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정창식_마을이 있는 문경시]서원이 있는 풍경 "근암서원"
- 정창식(cultureline@naver.com)
정창식
도산서원을 찾았다. 아직 푸른 잎이 돋아나기 전이라, 입구에 있는 큰 나무들의 모습이 더욱 선명히 보였다.
구불구불한 가지와 몇 아름이 넘는 굵은 나무기둥에서 세월의 연륜이 느껴졌다. 주위 사람들에게 물으니 왕버들 나무라고 하였다. 400여년은 족히 되었다는 설명이다. 나무도 도산서원의 명성을 알고 있는 것일까.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저렇게 당당히 지켜 올수 있음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서원 앞의 왕버들 나무, 도산서원의 상징이다 © 정창식
명소(名所)에는 그를 빛나게 하는 상징들이 적지 않다. 서원의 강학 장소인 전교당의 현판도 그렇다. 현판의 ‘도산서원(陶山書院)’, 네 글자는 한석봉의 글씨이다. 이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날, 선조임금이 그를 불렀다. 그리고 글씨를 쓰게 하였다. 한 자씩 불렀는데, 마지막 글자가 ‘도(陶)’ 였다고 한다. 그제서야, 자신이 ‘도산서원’의 현판 글씨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평정심을 잃어 마지막 획, 삐침에서 떨었다고 한다. 당대의 한석봉이 그런 실수를 했을까마는, 도산서원의 가치를 짐작케 하는 또 하나의 상징이다.
그 상징들로 우리들은 서원의 가치를 확인하고 감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상징은 무엇이 있을까. 살펴보면, 서원의 이름이 지어진 까닭이 아닐까 한다. 왜 도산(陶山)인가. 안동대학교 문화산업전문대학원의 이효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도산(陶山)은 서당이 위치한 뒷산의 이름입니다. 도(陶)는 질그릇을 뜻하는 것
으로 학문을 궁구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풀이하자면, ‘자연에서 학문에 힘쓰
다.’ 라고 할까요.”
옛 사람의 이름을 짓는 일은 단순하면서도, 이렇듯 적지 않은 깊이를 지니고 있다. 병산서원의 상징은 만대루(晩對樓)이다. 이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다.' 라는 시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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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전경 © 안동시
만대루 누각 © byeongsan.net
만대루 누각에서 보는 병산의 모습 © byeongsan.net
옛 건축물에서 진입 공간, 즉 정면에서 보이는 상하 건물의 칸 수는 홀수로 배열한다. 측면의 좌우 건축물의 칸 수는 짝수이다. 그래서 만대루는 정면 일곱 칸, 측면이 두 칸이다. 입교당에서 만대루를 바라보면 앞산의 풍광이 일곱 개로 나누어진 병풍과 같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이 만대루를 보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건축으로 한국건축사의 백미이다.’라고 절찬하였다. 이쯤에서, 우리는 다시 서원의 이름에 주목하게 된다. 왜 병산(屛山)일까.
어렵지 않다. 서원 앞의 산이 병산이기 때문이다. 도산서원에는 없는 누각이 이곳에 있는 이유가 이 산 때문이라고 한다. 만대루는 서원과 산 사이에서 병풍과 같은 가리막 역할을 한다. 단순한 막이 아니라, 서원과 산의 거리를 더 넓고 길게 트여주는 확장공간이다. 또한 풍수의 부족함을 보충(補充)하는 비보(裨補)이기도 하다.
근암서원 입구 지원루 전경 © 김우용
우리 지역에도 서원이 있다. 문경시 산북면 서중마을에 있는 근암서원이다. 근암서원은 한음 이덕형과 우암 홍언충 청대 권상일 등 우리 지역과 관련이 있는 유학자 칠현(七賢)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1868년 대원군에 의하여 훼철되었다가 2011년 복원되었다. 서원이 있는 서중마을에 거주했던 17세기 우리 지역의 유학자 부훤당 김해가 지은 ‘영빈서당 이설기’에 이 서원의 내력이 대략 나와 있다. 잠시, 이설기를 살펴보자.
“중종39년(1544년) 상주목사 신잠이 각 현에 서당을 창건하였고, 이 서당은 그
중의 하나이다. 산양 현사(縣舍)의 건너편 웅암의 산기슭 아래 바로 영원사 옛
터에 자리를 잡았었다. 그러므로 석탑 3좌가 아직도 높이 우뚝 서 있다. 네 칸
의 집을 세워 당(堂, 마루)과 실(室)로 나누고 그 이름을 ‘죽림’이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웅창마을 도천사지 삼층석탑이 있던 그 자리에 죽림서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근암서원의 시원이 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설명을 더 들어보자.
“그러나 1614년, 지형이 한쪽으로 치우쳐서 좁고 집의 규모가 협소하여 주봉의
서북 변 옛 지명이 수개골이란 곳에 터를 잡아 개축을 하고 이름을 근암(近嵒)
이라고 하였다. 이곳 산성의 옛 이름 그대로 한 것은 대개 그 근본을 잃지 않으
려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이어서, 1664년 무렵, 서원의 제도를 대략 갖추어 우암 홍언충을 배향하였다고 적어놓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근암이라는 이름이다. 근암은 산양의 옛 이름으로 근품이라고도 했다. ‘근암(近嵒)’이라는 말은 산양면 현리마을의 산 이름, ‘근품산(近品山)’과 ‘근품산성(近品山城)’에서 비롯된 듯하다. 왜냐하면, ‘품(品)’과 ‘산(山)’의 결합어가 바위 ‘암(嵒)’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산과 병산이 서원의 이름이 되었듯이 근암서원도 산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근암서원’은 풀이하면, ‘근품산서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원루에서 바라보는 금품산 전경 © 김우용
이렇듯, 옛 유학자들은 서당과 서원의 이름을 고전에서 취하지 않고 서원이 세워진 주변 산의 이름을 빌렸음을 알 수 있다. 왜 일까. 그것은 퇴계의 학문이념에 영향 받은 까닭일 듯하다. 17세기 우리 지역의 유학자들은 퇴계를 유학의 종장으로 그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들의 입장에서 퇴계가 지향하는 학문의 이념은 절대적일 수 밖에 없었다. 퇴계는 학문의 목적을 입신양명이 아니라 수기(修己), 스스로를 닦는 수양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지역에서 학문에 힘쓰는 선비를 처사(處士)라고 하여 높였다. 그의 제자 월천 조목이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스승과 함께 학문에 힘쓴 이유가 이 때문이다. 스승의 뜻을 오롯이 실천한 그의 정신을 높여, 후학들은 스승과 함께 서원에 배향하였다.
퇴계는 학문에 힘쓰되, 자연과 즐겨 벗하며 심신을 수양할 것을 강조했다. 소나무와 대나무, 국화와 매화 등을 칠우(七友)라고 하였고, 농암 이현보와 함께 어부사를 부르며 강에 배를 띄워 풍류를 즐겼다. 자신이 머무는 도산서당의 마루를 암서헌(巖棲軒)이라고 불러, 늘 자연과 가까이 하는 마음을 지녔다. 이렇듯, 학문과 심신수양의 근본 처(處)를 자연으로 삼은 그의 이념은 이 지역 유학자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지원루 © 김우용
그럼, 우리가 근암서원에서 찾을 수 있는 상징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서원의 누문(樓門)인 지원루(知遠樓)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옛 건축물은 진입 공간의 전면이 홀수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곳도 정면 3칸에 측면 2칸이다. 일층은 문이다. 이층은 누대인데, 여기에 오르면 산북면의 산과 들, 그리고 금천이 한눈에 보인다.
이곳에서는 서원의 이름이 된 근품산이 보인다. 마치 병산서원의 만대루에서 병산을 보듯이 말이다. 그러나, 근품산은 원경이기 때문에 일곱 병풍으로 나누지 않았다. 세 칸 사이로도 충분하다. 우리 지역의 선비들은 그 옛적 이 누대에 앉아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지원(知遠)이라는 누문의 뜻을 새겨보았던 것은 아닐까. 이는 회남자(淮南子: BC 120년경인 한나라 초기에 편찬된 백과전서) 설산훈편(說山訓篇)에 나오는 ‘지원이부지근’(知遠而不知近)에서 가져온 글자인 듯하다.
즉 ‘남의 일은 잘 보이나 자기 일은 잘 안 보인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근품산을 바라보며, 남의 일을 보듯이 스스로의 잘못을 살펴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듯하다. 그것이 유학의 이념인 수기치인(修己治人)에서 퇴계가 학문의 목적으로 삼은 수기(修己)에 해당하는 것이며, 벼슬하지 않고 지역에서 학문하는 처사(處士)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살펴보면, 어느 곳이나 장소를 상징하는 시그널은 분명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밝혀 찾아 읽어 보려는 마음의 눈이다. 우리 지역이 지닌 문화유산과 뛰어난 풍광은 적지 않다. 다만, 이를 폄하하지 않고 긍정하며 그곳에서 인문학적 의미를 찾아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어쩌면 이러한 소소한 일들이, ‘지원이부지근(知遠而不知近)’하면서 스스로를 성찰하며 성실히 살다 간 옛 선조들에 대한 작은 보답이 아닐까.
지원루에서 근품산을 바라보았다. 푸른 산이 금천(錦川)의 봄물을 머금은 듯 싱그럽다. 문득, 지원루 아래 입구 광장에 도산서원의 400여년 된 왕버들나무 같은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암서원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시그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 글쓴이 : 정창식
- ▪ 현 문경문화원 이사 ▪ 안동대학교 문화산업전문대학원에서 스토리텔링을 전공하였다. [주간문경]에 문경문화와 관련된 글을 연재하고 있다. 문경의 자연과 마을, 유적과 문화재 그리고 오래된 이야기들을 새롭게 봄으로써 문경문화의 가치를 높이고 싶어한다. ▪ 저서 수필집 "아름다운 선물 101" (2010) 에세이집 『아름다운 선물 101』 은 우리 인생에서 있어서 스치는 인연들과의 소중한 관계, 베풂의 마음 등 일상에서 느낀 감정들을 엮은 책이다. 수필집 "문경도처유상수" (2016) 주간문경에 2010년부터 연재하고 있는 문경문화와 관련된 글 중 57편을 선별해 책으로 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