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해은(海隱) 강필효(姜必孝, 1764~1848)가 경영한 대명산구곡(大明山九曲)은 봉화군 명호면 보라리에서 시작해 갈천에서 운곡천과 합류하고 다시 낙동강 테마공원 앞에서 황지연못 물과 합류해 청량산을 지나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까지 약 20km에 이르는 규모가 매우 큰 구곡원림이다. 해서 지난 호에 제5곡 청량산까지 소개했으니 이번 호에는 제6곡 광평부터 제9곡 면만우까지 이어 소개할까 한다.

광평으로 출발하기 전 대명산구곡을 경영한 강필효는 어떤 사람이며, 또한 대명산구곡을 경영하게 된 배경을 한 번 더 알아보고 출발하도록 하자.

강필효(姜必孝)는 1764년(영조 40)~1848년(헌종 14) 본관은 진주(晉州), 초명은 세환(世煥), 자는 중순(仲順), 호는 해은(海隱)·법은(法隱)이다. 봉화 법전(法田) 출신으로 아버지는 식(植)이며, 어머니는 진성 이씨(眞城李氏)로 중연(重延)의 딸이다. 소론(少論)의 영수인 윤증(尹拯)의 제자 강찬(姜酇)의 후손으로 윤광소(尹光紹)를 스승으로 섬겼다. 1803년(순조 3)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순릉참봉(順陵參奉), 1814년(순조 14)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842년(헌종 8)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에 임명되었다가 곧 충청도도사로 옮겼으며, 이듬해 통정대부에 승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고성현고경록(古聖賢考經錄)⌋·⌈근사속록(近思續錄)⌋·⌈소계회화록(素溪會話錄)⌋·⌈석척록(夕惕錄)⌋·⌈사유록(四遊錄)⌋·⌈경서고이(經書考異)⌋ 등이 있으며, 문집인 ⌈해은유고(海隱遺稿)⌋가 있다.

해은(海隱)은 주자(朱子)와 윤증(尹拯)의 학문을 계승하려는 의지를 가졌던 선비였다. 그는 주자를 존숭하고 명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봉화군 법계에 은거하며 대명산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했다. 주자를 존숭하는 마음에서 구곡원림을 설정했고 명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구곡의 이름을 ‘대명산’이라 하였다.

구곡의 이름에서 드러나듯 대명의리(大名義理)를 앞세우고 있으나 강필효는 서시(序詩)에서만 대명의리를 언급했을 뿐, 나머지 아홉 굽이의 시에서는 그런 색깔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각 굽이마다 자신의 가족이나 학문과 관련된 인물들을 떠올리며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하류부터 시작해 거슬러 오르는 것이 아니라 상류부터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아홉 굽이를 설정했다.

●●● 제6곡 廣平(광평)

六曲廣坪繞碧灣 (육곡광평요벽만)  육곡이라 광평은 푸른 굽이 둘러 있고

邨煙漠漠鎖江關 (촌연막막쇄강관)  마을 연기 아득히 강의 관문 덮었어라

退翁當日題詩意 (퇴옹당일제시의)  퇴옹께서 그날 시에 적으셨던 그런 뜻

看取雲牕棲臥閒 (간취운창서와한)  구름 창에 한가롭게 깃들 마음 보노라 

유유히 흐르던 낙동강 물은 청량산에서 내려온 계곡물과 청량교 아래에서 합수한다. 지금까지 온순하게 흐르던 강물이 청량산 물줄기가 합세하며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거칠고 역동적이게 흐른다. 신기하게도 구곡의 중간인 청량산을 기점으로 물살의 세기도 변하고 있다. 이렇게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청량산과 마주하고 있는 마을이 대명산구곡의 제6곡 광평(廣坪)이다. 청량교가 생기기 이전엔 이곳에 나루터가 있어 배로 드나들어 ‘배나들’이이라 부르기도 하고 넓은 바위가 있다해 ‘너뱅이’또는 ‘너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광평마을은 넓은 돌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박석(博石)이라고도 불렸다. 박석, 혹은 광석(廣石)은 이 마을에 있는 북방식 고인돌의 덮개돌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이 돌은 본디 다리 앞 관리사무소 근처에 있었으나 35번 국도를 확포장하는 과정에 옮겨져 지금은 청량산박물관 뒤뜰에 자리하고 있다. 이 광석은 오랜 시간 마을 사람들과 역사를 함께하며 재미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광석의 기울기를 보고 그해 풍흉을 점치는 풍습은 해방 전까지 이어졌으며 내용은 이렇다. 장마가 들어 마을에 물이 차면 이 광석이 사방위 중 어느 한 쪽으로 기울곤 했는데 광석이 기우는 방향의 주민들은 날을 정해 광석이 제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기운 쪽에 돌을 괴는 행사를 치렀다고 한다. 행사는 광석의 위치를 기준으로 사방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모여 광석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 동서남북 사방과 중앙에 다섯 그릇의 물을 담아 올려놓고 광석을 조금씩 괴어가며 기울기를 조정했다고 한다. 이때 어느 한쪽이라도 수평이 맞지 않아 물이 쏟아지면 그 방향에 속하는 마을은 흉년이 든다고 믿었으니 주민 모두가 혼신을 기울여 참여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풍습을 통해 마을주민들은 자연스럽게 응집력과 협동심을 키웠을 듯하다.

이 시편에서 해은 강필효는 대명산구곡을 유람하다 저녁 무렵 여기에 도착했던 모양이다. 낙동강 물은 광평에서 푸른 호를 그리며 크게 휘돌아 흐르고,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는 아득하게 피어올라 두 산 사이로 흘러가는 강줄기를 뿌옇게 뒤덮었다. 해은은 그 풍경을 보며 시를 지었다. 얼마나 평화로운 풍경이었을까. 퇴계는 서리 내리는 계절 어느 날 청량산을 찾았다가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밤에 일어나 달을 보고 노래를 읊었는데, 강필효는 그 시를 떠올리며 자신의 마음을 6곡에 담았다.

●●● 제7곡 孤山(고산)

七曲孤山下玉灘 (칠곡고산하옥탄)  칠곡이라 고산은 맑은 여울을 내려가니
石門怳復晨門看 (석문황복신문간)  석문에서 멍하니 다시 새벽 문을 보노라
古人先我尋薖軸 (고인선아심과축)  고인이 나에 앞서 은거할 곳 찾았는데
臨水終朝草閣寒 (임수종조초각한)  아침 내내 물에 임하니 초각이 차갑네

청량산 입구인 광석나루터에서 국도를 따라 안동 쪽으로 2km쯤 내려가다 만나는 갈림길에서 '농암종택'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해 들어가면 도산면 가송리 쏘두들마을이 나온다. 이곳에서부터 도산서원까지 이어지는 강변길 역시 퇴계가 말년에 지나던 '퇴계 예던 길'이다.

마을 앞을 흐르는 강에는 붉은 빛깔이 도는 층암절벽이 강 양쪽으로 수십 길 높이로 일어서 있다. 바로 고산협(孤山峽), 가송협(佳松峽)이라고 불리는 제7곡 고산(孤山)이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강 양쪽의 바위가 하나로 붙어 있었는데, 용이 그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전설이 있다. 협곡 사이의 깊은 소(沼)가 있어 ‘쏘두들’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두 절벽 사이로 가까이 가면 강 건너편 벼랑 아래에 앉은 정자 하나가 선경으로 다가온다. 퇴계의 제자인 성재(惺濟) 금난수(琴蘭秀, 1530~1604)가 경영하던 고산정(孤山亭)이다. 강필효는 풍경도 빼어나고 퇴계와 금난수의 사연도 있는 이곳을 대명산구곡의 한 굽이로 삼았다.

곡에 등장하는 석문(石門)은 고산협곡이고, 새벽문(晨門)은 은자가 사는 곳이다. 강필효는 고산협곡을 바라보며 오래전 이곳에 은거하던 금난수를 떠올렸다. 차가운 초막은 금난수의 정신을 말한다. 한편 주자는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 석문오라는 시에서 "아침이 열리면 구름 기운에 안기고/ 해 질 녘이면 담쟁이 넝쿨 무성하네/ 새벽문에 기대어 홀로 웃는 이/ 어찌 공자님의 마음을 알까"하고 노래했다.

**고산정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4호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은 도산구곡중 제8곡인 고산곡(孤山曲)이다. 퇴계 이황이 청량산을 오고 갈 때 이곳에 자주 들러 빼어난 경치를 즐기고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된 건물 내부에는 이황과 금난수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최근 고산정에서부터 도산서원까지 ‘퇴계 예던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낙동강을 중심에 두고 좌우 모두 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낙동강물이 곧게 흐르다가 우뚝 솟은 암봉을 만나는데 이것 바로 고산이다. [오가산지]에 “고산은 축융봉 서쪽 산기슭이다.(중략) 세상에 전하길 낙동강이 산을 안고 돌아 흐르는데 하루는 갑자기 크게 천둥이 치며 벼락이 떨어져 창애를 깨뜨리니 강물이 그 사이를 흘러 고산을 만들었다.”는 전설을 기록했다.

고산은 대명산구곡에서도 가장 빼어날 뿐만 아니라 낙동강을 포함해 이 땅의 웬만한 강변 풍경과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 절경이다.

퇴계가 지은[서고산벽 書孤山壁]이란 시가 현판에 걸려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일동 주인 금 씨를 한 번 만나 보려고  (日洞主人琴氏子)

강 건너에서 지금 계시는지 물어 보네 (隔水呼問今在否)

농부는 손을 저어 들리지 않는다 하니 (耕夫揮手語不聞)

구름 낀 산 바라보며 한참을 앉았네    (悵望雲山獨坐久)

이 시편에는 퇴계가 청량산을 가다가 고산을 지나면서 보고픈 제자 금난수를 만나려 한 정경이 잘 드러난다. 때는 봄이었던가. 강 건너에서 쟁기질하던 농부에게 큰 소리로 정자 주인이 있냐고 묻지만, 농부는 물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는다며 손사래를 친다. 할 수 없이 퇴계는 강가에 앉아 구름 낀 산을 한참 바라보았다.

●●● 제8곡 月明潭(월명담)

八曲月明潭勢開 (팔곡월명담세개)  팔곡이라 월명담 못의 형세 열렸으니

五雷峯下水巴回 (오뢰봉하수파회)  오뢰봉 아래로 물이 돌아 흘러가네

重吟落日寒花句 (중음낙일한화구)  낙일과 한화의 시구를 거듭 읊조리며

托意餘生此地來 (탁의여생차지래)  남은 삶을 의탁하러 이 땅에 왔어라 

고산정에서 1km 정도 내려가면 정면의 암봉을 만나면서 크게 오른쪽으로 휘돌아 흘러가는 굽이에 이른다. 바위봉우리들 아래 제법 깊고 널찍한 담이 이루어져 있으니 제8곡 월명담(月明潭)이다. 월명소, 월명당 등 여러 이름이 있을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다. 전하는 말로는 이 깊은 담에 용이 살고 있어 가뭄이 심할 때 고을 수령이 기우제를 지내면 영험이 있다고 한다. 깊은 소를 품은 절경이 그렇듯 이곳도 용과 관련된 전설이 전한다. 기우제에는 개나 돼지의 피를 사용하며 이는 하늘의 용신이 비를 내려 용의 거처를 깨끗하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월명담은 강필효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굽이다. 그의 제8곡 시의 주석에서 "월명담은 오뢰봉 아래에 있다. 못이 깊고 모래가 흰데, 못 가에 가서 보면 깊고 간략하여 창주(創州)의 의취가 있다. 나의 친영이 그 북쪽 산기슭에 있기 때문에 분암(墳菴)을 지어 그곳에 가서 여생을 보내려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창주는 푸른 물가라는 뜻으로 사람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산수 좋은 땅. 신선이나 은자(隱者)가 사는 곳을 이르는 말이다. 분암은 분묘 밑에 있는 재실을 말한다. 그는 경관으로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부친의 산소가 가까운 이 굽이에 집을 짓고 살며 낙일(落日)과 한화(寒花)를 읊조리며 말년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 제9곡 緜萬隅(면만우)

九曲緜蠻勢翼然 (구곡면만세익연)  구곡이라 면만우는 지세가 날 듯하니
仰看岑蔚俯奔川 (앙간잠울부분천)  산기슭 우러러 보고 시내를 굽어보네
興闌停櫂山光裏 (흥란정도산광리)  흥이 다해 노를 멈추니 산빛 속이라
頂上岧嶢浩浩天 (정상초요호호천)  정상은 높아 넓은 하늘 찌를 듯하네

제8곡인 월명담을 뒤로한다. 한가로운 강변 풍광이 계속 이어진다. 이 길은 강가의 깎아지른 암벽이며 푸른 물살, 그리고 미루나무가 서있는 강변 풍경 등이 자연 그대로다. 월명담에서 강변길을 1.5km정도 내려가면 우측에 의젓한 고택이 반긴다. 농암종택(聾巖宗宅)이다. 상류에서 흘러온 낙동강 물줄기는 깎아지른 벼랑을 따라 흐르다 농암종택 앞을 흘러 학소대에 부딪치면서 크게 한 번 휘돌아 굽이도는데, 이 굽이가 바로 대명산구곡의 극처인 제9곡 면만우(緜蠻隅)다.

『어부가』를 남긴 농암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종손이 살고 있는 농암종택 자리는 강물이 휘돌아가는 풍광이 일품이다. 그러나 이곳이 옛터는 아니다. 1975년 안동댐 수몰지역인 분천리에서 떠난 후 고향을 잃고 마땅한 터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후손들이 30년이 지나서야 옮겨 지은 것이다. 따라서 강필효의 시는 농암종택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당시에 여기에 있었더라면 강필효는 면만우를 노래하며 농암의『어부가』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면만우의 경관은 농암종택 긍구당(肯構堂)에서 바라보면 더할 나위 없이 멋지다. 상류의 월명담을 지나온 낙동강 물길은 농암종택 앞에서 바위 벼랑을 만나 벽력암(霹靂巖)과 한속담(寒粟潭)에 잠시 머물다 학소대 벼랑에 부딪쳐 다시 방향을 급하게 바꿔 이후는 퇴계가 사랑했던 미천장담(彌川長潭)으로 부드럽게 흘러간다. 강필효는 주석에 "월명담 아래에 면만우가 있는데, 산이 깊고 물이 돌아 흘러 그윽하고 빼어나서 은거할 만하다. 이곳을 지나면 도산의 형승이 있다."고 했다.

좌우로 깎아지른 바위산들이 솟아 있고, 강물은 그 사이를 면면히 흐른다. 강필효는 이 굽이에 이르러 바위산을 한 번 우러른 뒤 강물을 굽어보았다. 그리고 이곳이 대명산구곡의 극처임을 알았다, 흥겨운 유람을 멈추는 이곳은 강물이 흐르는 깊은 산속이었다. 올려다보니 산 정상은 높아 하늘을 찌를 듯했다. 물리적인 산의 높이가 아니라, 학문으로 궤적을 남긴 이, 여기서 정상이란 조선 성리학을 집대성한 퇴계 이황의 유덕을 일컫는 것이다. 이 낙동강 물줄기를 계속 따라 내려가면 퇴계의 학풍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도산서원에 이른다. 일찍 부친을 여읜 퇴계는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갈 때도 이 길로 다녔으며 지금은 ‘퇴계 예던길’로 이름 붙여져 그 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농암종택에서 바라보는 면만우 경관도 우수하지만 신발을 벗어 들고 강물을 건너가 맹개마을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면만우 경관도 참 좋다. 낙동강과 농암종택 그리고 학소대까지 한눈에 펼쳐지는 풍경은 정말 한 폭의 그림이다. 퇴계도 벼슬에서 물러나 만년에 제자들과 청량산을 갈 때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하며 이 길을 걸었다. 230년 뒤 퇴계를 존숭했던 해은 또한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곳을 배경으로 보라리에서 가송리까지의 긴 구곡원림을 경영했던 것이다.

이렇듯 조선의 선비들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자연 안에서 학문을 익히고 학문적 공간을 경영하며 학자적 삶을 살았던 것이다. 세월은 흘러도 여전히 청량산과 낙동강은 그림처럼 아름답고 봉화에서 나고 자란 나 또한 이곳을 아끼고 사랑한다. 지난 호에 이어 오늘도 대명산구곡의 남은 구간을 함께 걸으며 소개 했으니 유유자적한 선비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