종택을 방문한 지라 종부는 뵙지 못했지만 후일 전화로 안부를 묻는 과정에서 헛걸음한 빈객(賓客)에 대한 아쉬움과 염려의 말씀은 내내 필자의 가슴속에 따뜻함으로 남아 있다.

맺는 말

조선시대의 종부는 맏며느리로서 제사를 받들고 집안의 가사를 관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손인 남편이 자식 없이 사망했을 경우, 대신하여 제사를 지내거나 입후(立後)를 세우는데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종가문화가 500여 년의 명맥을 이어온 바탕에는 아마도 이러한 종부의 역할이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짐작해 본다. 

17세기 이후에는 남성중심의 종법제가 강화되자 관습적으로 부여되었던 제사권과 입후권이 약화되어 봉제사와 접빈객을 주 내용으로 하는 종가의 안살림을 총괄하는 것으로 종부의 지위가 오늘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섬김과 나눔으로 조용한 리더십을 펼친 종부의 위상은 결코 무뎌지지 않았다. 

이번에 두 종가를 살펴보면서 지금도 종가를 지탱하는 힘의 근원은 주어진 책임을 완수하려는 종부의 굳은 의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종가는 문중을 넘어서 지역공동체와 나라의 안위를 위해 솔선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주체이며 그 한 가운데에 종손과 종부가 자리했음을 잊지말아야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종가의 역할과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