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이선아_바람 따라 구름 따라]의성 산운마을
- 이선아
진유의 걸음이 빨라졌다. 여관 목욕탕이란 이정표가 보이자 뛰기 시작하고, 비닐 봉투 안에 담긴 두부가 몸을 흔들자, 바닥으로 물이 떨어졌다. 비닐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감긴 진유의 발이 땅에 잘 닿지 않았다. 비탈길에서 진유는 숨을 한 번 크게 토하고 계속 달렸다. 반쯤 귀울어진 대문을 발로 차 진유는 덤비듯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 진영을 찾았다.
“진영, 아푸아푸.”
마루 위에서 배를 깔고 그림을 그리던 진영은 헐덕거리는 진유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진유는 비닐 봉투를 한쪽으로 고이 치워두고, 진영의 손을 끌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진영의 목에 수건을 감고, 대야에 물을 받아 진영의 얼굴을 야무지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얼굴에 물이 발리자마자 진영이 아푸아푸 소리를 냈다. 진유는 비누를 풀어 다시 진유의 눈과 코, 입을 지나 볼, 골고루 문질렀다.
“아푸아푸”
진영이 소리를 낼 때 마다 침이 비눗물과 함께 대야로 떨어졌다.
“입술을 붙여.”
진유는 진영의 귀 밑까지 싹싹 닦았다. 진영의 손이 지나간 자리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오늘 은미 언니 와.”
진영은 입으로 다시 아푸아푸 소리를 냈다. 아푸아푸의 소리가 가볍고 밝다. 진영의 얼굴을 문지르는 진유도 진영의 소리에 맞춰 아푸아푸하더니 슬며시 웃음을 입꼬리에 걸었다.
진영은 세수를 다 끝내지 못하고, 마당을 돌아 다녔다. 질질 끌리는 슬리퍼가 시멘트 바닥의 모래를 부볐다. 진유가 진영을 잡아 얼굴을 수건으로 꼭꼭 누른다. 검지와 중지에 힘을 줘서, 한방울의 물방울도 얼굴에서 놓치지 않는다. 진영이 힐끗 진유를 쳐다 보더니 진유가 가져온 두부를 덥석 집었다.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진유가 놓치지 않고 진영의 손등을 매몰차게 때렸다.
“안돼. 은미 언니 오면.”
계절을 여는 햇살이 따뜻하다. 고요하고 넉넉한 계절의 볕은 자체로 위무된다. 여름동안 결실을 생각하지 못한, 미처 놓쳐버린 무엇이 뜨거운 태양 속에서 익어 이 가을의 어느 때에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거느린 볕이다. 쭉 뻗은 길 사이로 그 볕들이 들어찼다. 귀밑이 따끔 거려 슬며시 검지를 가져가 본다.
“림프를 잘 풀어줘야 해요. 림프에 독소가 쌓이면 턱이 두 개가 되고, 사람 얼굴이 불독처럼 되죠. 50-60대 나이 든 남성 분들은 특히 이 부분을 만져 주시기 바랍니다. 처음엔 고객들이 아프다고 할꺼예요. 그럼 천천히 지긋이 압박하면서 시계 방향으로 독소를 풀어주세요.” 아침에 들은 관리실 매니저의 목소리가 아직 귀에 쟁쟁 거렸다.
“이은미씨.”
“네?”날카로운 매니저의 목소리에 은미가 움찔 했다.
“출근하자마자 오늘 고객들에게 문자 서비스 보내는 것 잊었던데. 주의 하세요. 홍보 또한 이은미씨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납니다. 특히 요즘처럼 우후죽순 격으로 피부 관리실이 생겨나는 때에는 무엇보다 피알이 중요하죠. 선점하는 곳이 승산이 있습니다. 교육 들어오기 전에 일처리 모두 끝내세요.”
지금 일하고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지는 2년이 조금 지났다. 피부 관리사 자격증을 딸 때 같이 학원에 다니던 언니가 소개 시켜 준 곳인데. 두 번씩 지하철을 갈아타야 하지만 몇 십년씩 피부관리를 한 전문가가 있다는 것과 점심 값이 따로 나오고 야간 근무는 교대에 일주일에 한 번은 쉴 수 있었다. 많이 생각해 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오케이 해 버렸다.
처음 원장에게 인사를 하러 갔을 때. 피부관리실에서는 약초 냄새가 났다.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나른하고도 아득한 향이였다. 대륙의 어디선가 혹은 티벳의 어느 산에서 여자 아이가 맨발로 뛰어다니며 캔 풀뿌리 같기도 했고, 지구의 어느 곳, 의미를 가진 무언가들이, 개안 되기 전의 향기 같았다. 원장은 별 말 않고 내일부터 출근하라더니, 통장 계좌 번호를 물었다.
“관리실 영업은 10시구요, 매일 아침 9시 20분에는 조회가 있습니다. 시술하는 화장품의 이름은 가급적 빨리 외우시고, 우리 샵의 피부 코스 또한 빨리 익히세요. 고객들의 신상과 피부 상태 또한 빨리 외워두면 좋겠죠. 시간이 나면 고객의 피부 상태에 따라 가려 먹어야 할 음식 또한 숙지해 두는 것이 좋아요. 그리고 이은미씨는 당분간 인포입니다.”
원장은 처음 오는 손님에게 가입을 권유 할 때 빼고는 아침 조회나 회의 시간에 길게 얘기 하지 않았고, 신입 관리사들에게는 무관심했다. 은미는 오히려 그 편이 좋았다. 처음 삼 주 동안은 매니져와 함께 마사지실에 들어가 매니져가 손님의 혈을 짚고, 제품을 설명하고 어떻게 핸드링을 하는지. 지켜 보기만 했다. 룸에 들어가 그저 서 있으면 되는 일이였는데 자꾸 무릎이 떨렸다. 이제 겨우 1단계 천연 팩이 마무리 됐는데 아주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삼주나 지났는데 여기 이곳의 약초향에 동화되지 못 할 것 같은 불안이 저쪽부터 밀려왔다. 딱히 설명 될 수 없는, 막연하고도 기분 나쁜 예감들이 척척 맞아 갈 것 같은, 부정하고 싶지만 반드시 기필코 오겠구나 싶은 불안들이 가슴 저쪽부터 일정하게 계속 울어댔다.
정오가 지난 시간이였다. 물을 받기 위해 잠시 나온 틈을 타 매니져가 은미를 불렀다.
“이은미씨, 이 고객은 등이 아니라 장을 풀어줘야 하는 거였어요. 오더 못 받았어요? ”
“아? 그래요? 죄송합니다.”
“정신 좀 차려요. 여긴 일을 하는 곳이예요.”
“네. 제가 다시 할께요. 대신 등 마사지에 대한 손실분은 제가 채워넣을께요”
“이은미씨, 상당히 건방 지네요. 주제넘게 뭘...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우리 샵의 신뢰 문제 예요. 고객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서로 손발이 안 맞는 샵이라 생각 할꺼 아니예요?”
불안의 정체가 이거 였나? 하던 차에 시선이 스타킹에 머물렀다. 길게 올이 나가 있었다. 출근 할 때도 괜찮았고, 샵에 와서도 어디 부딪친 적이 없는데. 언제 생긴건가? 발바닥부터 시작 된 건지 어디서부터 구멍이 나 있는지 알수 없지만. 그 자국은 발목을 지나 종아리 무릎께를 지나 허벅지 쪽으로 올라섰다. 마치 살이 서로 엉켜서 문질러져 들러붙어 있는 것처럼 끔찍한 모양이였다.
“브이아이피 룸으로 들어가세요. 남성 분이예요. 일단 스킨 케어 하시면, 다음에 매니져 님이 들어가실 꺼예요.”
얼굴을 떨어뜨린 은미 앞에 서 있는 매니져 뒤로 원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장은 아량을 베풀고 있으니 잘하라라는 투였다.
네. 시선은 아직 스타킹에 박은 채 짧게 대답했다. 브이아피룸은 일인 독실에 스파 시설까지 갖춰져서 원장이 여간 신경 쓰는 손님이 아니면 들여보내지 않는다.
“안녕하세요.”
가습기가 돌고 있고, 수분증기가 쐬여지고 있는 손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누구?’ 거꾸로 놓인 얼굴을 자세히 봤다. 들배였다.
언제나 거울 앞에 서 있던 들배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들배는 집을 떠날 때 우리가 살고 있던 이층 양옥집을 담보로 우리 몰래 은행에서 돈을 가져갔다. 덕분에 엄마와 나는 거리로 나 앉았다. 들배는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집으로 쳐들어오고 온갖 세간 살이들이 흐트러지고 부서졌다. 지하 월세방에서 가릉거리는 기침을 토하던 엄마가 까맣게 죽어가는 동안에도 들배는 소식이 없었다.
“좋은 데 있네.”
클린징 크림을 바르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온타올입니다. 뜨겁습니다.”
수건을 올려 두고 은미는 잠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수건을 걷어내고, 다시 해면을 가지고 들배의 얼굴을 닦아 냈다. 눈 아래로 불룩하게 솟은 지방과 콧등에 세로로 잡힌 주름, 입가의 검은 반점, 넓은 모공, 블랙 헤드, 각질까지 건강한 피부로 만들려면 오래 걸리겠구나 생각했다.
“여기서는 대화 같은 거 하면 안되나?”
들배가 눈을 떴다. 다시 딥 클린징을 할 것이다. 클린징 크림을 바르고 가만히 두었다가 물기가 생기면 턱 아래부터 이마까지, 볼은 둥글게 터치해 가면서 피부 속 깊은 노폐물을 빼내고, 다시 닦고 냉 타올로 다시 한 번 더 닦고, 스킨을 바르고, 로션과 에센스 그리고 아이크림 그리고 주름을 잡아주는 리프팅 크림, 그리고 수분 크림으로 1차 마무리를 하는 것이 이 방에서 해야 할 일이다.
“거울 보여 드리겠습니다. 피부 속 노폐물을 다 빼냈기 때문에 피부가 한결 깨끗해졌어요. 눈으로 확인해 보세요.”
손 거울로 들배의 얼굴을 비췄다. 거꾸로 본 들배의 얼굴보다 거울 속 들배의 얼굴이 더 무심했다. 시간에 순응한 들배의 얼굴엔 늙은 아버지의 얼굴이 숨어 있었고, 가족에게 큰 소리치던 그 기백 또한 식어서 버석거렸다.
“오빠. 이번에 판 나온다.”
팩을 만들던 은미의 손이 멈칫 했다. 한집에 같이 살던 때, 들배의 비키니 옷 장에는 계절이 가득했다. 크고 화려한 꽃무늬, 흰 바탕에 초록의 넝쿨, 등쪽에 가득 넘쳐 보이던 붉은 단풍잎들이 그려진 옷을 입고 들배는 거울 앞에 서 있다. 노래를 한다. 들배의 목소리가 꺽이고 털리고, 들배는 노래를 소음으로 만들어, 쥐고 흔들었다.
“이번엔 진짜라니까, 곡도 좋은 거 받았어. 이번엔 확실해. 그래서 말인데 한 오백만원만 있으면...”
“팩 올리겠습니다. 눈과 입술 모두 막겠습니다. 레티놀 성분과 비타민 E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눈의 주름 막고 입술이 트는 것을 방지합니다.”
거즈 아래로 들배의 얼굴이 갇혔다. 1차 스킨케어가 겨우, 끝났다. 이제 매니져님 차례다.
“이은미씨, 쟈스민 방입니다. 처음 오신 분이예요.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죠?”
VIP룸으로 들어가는 매니저가 말했다. 쟈스민 방은 아직 덥혀지지 않아 한기가 느껴졌다. 은미는 주위를 돌리기 위해 여자의 얼굴에 난 여드름을 설명했다.
“자 들어보세요. 모든 사람들 피부 속에서 트러블은 자라나게 됩니다. 노폐물과 독소죠. 그것이 수분과 만나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문제는 수분과 만나지 못 할 때 생깁니다. 뾰루지 소위 말하는 여드름이 생기는데....”
여자는 두 손을 포개 얌전하게 가슴 아래로 놓았고, 입은 가운이 흘러내려 가슴이 보이면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여자의 어깨는 동그랗고 여위어 있었다. 마사지가 끝나는 내내 자신의 몸을 계속 긴장시키고 있어서, 팔이나 복부를 마사지 할 때 꽤 힘이 들었다. 손끝으로 느낀 여자는 몸은 경직되어 있었다. 안으로 웅크려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스킨 케어를 할 때 여자의 얼굴에서 화기가 느껴졌었고, 가슴께를 마사지 할 때는 추운 곳에서 살다가 온 사람처럼 몸을 계속 가늘게 떨었었다. 방안의 온도를 더 올렸다.
“이 제품은 피부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어요. 게다가 이 스킨은 마사지 후 피부결을 정리해 주면서 피부안의 독소를 빼주죠....”
여자는 계속 몸을 떨었다.
“마음을 놓으세요.” 은미가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루는 더디게 갔지만, 한 달은 금새 갔다. 첫날이 허물어지면, 말일은 금방이었다. 원장은 샵보다는 밖으로 돌았다. 원장의 빈자리는 새로운 화장품과 새로운 코스들로 채워졌는데, 교육은 그 때 마다 다시 이루어졌다.
“이 화장품 냄새는 어떠세요? 이 화장품을 바른 뒤 잠시 따끔거림을 호소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이것이 천연 약초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일 뿐이지 이상이 있는 건 아니예요. 고객님께서 그렇게 얘기하시면 천연성분이라 말씀 해주세요.”
-드르르르. 드르르르.
매니저가 은미를 쏘아 봤다.
“이은미씨 교육 중에 휴대전화를 가져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죄송합니다. ”
“우리 몸은 자연을 원합니다. 입에 달콤한 것들이 몸에 해가 되듯이 거친 음식을 먹고, 가공하거나 정제를 거치지 않은 자연을 먹고 바르세요.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죠? 너무 넘치면 해가 됩니다. 모자란 듯 넘치지 않게 몸에 균형을 맞추면 피부에 밸런스는 저절로 잡아집니다.”
-드르르르, 드르르르.
“이은미씨!”
매니저가 불쾌한 듯 소리를 질렀다.
은미는 짧게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저장해두지 않은 낯선 번호 였다. 혹시 들배가 전화 번호를 바꿨나? 들배는 한동안 쉴새 없이 전화를 했다. 며칠 전에도 들배는 내게 전화를 해서 오백만원을 재촉했었다. 들배의 전화 번호를 저장시켜 전화를 받지 않자 샵으로 전화를 하기도 했고, 그마저도 피하자 시시때때로 전화를 하기 시작 했다. 이 시간에 들배가 전화를 한 적은 없었지만 낯선 번호가 잠깐 두려웠다.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은미 언니 맞아요?”
“누구니?”
“진유요.”
“누구?”
“진유. 강진유요.”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진유가 누구더라?
“강진숙 몰라요?”
아, 그 손님. 여자의 얼굴과 예민하던 몸들이 생각났다. 계속 몸을 떨던 여자. 그 여자.
마사지에 대해 별 말이 없어서, 다음에 올까 의문이 들었지만, 여자는 한 달에 두 번 샵을 다녀갔다. 항상 같은 코스를 받았는데. 한 번은 여자가 어깨가 아프다며 다른 마사지를 원했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여자의 몸 때문에 데콜테 마사지가 힘들었다. 세게 꼬집어도 아프지 않을 군살들이 어깨 속에 박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한 번은 오늘 쉬세요? 라고 물어 봤었는데. 네 하고 겨우 입을 뗐다.
“이곳은 천골이라는 곳인데요, 가슴께를 마사지 하기 전에 이곳을 먼저 짚어줘야 합니다. 이곳은 급소죠. 오래 누르고 있으면 사람에겐 호흡 곤란이 와요. 그리고 쇠골의 양 끝 쪽에 크림을 바르고 자연 스럽게 마사지 하겠습니다.”
“죽나요?”
“네?”
“거기, 급소라는 곳... 오래 누르고 있으면 죽나요?”
“아마 그럴 꺼예요.”
여자는 가늘게 눈을 뜨는 것 같더니. 이내 몸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길게 들은 여자의 목소리는 생각외로 촉촉하고 밝았다. 어눌함도 주저함도 없었다. 그 후로 여자는 두 번 더 왔었는데 모두 같은 차림이였고, 27세의 기혼 여성이라는 것은 신상 명세를 보고 알았다.
“무슨 일이니?”
“우리 엄마 없어요?”
“무슨 말이야?”
“엄마가 없어요”.
진유는 더 말하지 않았다.
“엄마 여기 안 왔어. 저기...”
- 딩딩.
말이 끝나자 마자 전화가 끊겼다. 아이들이 찾는 사람이 누군지는 알았지만, 얼굴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던 여자 아이의 목소리로 여자의 얼굴을 연상시키려 노력해 보았다.
“이은미씨 지금 로즈마리 방으로 들어가세요.”
매니져가 은미의 어깨를 쳤다.
“아...네. 알겠습니다.”
“여어, 자꾸 이러기야?”
들배가 누워 있었다. 들배의 냄새를 맡으니 갑자기 체한 듯 통증이 느껴졌다.
스팀기를 가져 오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클렌징부터 시작하겠습니다. ”
“전화는 왜 안 받냐? 내가 잡아 먹냐? 너 돈 모은 거 많다며, 이런 곳에서 일하면 돈도 많이 받는다던데, 오백만 해 주라. 내가 이번에 잘 되면 달러 이자로 값을게. 오빠가 잘 되면 너도 좋잖아.”
“클렌징할 때 크림 타입보다는 밀크 타입을 쓰셔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각질 제거제도 일 주일에 두 번 써 주시구요. 지루성 여드름도 보이고 전립성 여드름도 보여요. 오늘 정리 해드릴까요? ”
“너 내 얘기 듣는 거냐? 너 내가 네 돈 가지고 간 것 때문에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나 본데. 그거 나중에 웃으면서 얘기 하게 될꺼다. 누가 그거 안 갚아 준대? 내가 다 준다고 내가. ”
들배가 대출 받은 돈과 함께 가져간 내 돈은 학교를 가기 위해 마련해 둔 돈이였다. 낮에는 학원으로 밤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해서 모은 구리 알 같은 내 돈이였다. 들배 때문에 나는 2년제 야간 대학을 오년만에 겨우 졸업했다.
“초음파입니다.”
초음파를 들배 목에 가져다 댔다.
“캭.”
들배가 가래를 뱉어낸다. 감기가 걸린 모양이다.
“뭐냐? 꼴도 보기 싫다 이거냐? 그거 갖다 대니까 기침 나잖아.”
초음파가 들배 목 안 깊숙하게 들어간 모양이다. 다시 한 번 초음파를 목쪽으로 가져다 댄다.
“캭,.캭..야! 아프다고.”
아파라. 내 발과 무릎이 밤마다 썩어 살이 떨어져 나갔던 만큼만 아파라. 엄마가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을 때 내게 밀려든 고지서와 빚쟁이들의 성화 만큼만 아파라. 엄마의 장례식장을 지키고 혼자 엄마가 타들어 가는 걸 볼때 만큼 아파라. 편의점에서 유통 기한 지났다고 빼 두었던 김밥으로 배를 채울때, 간신히 넘어가던 밥알이 목구멍을 틀어 막아 울음소리 조차 삐져나오지 못했던, 꼭 그 때 만큼만 아파라.
들배의 숨이 들락날락하는 천골이 보인다. 두 손을 포개고 반듯하게 누워 마사지를 받던 진숙의 목소리가 들린다. 거기.., 누르면 죽나요?
-삐....
초음파의 시간 설정이 끝난 알람이다. 은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여자는 아니, 강진숙은 지난 번보다 더 마른 몸으로 샵에 왔다. 인사를 하고 어떻게 말을 붙여 볼까, 은미는 그녀가 궁금했고, 속을 보고 싶어,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저희 샵은 보통 결혼을 압둔 예비 신부님들이 많이 오시거든요. 한달 매일매일 투자해서 효과를 보신 분들이 많아요. 피부 상태도 그렇고, 기미 외에는 별 다른 트러블이나 다크 써클도 안 보여서 결혼 안 하신 분인 줄 알았어요.”
“고마워요.”
“피부 톤만 맞춰주면 한 달 후엔 남편 분께 다시 청혼 받으실꺼예요.”
여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여자의 몸이 풀리고, 말캉해지는 가 싶더니
“올해 단풍, 봤어요?”
떨리지 않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였다. 그러나 여자의 한 마디에 편한 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나오게 될 줄은 몰랐다. 계절이 들판에 색을 입혀 놓았다. 그저 빨간 단풍이라고 이야기 하기에는 부족했다. 티 없는 붉은 색이였지만, 탁하지 않았다. 게다가 손을 탄듯한 진한 빛깔이 아니여서 곁에서 함께 가을을 채워가는 나뭇잎들에게 겁을 주지는 않았다.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운 색이였다.
‘은미야, 사람들이 가을 단풍이라고 하면 빨간 색을 떠올려. 왜 그럴까?’
‘가을에 나뭇잎이 빨갛게 물들잖아. 가을은 빨간 색이야.’
‘그렇지 않아. 노란 은행잎도 있고, 누런 황금 벼들도 있고, 금국도 노란색이고, 감도 있잖아. 노란색도 많은데, 사람들은 가을 단풍하면, 빨간 단풍을 떠올려. 왜 그럴까?’
‘잘 모르겠어. 오빠는?’
어린 은미를 업고, 들배가 동네 마실을 갔을 때였다. 지금 처럼 똑같은 단풍이 든 나무 아래서 들배는 은미에게 물었었다. 은미는 내리쬐는 햇살을 피해 잠시 눈을 찌푸렸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여자가 나타났다. 그런데 여자만 온 것이 아니고, 남자 아이와 도리깨를 든 여자 아이가 보였다.
“제 아이들이예요.”
아이들이 은미와 잠시 눈을 맞췄다. 경계에 찬 여자 아이와는 달리, 남자 아이는 은미보다는 누이의 손에 들린 도리깨에 관심이 더 많았다.
“힘들지 않았어요?”
“버스 타니까 금방이더라구요.”
여자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앞서 걸어갔다. 동네 나무들이 서서히 익어가고 있었다. 붉은 빛과 노란 빛을 밖으로 뿜어 오고 가는 이들의 머리 위에 털었다. 생기를 불어주는 나무와 잎들은, 분명 밟고 만질 수 있는데도, 그 속에 있던 은미는 잠시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은미는 허리를 틀어 좀더 깊숙이 그들 속으로 파고들어 타오르고 싶었다.
“오빠 부부가 노랗게 익은 콩잎으로 장아찌를 만들어 먹는 걸 좋아했었어요.”
여자가 백태를 털며 말했다. 찰찰찰, 마른 콩들이 외피를 벗으며 악기 소리를 냈다.
“몸을 만지는 분이시니까, 이게 몸에 좋은 거 아시죠? 암도 예방한다고 하고, 오래 먹으면 성인병도 예방한다고 하고, 만병 통치약이예요.”
“공부 하신 분 같아요. 노란콩에 대해서....”
“제가 너무 떠들었나봐요. 이거 갈아서, 두부 해 먹어요. 가다가 고추 몇 개 따서 녹두 빈대떡도 부쳐 먹구요.”
“진영, 하지마. 하지마.”
갑자기 여자 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같이 온 남자 아이가 장대를 들고 이리저리 휘젓고 있었다. 여자 아이가 두 손을 허공으로 들어서, 장대를 막았다.
“진영, 이리 줘.” 여자가 남자 아이에게서 장대를 빼앗아 다시 여자 아이에게 주고,
“누가 오빠한테 이름 부르니? 오빠라고 다시 해봐.”
“오빠.”
여자 아이는 마지못해 대답하고 다시 도리깨를 쥐고 콩을 털었다. 힘을 너무 줘도, 너무 빼도 안되는 도리깨질을 여자 아이는 힘든 기색 없이 잘 두들겼다.
“진영이가 오빠고, 진유가 동생이예요. 진유가 좀 더 야무져요.” 여자는 연하게 웃었다. 여자 아이는 다음 고랑으로 자리를 옮겨 콩을 털고 있었다.
사이좋은 소나무 세그루에 솔방울이 옹기 종기 달려 있었다. 우리가 걸어 온 발자국만 남아 뒤를 따르는 듯 주위가 고요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고, 멀리 낯선 금성산이 보였다.
“모습이 신기하죠? 아주 옛날에 화산이였대요. 모두 자고 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산 처럼 보통의 산들과 많이 달라요. 푸른 털 옷 입힌 바위 같죠? 형제도 없는지, 저렇게 뚝 떨어져서는..그래도 별로 외로워 보이지 않죠?”
“여기는 결혼 하시고 오신 거예요?”
“결혼 안 했어요. 아이들 때문에 결혼 했다고 얘기해요. 오빠랑 언니 아이들이예요.”
“시집도 안 간 분이 어떻게 아이들을 키워요?”
“키워요. 오빠랑 언니, 저, 우리 모두 같은 고아원 출신 이예요. 고아원 나와서 힘들 때, 언니랑 오빠가 도와줬어요.”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을 마을 같았어요. 큰 뜰에 햇살이 앉아 있는 것 같이, 여기 드러 누워도 타지 않겠구나, 살갗이 벗겨지지 않겠구나 싶어서, 들어 왔어요.”
“오빠 부부가 참 복도 많으시네요.”
“복 없어요. 복이 많았다면, 먼저 가지 말았어야죠.” 여자는 백태가 든 자루 입구를 틀어 쥐었다. 그 때였다. 앞서 가던 진유가 뒤를 돌아 보며, 여자를 찾았다.
“진영 좀 봐. 우이쒸 - 또 뛰어!”
“오빠 잡아!”
여자가 뛰기 시작했다. 진유도, 은미도 뛰기 시작했다. 도리깨와 자루가 여자들 사이에서 혼비백산하고 있었다. 진영은 뒤도 안 돌아보고, 학록정사를 지나, 소우당으로 들어갔다.
소우당은 ㄷ자형의 평면의 구조였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일자형의 문간채가 있었다. 처마의 그늘 속 서늘함에서 계절이 느껴졌지만, 그 앞 볕을 쬐고 있는 파란 잔디에 온기가 돌았다. 서쪽으로는 별도의 담장을 돌려 공간을 만들었는데, 원림이라고 했다. 거대한 정원은 숨쉬고 있었다. 지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기대했다면, 기대보다 더 보이고 들리고, 스스로 가눌 수 없는 마음이 미끄러져 달리는 곳이였다. 중앙에는 별당이 있었고, 별당의 남쪽으로는 연못과 수림, 시간을 세워 둔 듯한 돌보도가 질서 있게 연못 주위에 놓여 있었다. 흙은 훈훈했고, 단풍이 시작된 나뭇잎은 연못 위로 떨어져 뱅글거리며 물결을 따라 갔다. 단풍의 빨간 손이 몸을 부풀려 인사했다.
“누군가 아플 때, 오는 곳 같아요. 숨겨 놓고, 몰래 아픔을 치료하러 오는 거죠. 아주 오래 천천히 음미하듯 보고, 돌멩이 하나 풀 한포기 까지 마음에 새겨 두고 그래도 모자라서 다시 한 번 보고, 반 발짝도 못가서 또 돌아보고, 하나라도 더 마음에 새기게 되는 곳이예요. 아침, 점심, 저녁 모두 다른 모습으로, 정원은 여기 앉아 볼래? 나랑 있자. 내가 무등 태워 줄게. 라고 속삭이죠.”
정말 그랬다. 정원은 손님을 초대해 짓무른 마음을 보여달라고 했다. 원림 속에서 은미는 저쪽의 자신을 지웠다. 아이들은 돌다리를 건너, 소나무와 향나무, 모과나무를 지나고 있었다. 모과 몇 개가 쿵 하고 떨어졌다. 그 소리에 놀란 아이들이 돌다리 앞에서 서로를 보며 배를 잡고 웃었다. 시간을 눌러 납작하게 만들어 수목 위에 걸쳐 두고, 그대로 멈춰라. 이대로 멈춰라. 주문을 외운 딱새가 바람을 물고 날아올랐다.
은미와 여자는 정자에 앉았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연못 주위로 샛길이 나있었는데, 그 가로 나무로 만든 긴 의자가 순결한 향으로 몸을 씻어 반질거렸다.
“낯선 이의 발소리가 무섭지 않은 곳이예요. 모두 다 착해질 것만 같아요.”
툭툭 끊어지는 은미의 목소리가 자꾸 가라앉았다.
“내가 너무 못 된 걸 아니까. 그래서, 진영이가 여길 데려오나 봐요.”
여자는 깍지 낀 손을 앞으로 내 밀었다. 티셔츠 사이로 보이는 여자의 하얀 손목은 콩을 털던, 진유의 손목과 닮았다. 진유는 진영과 함께 연못에 조금 더 바짝 다가갔다. 사람의 발소리가 나자 잉어가 모여들었다. 진영이 놀라 진유 뒤로 숨자, 아이들은 다시 깔깔 거렸다.
“진유가 돌이 지났을 때, 언니와 오빠가 뺑소니 사고가 났어요. 겁이 나고 무서웠어요. 산에다 언니 오빠 묻고 오는데, 여기서, 진유가 제게 ‘엄마’라고 했어요. 오빠의 눈과 언니의 머리칼을 가진 진유가 제게 엄마라고....그걸로 됐다고 생각했어요.”
여자는 후루룩 쏟아 내고, 한숨이 길었다. 은미는 여자를 정면으로 바라 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다시 연못 속의 잉어들이 인기척이 나는 곳으로 모여들어 파닥 소리를 냈다. 아이들은 여전히 그림책 속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별당 쪽으로 가던, 진영이 무언가 발견하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사람들의 소원이 쌓여있었다. 작은 돌탑이 나란히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마음이 아무리 사나운 사람이라도 이곳에 오면 한번도 본 적 없는 타인의 소원을 이뤄달라고 기도하고 싶은 곳이였다. 마음이 아무리 뭉쳐 있어도, 한 번에 한 번씩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이곳에서는 숨을 실실 흘려보낼 것 같았다. 하루의 어느 때, 일 년의 어느 때, 어쩌면 평생의 어느 때라도 단 한 순간 진심으로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순결하고 순정한 마음을 모아,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온기를 가진 곳이였다. 은미는 정원에 오래 몸을 비비고 싶었다.
“진영이 울어요. 무서워요.”
한밤중의 진유의 전화 였다. 수화기 넘어서 진유가 울고 있었다.
“엄마는?”
“엄마가 눈을 안 떠요. 언니, 무서워요.”
“진유야. 언니 말 잘 들어. 언니 금방 갈테니까. 구급차 불러. 그리고 빨리 병원에 가.”
“언니, 무서워요.”
“진유가 무서워하면, 엄마도 진영 오빠도 무서워 할꺼야. 그러니까, 진유가 슈퍼맨처럼 씩씩하게 엄마, 오빠 곁에 있으면 언니가 금방 갈게. 알았지?”
은미는 마음이 급해졌다. 진영은 의자에 누워 자고 있었고, 진유는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은미를 보자 큰 눈에서 눈물이 툭툭, 진유의 신발로 떨어졌다. 숨이 가빠서 말도 제대로 잇질 못했다. 의사는 진숙이 뇌혈관에 이상이 생겼다고만 했다. 수술 후 당분간 입원치료가 필요하다고 하다고 짤막하게 덧붙였다.
“엄마가 좀 자야 한 대.”
은미는 무릎을 접어, 진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크고 쌍거풀 진 눈에 눈물이 그득했다. 진유는 온 몸이 파리해져 시들거렸다.
“진유가 말을 안 들어서요? 두부 이제 안 먹을께요. 엄마가 진영 오빠랑 진유에게 두부 만들어 주고, 언니 오면 두부 줄려고, 맨날 일했어요. 언니가 안 오니까 엄마가 갖다줄려고...엄마..”
진유가 다시 울었다.
“엄마가 언니한테 간다고 했었어?”
“언니가 우리 집에 와서 두부가 맛있다고 백번이나 말했잖아요. 너무 맛있어서 집에 가기 싫다고 했었잖아요. 그래서 엄마가 언니랑 먹을려고...”
‘미안해, 진유야.’ 은미는 진유를 끌어안았다.
진숙의 부재로 진영은 앓기 시작했다. 진숙 곁에서 침을 흘리거나, 먹는 것을 거부했다. 병원에 있는 진영은 소리를 잃었다. 신발을 끌며 걷지도 않았고, 크게 트림을 하지도 않았고, 뭐가 필요하면 진유를 조용히 바라봤다. 수척해진 진영는 옷과 몸이 따로 놀았다. 걸을 때 마다 자리를 잡지 못한 진영의 붉은 체크 무늬 남방이 펄럭거렸다. 그 사이로 들배가 겹쳐졌다. 들배도 어딘가에서 이런 네온빛이 나는 옷을 펄럭거리고 있을 것이다.
“오빠, 내가 껌 줄까?”
진유가 주머니에서 판박이 껌을 꺼냈다. 진영이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리와인드 되는 비디오 테잎 같다. 진유는 껌을 건네고, 진영이 껌을 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진영의 눈이 무심하다. 허공으로 고정시킨 진영의 눈 속이 궁금했다. 들배도 8살때는 저런 눈빛을 가졌었다. 은미가 요구하면 무엇이든 순선하게 응하고 대답을 해줬었다. 들배는 어렸을 때 어디든지 은미를 데리고 다녔다. 다섯 뼘이나 큰 형들을 쫓아다닐 때도 이제 겨우 균형잡고 걸어다니는 은미의 손을 놓지 않았다. 들배는 은미 때문에 번번히 뒤쳐졌다. 천방 둑을 오르지 못하는 은미를, 엉덩이를 밑에서 받쳐 올렸다. 은미가 잘 올라가지 못하자. 땀을 뻘뻘 흘리던 들배가 ‘은미야 올라가면, 오빠가 알껌 줄게.’ 했었다.
진영에게도 달큰한 알껌 냄새가 났다. 껌은 진영의 입에서 분홍색의 단물을 녹여내고, 허옇고 뿌연 몸체를 이리저리 뒤틀고 있을 것이다.
“진영아”
진영이 은미를 돌아 봤다.
“나도 껌.”
진영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고, 진유를 본다.
“그거 하나 밖에 없어요,” 진유가 울듯 한 얼굴이다.
“괜찮아.”은미가 웃고 말았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그 무엇에도 견고 한 엄마의 품 속, 절대적이고 깊은 평온이 그리웠다.
“우리 잠깐 나갔다 올까?”
따뜻했지만, 바람이 불었다. 누런 벼들이 이리 저리 흔들렸다. 빨간 고추가 장단을 맞추고, 모과가 무심하게 익어갔다. 괘액. 진영이 모처럼 소리를 내더니, 뛰기 시작했다. 소우당으로 들어가더니, 연못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입에 있는 껌을 빼서, 연못에 씻었다. 헐덕거리며 뛰어온 은미에게 씻은 껌을 내밀었다.
“그게 마음에 걸렸었어?”
은미는 껌을 받아 들고 입안에서 우물거린다. 팍팍하고 질긴. 아무 맛도, 아무 향도 나지 않는 껌은 질긴 고무 같다. 물에 씻겨 딱딱하게 굳은 껌을 푸느라 열심히 씹었다. 다시 껌이 진유의 손에서 처음 떠나온 단물 가득한 껌처럼 살아났다. 은미는 아이들을 끌어당겼다. 진유의 손을 잡은 진영이, 은미의 손을 잡았다. 폭신하고 따뜻했다. 은미는 천천히 돌탑에 돌을 얹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허공을 나누고, 솟구치더니, 돌탑 위에 앉았다. ‘마음을. 놓으세요.’
- 글쓴이 : 이선아
- 1977년생, 숭실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글 쓰고 책 읽기를 매우 좋아하며, 영화관에 혼자 가는 것을 즐긴다. 글 쓰는 직업을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있다. 현재 안동 MBC에서 구성 작가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