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컬처라인_마을이 있는 풍경]義와 仁이 함께 공존하는 고풍스런 마을, 山雲
• 박금숙(cultureline@naver.com) 2017-06-19

義와 仁이 함께 공존하는 고풍스런 마을, 山雲
그리고 조선후기 ‘질서있는 사회’ 의 모습들

 

 

박금숙

 

산운마을 전경

 

매년 계절은 스미듯 오고 더구나 가을 찬바람은 채비할 새도 없이 황급히 달려든다더니 벌써 무서리 몇 차례 다녀간 듯 뜰에 꽃이 기가 한 풀 꺾였다. 어느새 하늘로만 치솟던 기운이 모두 땅으로 내려앉았다.

이렇게 천기가 아래로 내려오니 땅에 뿌리를 둔 모든 것들이 알이 차 소담스레 단맛이 든다. 의연히 가지 끝에 매달린 감 몇 개를 보면 농부의 넉넉함이 보이고 그래서 가을은 분명 서로 아낌없이 나누는 계절임이 틀림없다. 생각해보면 초록이 사라지는 속도보다 붉게 물들어 오는 시간이 더 빠른 시절이다. 이렇듯 자연의 심오함은 가을이란 단어에 넉넉한 마음을 담아 그려내는 멋진 수채화다.

영남에서 가장 많은 전설과 이야기를 간직한 산과 마을을 하나 꼽으라면 다들 이곳 의성(義城)의 중심에서도 남쪽 관문인 금성면 일대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최초 화산인 금성산(금학산)을 필두로 삼한시대 때 부족국가였던 조문국 사적지, 봉황의 꿈틀거림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비봉산, 학과 봉이 노니는 곳에 맑은 물이 흐르는 천년고찰 수정사, 옥녀봉 등등 보태어 여기 금성산 자락에 자리해 450여년의 전통을 이어온 집성촌 산운(山雲)마을도 빼놓을 수 없겠다.
말 그대로 인간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진 곳에서만 들을 수 있는 아름다운 노랫가락이 이 일대에 흐르고 있어 한걸음만 들여놓으면 그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하여 어둡사리가 슬금슬금 기어오는 오후, 부끄럼 많은 새악시 마냥 살포시 내려온 저녁노을이 山雲마을을 한번 들러보자 보챈다.
느지막이 지친 나의 그림자도 수채화다운 구도에 꼭 맞는 멋진 마을을 거닐어보잔다. 그래 노을과 그림자와 벗하여 가보지 뭐, 보채니까.

금성산과 비봉산 자락의 아름다운 신화와 전설이 담겨져 있는 산운마을에 터전을 잡은 사람은 고려때 영동정(領同正)을 지낸 이박(李博)을 시조(始祖)로 하는 영천이씨의 14세손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1531〜1609)이다. 본래 군위 양곡(지금의 군위군 군위읍 내량리)에서 태어나 이곳 산운리로 입거하면서 영천이씨 집성촌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문무를 겸비하고 담력이 뛰어나 말달리기, 활쏘기를 좋아한 그는 1562년(명종 17)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학유 등을 거쳐 1592년(선조 25) 강릉부사가 된 정통 관리였다.
임진왜란에서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로 승진했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2년(선조 35년) 형조참의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이후에는 나이가 많아 고향 산운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원래 그의 문집이 7권 5책으로 간행되어 수정사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화재로 모두 소실되어 몇 안 되는 자료를 가지고 사후 350년 뒤인 1959년에 학동일고(鶴洞逸稿)라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이광준(李光俊)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그중 많은 업적을 남긴 둘째 아들 경정(敬亭) 이민성(李民宬)과 셋째 자암(紫巖) 이민환(李民寏)에 대하여는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소개할까 한다.

 山雲마을, 길복을 누린다는 명당이야기

산운마을이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게 된 연유는 구전으로 내려오는데, 학동 이광준이 처가인 의성쪽으로 말을 몰면서 무예 공부에 힘썼다고 한다. 하루는 금성산과 비봉산 기슭 쪽으로 말을 몰고 가다가 갑자기 산운마을 서편 입구(솔끝) 근처 보리밭에서 급한 볼일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일을 보고 있노라니 지나가던 상좌(上佐)와 시동(侍童)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곳이 名地인데 벌써 주인이 와 있는 모양이야 !!”
우연히 이 얘기를 엿들은 그는 급히 그들을 뒤따라가서 이유를 물은 바
“이곳 금성산과 비봉산록이 명지라 여기에 집터를 잡으면 당대에 벼슬길에 오를 수    있을 것이고 후손들도 번창하여 길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곧장 1558년(명종 13)에 부모와 형제는 군위에 남겨두고 처와 갓 태어난 첫째 아들만 데리고 이곳 산운마을 앞동산 너머 비봉산 자락인 쇠랑골(일명 소시랑리)에 첫 터전을 마련하였다. 지금도 속명으로 부르고 있지만 그 당시는 뚜렷한 지명이 없었기에 마을을 새롭게 개척했다는 의미에서 산운 ‘새터’ 라고 불렀다.
 
그 뒤 태어난 셋째아들 자암(紫巖) 이민환(李民寏)이 광해군 때 명나라를 돕고자 후금과의 전투에 종사관으로 파병되어 사르후(부차령:富車嶺)전투에서 후금에 포로로 잡혀 17개월 여 만에 조선으로 귀환한 적이 있다. 포로로 있을 당시 절의를 굽히지 않고 선정을 베풀어서 후금 사람들은 그의 충절을 감탄하고 존경하였다고 한다.

이런 그의 행적은 중국 한무제 때 시랑 벼슬을 하였던 소무(蘇武)가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양국관계가 악화되어 포로로 억류되었지만 한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키면서 19년 만에 귀환하였다는 이야기와 함께 자주 회자되었고 조선의 지식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민환을 ‘조선의 소무’라고 칭송하였다. 그래서 이민환이 살고 있는 동네를 사람들은 소시랑리(蘇侍郞里) 혹은 소랑촌(蘇郞村)이라고 불렀다.

 

 

당시 조선의 소무라고 칭송한 이민환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은 학록정사의 현관문에  ‘소시문’이라 적어 두었다. 

소박한 작은 부분이나 선현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山雲마을, 고건축에 드러나는 멋스러움이 배어있는 곳

전통마을의 밑바탕을 이루는 사상은 서로 같음에도 불구하고 마을마다 서로 다른 재미있는 공간과 장소가 만들어진 것이 기이하게 느껴진다. 각각의 마을이 자리 잡은 땅의 조건, 그리고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조건에 따라 매우 독특한 공간과 장소가 구상되었다. 산운마을에서 가장 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하여 고풍스런 멋을 내고 있는 건축물로는 운곡당(雲谷堂), 점우당(漸于堂), 소우당(素宇堂)이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 운곡당은 북쪽으로 솟은 금성산을 뒤로 하고 남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자암 이민환의 5세손인 운곡(雲谷) 이희발(李羲發)이 영월부사로 있을 때인 1800년대 초기에 세운 집이라서 약 100년 후에 지어진 점우당보다 몇 군데 폐쇄적인 구조가 엿보인다. 현관에서 보았을 때 정면으로 보이는 안채를 감추기 위해 내외담을 쌓았다. 또한 딱딱한 부분을 보완키 위해 앞에 향나무를 한그루 살짝 심어 놓았다. 선비들의 작은 배려가 멋진 공간을 이룬 것이라 하겠다.

 

운곡당(雲谷堂)이란 당호를 지은 이희발은 호가 구름의 계곡이란 뜻으로 해석되나, 한편으론 주자의 학문을 이어 받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이희발의 현손인 이홍(李鴻)이 운곡당 현판을 썼으며, 이곳을 일제강점기 때 양진사숙(養進私塾)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마을에 초등학교가 세워지기 전 학생들을 모아서 교육하였다고 한다. 교육열이 대단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결과물들이다.

 

운곡당

 

  소우당 연못

 

기억을 더듬어서 정조와 자암의 5세손인 운곡과의 일화가 문득 생각이 난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였기에 노론, 소론 당쟁에 휘말리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 결과 영남인들에게 인재등용도 점점 유리하게 될 수 있었다.

운곡 이희발이 규장각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어 기획을 맡고 있던 어느 날, 정조가 경연(經筵)을 하는데 초계문신들을 골탕 먹이려고 시운을 어려우면서도 조금 이해되지 않은 운자를 내어 시를 지으라 한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초계문신들은 모두 운자에 맞추고자 애를 쓰는 모습이 역역했지만 운곡은 하얀 백지만 낸 것이다. 당연히 정조가 이유를 물었던바, “전하께서 내신 운자의 뜻을 모르는데 어찌 시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정조가 “논어에서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 아는 것이라.’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하였는데 운곡은 진정 배움을 아는 자로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왕을 속이지 않는 그 심성은 곧고 바르니 가히 영남인의 정신이 살아 있는 사람이다.” 고 하면서 ‘三中’이란 친필을 써 주었다.
정조는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용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운곡에게 알려주면서 앞으로도 중용을 잘 지켜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정치하기를 바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어렵게 운곡의 후손께서 간직하고 계신 정조의 친필을 기꺼이 꺼내 보여 주었다.

 

정조

      

한편 조선시대에는 주거학의 교과서라 할 이중환(1690년~1752년)의 <택리지>와 서유구(1764년~1845년)의<임원경제지>, 1485년(성종 16)부터 본격 시행된<경국대전>, 주자가 중원고대의 예제를 재해석하여 새로운 윤리체계로 제시한<주자가례>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이 뿌리를 내렸어도 기성의 개념을 그대로 구현하기 힘들 경우에는 그것을 현실의 조건에 맞도록 과감히 변형시켰다. 성리학에 바탕을 둔 ‘질서 있는 사회’를 거역하지 않고 내포하면서... ...
그래서 우리의 마을과 그 안의 집들은 신념이나 원칙에만 집착하여 경직되지 않고 예측하기 힘든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런 사례는 사당에 갈 때 남성의 영역인 사랑채에서 여성의 영역인 안채를 거치는 일이 없도록 사당의 위치를 정함으로써 안채의 동쪽에 사당을 두도록 한 주자가례의 규정을 어긴 성주 한개마을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운곡당도 한 몫을 한 예이다. 당연히 규정을 어겼으니 방향은 서쪽이다.

 

운곡당 사당, 사당의 위치가 동쪽이 아니라 서쪽이다.

이상으로 살펴본 전통마을 산운의 구석구석, 이모저모를 주저리 엮어보았다.

 

 

   

위 : 학록정사  /  아래 왼쪽 : 유의  /  아래 오른쪽 : 거인

 

 

학록정사 강당의 대청 위에 왼쪽에는 거인(居仁), 오른쪽에는 유의(由義)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단어 두 개가 삼부자로부터 이어진 산운마을 영천이씨들의 좌우명과 같은 것이다. 居仁,  由義 말 속에는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사람으로서의 바른길을 항상 생각하며,    불의에 맞서 항상 행동으로 실천하는 정의로운 길을 가라고 가르치는 영천이씨 가문    의 전통이 함축되어 있다. 학록정사의 편액은 단원 김홍도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의 글씨다.

 

생태공원의 잔디위에 서서 보는 석양의 모습은 한마디로 엄지손가락을 높이 올리게 한다. ‘ 아! 이 가을을 삼키는구나 !!’ 나만 그런가? 어디든 답사를 마치고 나면 늘 생동감이 넘침을 느낀다. 이래서 문화는 언제나 살아 꿈틀거리고 서로 보이지 않는 氣를 나누는 생물이라 하는가 보다.

만들어가는 사람의 기운이 고스란히 쌓이기도 하고, 또 어떤 마음으로 만지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재료일지라도 다른 의미의 작품들을 완성해 낸다. 완성된 작품을 보면 그 시대의 정수가 오롯이 담겨있다. 아주 의미 있는 부분이다. 만든 장인의 기가 서려 있기에 여러 모양의 역사 고리가 길게 이어진다. 산운마을을 있게 한 선현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층 더 고풍스러워질 동성마을 山雲을 기대해보며 잰걸음을 부추긴다. 초승달이 배시시 웃는다.

 

* 참고문헌:  경북의 종가문화( 2013. 10. 31),  의성의 지집록

 

 

 

글쓴이 : 컬처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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