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백소애_쑤세미의 골방에서 만화읽기]슬비와 푸르매의 청춘스케치 〈인어공주를 위하여〉
- 백소애(cultureline@naver.com)
슬비와 푸르매의 청춘스케치 〈인어공주를 위하여〉
나는 X세대다.
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대학교를 다녔고 대장 서태지의 컴백을 손꼽아 기다렸던, 90년대 신세대를 규정하는 그 X세대 말이다.
‘삐~삐리리리’로 접속하는 PC통신 천리안을 쓰다가 인터넷 이용자의 절반 이상은 가입했을 한메일 계정을 가지고 인터넷 세대가 되었으며, 지금의 20대는 모를 교련과목도 배웠다. 모바일로 웹툰을 보는 것이 대세인 시대지만 지금도 만화책은 역시나 골방 아랫목에서 수십 권씩 옆에 쌓아두고 읽는 것이 제대로 된 만화 읽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옛날사람’이 어느덧 되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보물섬》, 《르네상스》, 《댕기》, 《하이센스》, 《윙크》, 《아이큐 점프》 등 만화잡지의 춘추전국시대를 살아온 우리 세대에게 ‘만화’는 단순한 오락거리를 넘은 문화콘텐츠였다.
학창시절 순정만화는 학원물이 대세였다. 시대극이나 외국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 아닌 또래들의 이야기에 소녀들의 판타지를 넣은 학원물은 큰 기복 없이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 그중 이미라의 〈인어공주를 위하여〉가 단연 화제였고 인기였다. 전학생이 새로운 도시에서 친구들을 만나면서 시작되는 전통적인 학원순정물의 구조에 꽃미남 반항아가 등장하고 마지막에는 눈물을 쏙 뽑는 내용까지 담아내고 있으니 어찌 소녀들이 열광하지 않으리. 게다가 꽃미남 주인공은 아름다운 ‘백장미’보다 평범한 ‘이슬비’를 사랑하는 내용이니 하루가 멀다하고 나는 여드름에 골머리를 앓는 여고생들에게 이보다 더 멋진 스토리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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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집 막내딸 이슬비는 1989년 봄, 푸른고교로 전학을 오게 된다. 전학 온 학교에서 온화하고 아름다운 백장미와 친구가 된다. 둘은 자신의 첫사랑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데 이슬비는 ‘푸르매’라는, 백장미는 ‘서지원’이라는 남자친구가 있다. 그러나 사실 이 둘은 이름만 다를 뿐 동일 인물이다. 멋진 남자친구의 등에 기대어 오토바이로 질주도 해보고 반항아를 “그만 둬”라는 내 말 한마디로 잠재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도 했던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래봤자 시내를 걸으며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나 하는 또래 남학생들에게 실망하기 여사였지만.
이 작품은 〈호두나무가 있는 풍경〉이란 제목으로 만화잡지에 연재하다가 중단되고 이후 〈인어공주를 위하여〉(도서출판 창만사, 전12권) 란 단행본으로 재탄생한 작품이다. 푸르매의 등장으로 소녀들을 열광시킨 만화가 이미라는 거주지가 대구여서 대구의 풍경을 만화 속에 자주 담아내곤 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일부러 달성공원과 두류공원을 가본 적이 있다. 아마도 푸르매처럼 멋진 남학생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꿈에 부풀었던 모양이었으나 당시 유행했던 돌청을 입은 농띠들한테 걸려 눈썹이 휘날리게 도망쳤던 기억이 난다. 한동안 푸르매는 당시 우리들에게 꽃미남의 상징이 되곤 했다. 오래전 삶을 마감한 ‘내 눈물 모아’로 유명한 가수 서지원도 〈인어공주를 위하여〉의 팬이어서 ‘서지원’이라는 예명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슬비를 비롯한 백장미, 푸른고교 3대 명물인 조휘인 · 조종인 쌍둥이 형제와 서지원(푸르매), 만화가 아빠에게만 천사같이 다정한, 히틀러를 연상시키는 폭군 엄마와 서지원의 동생 서지수 등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대부분 유쾌하고 예쁘게 진행되지만 그 속에는 폭력, 유괴, 죽음도 다뤄져 있다. 따뜻한 그림체처럼 시종일관 밝은 내용으로 갔더라면 차라리 유쾌한 순정물이 되었을텐데 무거운 내용을 다루게 되면서 뒷심이 부족한 작품이 되어 아쉽기도 했다. 그럼에도 〈인어공주를 위하여〉는 당시 찾아보기 힘든 학원순정물에 코믹함까지 더해져 코믹순정물의 바이블처럼 순정만화팬들에게 지금까지 회자되는 작품이다. 이후 이미라 작가는 이슬비와 푸르매, 백장미, 조종인 등을 까치와 엄지처럼 고유명사화된 캐릭터로 만들어 〈늘 푸른 이야기〉에 등장시키기도 한다. 다리를 다친 백장미와 다리를 얻는 대신 목소리를 잃는 인어공주의 연관성을 굳이 찾는다면 〈인어공주를 위하여〉는 마지막에 가서는 백장미에 대한 임팩트가 여주인공 이슬비보다 더 강한 것이 사실이다. 천방지축 말괄량이에 해맑은 이슬비가 초반의 매력을 되찾고 순정만화 특유의 풋풋함이 되살아났더라면 더욱 완성도 있는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당시 만화가 이미라에게 팬레터를 보낸 적이 있다. 집안 깊숙이 어딘가에 답장이 있을 것이다. 뜀틀을 넘는 푸르매를 보는 백장미의 눈이 하트가 되어버린 그림에는 ‘성원에 고맙다’라는 이미라의 친필 답장이 있었다. 그걸 받고 얼마나 감격했던지, 책받침처럼 코팅 해놓으려다가 그것까지는 오버인 것 같아서 관뒀었다. 푸르매의 반짝이는 눈빛만으로 소녀들의 가슴을 뛰게 했던 착하고 풋풋한 만화 〈인어공주를 위하여〉. 지금도 내 방 책장에 나란히 꽂혀 있는 낡은 표지의 이 책은 개정판이 나온다고 해도 다시 구입할 용의가 얼마든지 있다.
쌀쌀한 이때, 뻥튀기 한바구니 담아놓고 옛 만화를 읽어보자. 뻥튀기 맛보다 더 고소한 아날로그 세계가 반겨줄 것이다. 수업시간에 순번을 정해 돌려보고 대본소 구석에 앉아 읽고 집으로 빌려와 읽었던 만화책. 때론 굳은 코딱지에, 때론 찢겨나간 장에 분개하기도 했지만 현란한 웹툰보다 더욱 시선을 끄는 ‘종이책’의 매력에 빠지기 좋은 계절이 왔다.
인어공주를 위하여(총12권)/ 이미라/ 1990년/ 도서출판 창만사
- 글쓴이 : 백소애
- 강원도 태백 출생. 아이큐는 낮지만 머리가 좋다고 굳게 믿고 있음. 변덕이 심하고 우유부단하나 따뜻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조카들에게 헌신적이며 인간성 또한 좋다.....고 믿고 있다. 학생 때 교무실에서 밀대자루로 바닥 밀면서 은밀히 훔쳐본 생활기록부에는 ‘예의 바르나 산만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한참을 갸우뚱 하다가 담임이 수학선생님이었기에 그냥 이해하기로 함. 다소 후진 취향을 지니고 있으나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쓸데없는 걱정과 호기심이 많음. 같은 계획을 몇 년째 하고 있으며 역시나 올해도 다이어트와 앞머리 기르기에 도전할 생각이며 과메기에 없어서는 안 될 다시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 웹툰도 괜찮지만 만화책은 역시 종이책으로 보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날로그 건어물녀. 좋아하는 것은 무한도전, 오뎅으로 만든 떡볶이, 삼겹살에 매실소주, 비오는 날, 생활의 달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괴짜가족 류의 저질유머. 비 오는 날 무한도전 틀어놓고 배 깔고 누워 만화책 보면서 빈둥거리며 사는 것이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