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황구하_시로 거니는 상주]아버지의 밥상
- 황구하(cultureline@naver.com)
황구하
“엄마, 엄마표 감자볶음 먹고 싶다. 그 왜 샤샤샥 썰어서 볶는 거 있잖아요.”
집으로 들어서는 아들내미 맨 먼저 하는 말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객지로 나갔다가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모든 짐을 싸들고 돌아온 게 어언 10년 만입니다. 그런데 그 무엇도 아닌 감자채볶음이 먹고 싶다니요. 이것저것 먹이려고 장만한 음식이 의문의 1패를 당하는 순간입니다.
“겨우 그게 먹고 싶어? 아이구 참.”
서둘러 부엌 베란다로 나가 감자를 보관했던 상자를 열었습니다. 지난여름부터 식탁을 채워주다 얼마 남지 않은 감자는 아, 쭈그렁 얼굴입니다. 그새 손가락 마디만큼 싹이 나 있었습니다. 그래도 몇 개 성한 걸 골라 채를 썰고 당근을 조금 넣어 볶았더니 그럭저럭 한 접시의 반찬이 되었습니다.
싹이 난 감자를 보니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꽃이 피어 감자감자 셧!” 하던 가위바위보 놀이가 생각납니다. 씨감자 잘게 쪼개 소쿠리에 담아 텃밭에 심던 엄마도 떠오릅니다. 호미로 이랑을 고르고 씨감자를 묻고 두둑두둑 매만지던 풍경입니다.
고구마보다 감자를 좋아했던 큰오빠는 씨감자를 윗방 고구마 타래에서 몰래 꺼내 쇠죽 끓일 때 구워먹기 일쑤였습니다. 엄마는 그걸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다 안 되겠는지 어느 날은 “씨감자를 다 먹으면 내년에 어떻게 감자를 먹을 수 있겠냐.” 며 꾸중을 했지요. 한겨울을 잘 견디고 버틴 쭈그렁 감자는 이른 봄 거듭나곤 했습니다.
감자가 싹이 나고 꽃이 피기 전 오빠들을 따라 들밭으로 쏘다니며 참꽃이며 찔레꽃을 따 먹으며 놀았습니다. 그러다 보면 오월, 감자 잎은 초록으로 넓어지고 감자꽃은 살랑살랑 바람에 흔들립니다. 감자꽃이 피면 작은오빠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감자밭에 들어가 감자가 얼마나 컸는지 후벼 파곤 했습니다. 감자서리를 하기 위해서였는데요. 특별하게 배가 고파서라기보다는 장난삼아 슬쩍 서리로 먹는 재미가 또 하나의 놀이였지요.
그런데 그즈음 엄마는 예쁜 감자꽃을 톡톡 따냅니다. 논에서는 자운영이 아버지 쟁기질에 무참히 갈아엎어지고 밭에서는 감자꽃이 엄마의 손에 목을 내놓아야 합니다. 꽃에게 영양이 가는 걸 막아 굵은 감자알을 얻기 위함인데요. 생각해보니 엄마의 하얀 머릿수건과 감자꽃이 닮았습니다.
감자는 한여름 없어서는 안 될 양식 중 으뜸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많지 않았던 시절, 우리들 고봉밥 위에는 감자 한두 개가 꼭 올려져있었는데요. 어른들은 들일 나가실 땐 찐 감자를 소쿠리에 싸가셨지요. 샛밥으로 감자만한 것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즐겨 부르던 노래입니다. 하얀 감자꽃이 피면 파 보지 않아도 하얀 감자, 자주 꽃이 피면 자주 감자라는 순리를 알게 해주었지요. 일설에 의하면 이 동시는 일제강점기 때 창씨개명을 강권하는 일본에게 그 제도를 빗대어 은유적으로 썼다고 합니다. 왕양명은 “구름에 가려진 채 빛나는 태양과 먼지에 뒤덮여서 숨겨져 있는 깨끗하고 맑은 거울”이라는 말로 도덕심을 이야기했는데요. 자연의 본성과 인간의 근본을 되새기게 해주는 이 짧은 동시가 티 없이 맑습니다.
나는 자주 감자보다 하얀 감자가 좋았습니다. 하얀 감자는 모양이 둥글고 삶아 놓으면 분이 뽀얀게 마치 떡가루처럼 포실했습니다. 그런데 자주 감자는 둥글기보다 울퉁불퉁 길쭉하여 보기도 흉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내 피부색이 조금 검은 탓에 “너는 저기 석막리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고 오빠들로부터 종종 놀림을 받았는데요. 자주 감자를 먹으면 내 살결이 더 검어질 것 같은 걱정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자주 감자의 “자줏빛 꽃망울은 아리게 맵게” 느껴졌지요.
감자는 “불볕 뙤약볕을/한 몸에 받으며/땅속 제 알의 살을 키우고/더욱 여실히 야물”어 마침내 하지가 가까워지면 캐게 됩니다. 그래서 하지감자라고 하지요. 이때는 장마가 밀려오는데요. 장마가 들기 전에 감자 캐기를 마쳐야 합니다. 그늘에 며칠 말려야 하는데 비가 오면 썩고 말리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자를 캘 때는 경이로움 자체입니다. 동글동글한 감자가 땅속에서 올라올 때마다 신이 났지요. 호미질을 잘못해 감자를 찍거나 하면 상처가 나서 따로 담아두었습니다. 성한 감자들과 함께 두면 전염병처럼 같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상처 난 것 먼저 쪄서 먹거나 강판에 갈아 전을 해먹곤 했지요. 이삭줍기는 제 몫이었는데요. 아주 작은 새끼감자들을 주워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새끼감자는 따로 조림을 해서 먹습니다. 통째로 껍질째 살짝 익힌 다음 쪼글쪼글 졸여야 쫀득하니 맛나게 되지요. 불을 낮추고 느긋하게 지켜봐야 하는 기다림의 음식이기도 합니다.
감자를 캘 때면 아버지는 허기진 배를 움켜쥐면서도 코끝이 움찔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위로 형이 한 분 계셨습니다. 젊은 나이로 6·25 때 전사하셨다는데요. 아버지는 형 대신 장남이 되어 종갓집을 지탱하느라 평생을 힘들어 하셨습니다. 더군다나 농사일은 서툴고 책이나 보다가 술 한잔 마시는 게 큰 낙이던 연약한 분이셨습니다. 그런 당신이 유독 감자농사에 대한 애착이 있었는데요. 그건 바로 죽은 형과 감자를 구워먹고 나누어 먹던 기억 한 마장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이십 대 시절, 대전 목원대학교 앞에서 자취를 한 적이 있습니다. 불 꺼진 집에 들어가는 날이 참 쓸쓸한 나날이었는데요. 한 달에 한번 불이 켜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엄마가 다녀가신 날입니다. 어질러진 자취방은 말끔해지고 윗목에는 모시조각보가 덮여있는 밥상이 있는데요. 이런저런 밑반찬과 함께 어김없이 엄마표 감자채볶음이 온기를 머금은 채 기다리고 있었지요. 부엌 곤로 냄비에는 사골국이 담겨있고요.
한 번은 무슨 심정 상한 일이 있어 저녁 늦게서야 귀가했는데 자취방에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엄마가 다녀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의아했지요. 뜻밖에 아버지가 와계셨습니다. 당숙네 잔치를 보고 들리셨다는데요. “왜 이렇게 늦게 다녀. 얼른 밥 먹자.” 시며 곧장 나를 밥상머리에 앉혔습니다. 세상에나, 부엌일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당신께서 삼계탕을 끓여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인삼만 넣은 게 아니고 감자알이 서너 개 보였습니다. “너 삼은 맨날 건져내잖아. 감자는 슴슴해서 먹기 괜찮을 거다.” 삼계탕 국물에 감자를 똑똑 으깨서 먹은 그날 밥상은 내 삶의 보약이고 이정표를 세워주는 아버지 눈빛입니다.
감자를 캐고 나면 부지깽이도 함께 뛰는 인삼농사로 우리집은 눈코 뜰 새 없었습니다. 인삼 딸(열매)을 따주고 시시때때로 풀 뽑아주는 일이 그것인데요. 예닐곱 살 어린 나까지 삼장(인삼밭)으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삼장은 차양이 쳐진 그늘이라서 자라는 풀 또한 그리 억세지는 않았습니다. 인삼의 기운에 밀려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방동사니, 바랭이, 파대가리 등 손으로 뽑으면 쏙쏙 뽑혔지요. 문제는 풀을 뽑을 때마다 딸려나오는 지렁이였습니다. 붉은 지렁이가 풀뿌리와 함께 꿈틀 나올 때마다 소름이 끼쳤습니다. 삼장에 온 식구가 나가야 할 때마다 나는 배 아프다, 어지럽다며 온갖 핑계거리를 댔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집에 있으라 했지만 엄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나도 꾀병과 핑계거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아프기도 했는데요. 엄마는 마침내 나에게 숙제를 주는 걸로 실랑이를 마무리했습니다. 삼장에 나가지 않는 대신 감자를 한 양푼 긁어 물에 담가놓으라는 것이었지요. 감자를 긁는 일도 만만치 않았지만 무엇보다 그 징그러운 지렁이를 안 봐도 되니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요.
감자 한 양푼 물에 담가 한 개 한 개 다 긁고 나면 팔이고 얼굴이고 하얀 분이 묻어 있곤 했습니다. 감자를 긁는 놋수저가 따로 있었는데요. 놋수저는 달이 헐리듯 한쪽이 닳아 나중에는 초승달 모양이 되기도 했습니다. 고대 식량 생산의 기원지 ‘비옥한 초승달지대’가 생각나는데요. 감자는 남아메리카 토착민 사이에서 오랫동안 재배되어 왔다고 합니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1824∼25년경 청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에 인삼을 몰래 캐가려고 왔다가 감자를 떨어뜨리고 갔다는 설이 수록되어 있는데요. 신기합니다. 내 기억 속 인삼과 감자가 연혁의 그물로 얽혀있다니요.
다른 음식 다 제쳐두고 감자채볶음에 고추장 얹어 쓱쓱 밥을 비벼먹는 아들내미를 보니 아이들 어릴 때 감자를 구워먹던 일이 생각납니다. 별이 쏟아지는 바닷가에서였지요. 모닥불이 자작자작해질 무렵 호일에 싼 감자를 묻어놓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언제 저리 커버렸는지 추억이 새롭기만 합니다.
한 두어 달 집에 머물다 아들내미는 또 자신의 삶터로 떠나갈 것입니다. 밥 한 그릇이 만사지(萬事知)라지요. 가기 전 인삼 두어 뿌리와 감자 서너 알 넣은 삼계탕을 해먹여야겠습니다. 아들내미 나이 때 처음으로 받은 아버지 밥상이 지금도 뭉클합니다.
- 글쓴이 : 황구하
-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