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컬처라인_마을이 있는 풍경]빙계계곡을 찾아서
- 권기남(cultureline@naver.com)
- 빙계계곡(氷溪溪谷)을 찾아서 -
흙의 온기(溫氣)로서 나무를 키우고
돌의 냉기(冷氣)로서 지기(地氣)를 다스리다
길섶의 이름도 알 수 없는 풀꽃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제 각각의 아름다움과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일부러 이름을 들먹여서 꽃말을 붙이지 않아도 제 모습 자체가 곧 꽃말이 될 것 같은 작고 보잘 것 없는 꽃들이 있다.
그렇다. 우리 일상 속에서 소소하게 넘기고 잊어버리기 쉬운 일들이 많은 것처럼 너무 자주 봐서 아니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빙계도 그렇다.
며칠 전 집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빙계(氷溪) 계곡(溪谷)을 시를 쓰는 친구와 함께 찾았다.
흔히 힐링이 되는 관광지라고 하면, 사람들은 산이며 들이며 집채만 한 짐보따리를 거북해 하지 않고 찾아 나선다. 그 남부여대(男負女戴)의 대열로 인해 고속도로가 정체되고 좁은 시골길마저 주말이 되면 흙먼지가 가득할 정도다.
그러다보니 될 수 있으면 적은 비용으로, 본전 생각나지 않는 이름난 곳으로 멀리 떠나는 걸 여행의 최고 조건으로 친다. 그 여행조건에 맞지 않아서였는지 바로 코앞에 있는 빙계계곡을 치지도외(置之度外)하고 지낸 셈이다.
내가 아는 빙계는 멀리 외지에 나가 사는 사람들이 여름휴가를 이용해서 찾아오는 곳, 아니면 의성지방이 고향인 사람들이 고향을 찾은 김에 잠깐 들러보는 골짜기 정도였다. 내 주머니 속의 여의주를 몰라보고, 10년 시집살이 끝의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성을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인 경우라 하겠다.
마음을 내어 찾은 빙계는 일부러 경북의 8승(慶北之八勝)을 끌어다가 앞장을 세우지 않아도 너무 많은 구경거리와 이야깃거리를 감추고 있었다. 다만 ‘소문이 나지 않아서, 너무 산속 깊이 들어 앉아 있어서 사람들이 다 모르기 때문’이라고 동행한 시인은 말했다. ‘다른 곳에 아마 이런 절경이 있었다면 빙계계곡이 지금처럼 이런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사람들의 손을 덜 타서 그 신비로움이 더하기도 하지만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아서 내방객들의 편의시설과 주변 시설이 좀 부족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번 시인 친구와의 동행은 시인의 눈으로 본 빙계의 또 다른 이야기를 시로 표현해 보고자 하는 속셈으로 재촉해서 나선 길이었다. 맛깔스런 그녀의 시가 더해진다면 아마 빙계의 여름소식이 더욱 풍성해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작은 솔기까지 뒤집어가면서 찾아 본 빙계는 역시 최고의 피서지로서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빙계는 숱한 역사의 자취를 감추고 있는 신비의 골짜기요. 기적의 휴양처였다.
위로는 흙의 온기로서 나무를 키우고 아래로는 돌의 냉기로서 지기를 다스리는 신비의 골짜기, 빙계의 여름이야기를 이제부터 시작해 보려 한다.
빙계(氷溪), “얼음골짜기” 그 이름만으로도 시원함이 전해지는 지명이다.
◇ 빙계서원(氷溪書院)
계곡 입구 주차장을 돌아 작은 다리를 건너면 빙계서원이 있다. 빙계서원은 원래 빙산사지 5층석탑이 있는 빙혈 근처에 있었는데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복원을 해 놓은 건물이다.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형태로 사당인 숭덕사(崇德祠), 강당인 명교당(明敎堂), 동재인 학이재(學而齋), 서재인 시습재(時習齋)를 비롯하여 공수청, 빙월루(氷月樓)[누각, 서원의 출입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교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명교당 앞에 자리 잡은 학이재와 시습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온돌방으로 방을 한 칸 내고,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넓게 낸 것이 특징이다. 특히 숭덕사와 명교당 하부기단에는 통풍을 위해 기와 두 장을 마주 붙인 형태로 완전히 건물 전후가 통하도록 통풍구를 만들어 놓은 게 눈에 띄었다. 기둥부분에는 삼각모양의 통풍구가 설치되어 있어 목조바닥으로 지어진 건물 밑면이 골고루 바람이 잘 통하게 하여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장경각의 원리를 이용한 것 같았다.
학이재 옆에는 담장을 쌓아 별도의 부속 건물을 두었는데 공수청(公需廳)과 전사청(典祀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양쪽으로 방을 두면서 마루를 앞으로 내었다. 좌측 방과 마루 틈새에 창고의 역할을 하는 건물을 배치시켜 독특한 모습을 보인다. 숭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빙계서원(氷溪書院) 사당 안에는 김안국(金安國)[1478~1543]·이언적(李彦迪)[1491~1553]·김성일(金誠一)[1538~1593]·유성룡(柳成龍)[1542~1607]·장현광(張顯光)[1554~1637]·이광준(李光俊)[1531~1609] 등 6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현재 빙계서원에는 ‘빙계서원(氷溪書院)’, ‘숭덕사(崇德祠)’, ‘명교당(明敎堂)’, ‘학이재(學而齋)’, ‘시습재(時習齋)’, ‘빙월루(氷月樓)’, ‘공수청(公需廳)’, ‘전사청(典祀廳)’ 등의 현판과 「빙계서원기(氷溪書院記)」 등의 기문이 있다.
빙계 서원에서는 정기적으로 석전대제(釋奠大祭)가 행해지고 있으며, 근래에는 고가 음악회 '전통과 현대의 만남, 고가에서 만나는 Happy Concert’를 개최한 바 있다.
어디를 가도 서원건물은 고풍스럽고 위엄이 있으면서 늘 현실과 동떨어진 과거의 모습으로 내방객을 맞이하고 있다. 빙계서원도 마찬가지겠거니 하면서 명교당 마루에 올라 섰더니 정면의 현판아래 한지에 써 붙여놓은 숭덕사(崇德祠) 을미향사집사(乙未享祀執事)표가 붙어 있었다. 거기에는 평소 안면 있는 이들의 이름도 눈에 들어왔다. 유일하게 과거와 현재의 이음새 역할을 해 주고 있는 증거물이 되어 주는 그 흰 종이가 왈칵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서원이란 과거로부터 늘 잠들어 있는 터전이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이렇게 모여 옛 선조들의 얼을 기리고 추앙하는 제사를 모시고 있구나 생각하니 역사라기보다는 인연(因緣)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르게 하는 곳이었다.
◇ 빙산사지 5층 석탑 (氷山寺址 五層石塔)
경상북도의 8군데 아름다운 경치 가운데 하나인 보현산 줄기 빙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빙계계곡의 초입으로 자리를 옮겨서 복원된 빙계서원의 원래 자리이기도 하다. 지금도 탑 앞에는 옛 빙계서원의 지붕을 덮고 있던 기왓조각들이 널려 있다. 이 탑은 돌을 벽돌 크기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으로 탑리리 오층석탑(국보 제77호)을 모방한 듯이 유사한 형태로서 1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 돌은 16개의 돌로 이루어졌다. 기단의 가운데 돌은 기둥과 면을 이루는 석재를 딴 돌로 하여 15개의 돌로 구성하였다. 기단의 맨 윗돌은 8개의 돌로 되어 있고 그 위로 탑신을 받치기 위해 괴임을 높게 얹었다. 탑신부를 보면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딴 돌로 모서리기둥을 세우고 정면에 네모진 공간을 마련해 놓았는데 이 공간은 불상 등을 모셔두는 용도로 쓰였다. 2층 이상부터 몸돌은 그 높이가 1층에 비해 반 이상 줄었으며, 5개의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4단씩이다. 지붕돌의 경사진 면은 각 5단의 층으로 이루어졌다.
정상의 머리장식부분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만 남아 있다. 탑의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 사이로 추정된다. 탑리 오층석탑에 비하여 격이 떨어지나 모전석탑으로서 아름다운 작품이다.
뜨거운 한낮
고즈넉한 마을에서 만나 뵈었네
아득히 멀고 먼 길
홀로 걸어오신 부처님
텅 빈 부처님
내 눈을 감기게 하네
감긴 내 눈 강이 되고
바다가 되고
그 속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바람이 들어오고
별이 들어오고
노을이 들어오고
이윽고 땅이 하늘을 안고 들어오고
바다에 누운 내 눈 허공이 되고
허공이 눈이 되고
탑이 되었네
만다라 꽃 비 되어 내리네
김금숙 「빙산사지 오층석탑」
이 탑에서 아쉬운 점은 감실바닥에 있던 부처님 좌대가 복원 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빙혈에서 풍혈로 올라가는 계단입구 벽면에 부조처럼 붙어있는 것이다. 일제 치하 부처님을 도굴해 간 것으로 일제가 무단으로 우리 문화재를 약탈해간 식민지의 억울한 폐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야 하는데 감실 안에 있어야 할 부처님 좌대가 왜 빙혈 벽면에 붙어 있어야 하는지 궁금함이 결국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래서 문화재의 해체와 복원은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1973년 해체해서 복원한 빙산사지 오층석탑 3층 지붕돌 속에서 발견된 금동사리 장엄구는 불교박물관에서 보관을 해오다가 최근에 대중에 공개되고 있다. 의성 조문국박물관에서 연 “의성의 불교문화‘특별기획전의 전시물중의 하나로 주목을 받고 있다. (6월 23일부터 9월 20일까지) 빙산사지 오층석탑을 돌다보면 주위에 흩어진 기와조각들이 세월의 무상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조각마다 다른 무늬를 이루고 있는 검은색의 손바닥만 한 기와 한 조각을 주워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득한 옛 사람들의 손길이 어른거린다. 이렇게 세월의 징검다리를 타고 탑은 오늘까지 우리 곁을 지키며 서 있고 빗살무늬 기와 조각은 흘러가는 세월에 빗금을 치고 있었다.
◇ 풍혈(風穴)
빙계서원을 지나 아치형 다리를 건너면 작은 암자 대흥사(구 빙산사)가 나온다. 평일 날 마을에 지나다니는 행인의 숫자 보다 많은 여덟 분이나 되는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작은 절에는 인기척도 없이 부처님들끼리 절을 지키고 있었다. 요사채 건물 벽면에 큰 바위가 그대로 기대고 있는 암자를 자연석으로 쌓은 돌담이 둘러치고 있었다.
몇 발자국 올라가면 그때부터 발등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든다. 바로 옆 돌 틈 사이마다 흘러나오는 냉기 때문이다. 바위구멍마다 서늘하게 흘러나오는 냉기는 빙산사지 빙혈과 풍혈까지 이어지는 신비의 구간이다. 좀 더 큰 바위 틈에는 더 서늘한 바람이 흘러나오고 딱 그 크기만큼의 냉기를 내뿜는 바람은 빙계계곡의 원래 숨결이다.
두 눈 감고
텅 빈 허공에
마음이며 몸을 탁 널어놓고 싶을 때
그때 딱 그때쯤
가야 하는 곳
얼음 같은 마음 부수고
바위 같은 마음 부수고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동안 부순
허공의 맛을
만나야 할 때 그때쯤
가야 하는 곳
그 때쯤이면 오장육부 저 끝까지 시릴
꿈속에서도 못 만나 본
세상 밖의 서늘함에 그대
두 번 다시 뜨거움에 허덕이지 않으리
김금숙 「빙계계곡」
20여 년 전만 해도 이 큰 바위틈은 온통 수박장사들의 차지였다. 아침 일찍 손수레에 가득 수박을 싣고 와서는 냉기 가득한 바위틈에 여투어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팔던 기억이 새롭다. 저녁이 되면 그 앞에 돗자리 하나씩을 들고 아랫마을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와서 둘러 앉아 수박을 쪼개 먹던 풍경이 아득하다.
지금은 훼손을 막기 위해 보호시설을 해 두고 있어서 큰 바위 틈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여러 개의 작은 풍혈들과 열병 사열이 끝날 지점에서 좌측 산길을 오르면 빙산사지 5층모전석탑이 나오고 그 다음 오솔길을 따라가면 풍혈이 나온다.
빙계의 수많은 바람구멍 중에 가장 으뜸인 작은 동굴 수준의 풍혈은 빙혈의 지붕이 되는 지점에 있다. 그 풍혈 앞은 어떤 더위도 감히 맥을 못 추는 천연 냉장고와 마주하게 되는 곳이다.
◇ 빙혈(氷穴)
풍혈에 올라가기 전 바로 아랫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빙혈은 문자 그대로 얼음구멍이다. 오뉴월 더위가 무색하리만치 한기를 느끼게 하는 입구를 들어서면 하얗게 얼음이 얼어붙어 있는 작은 빙벽을 만나게 된다. 지금은 훼손과 온도 유지를 위해 작은 유리문으로 가림막을 해 놓은 상태이다. 하지만 이 더위에 그 유리문이 대수일까? 여전히 빙혈은 바깥의 더위를 외면한 채 겨울을 안고 있는 것이다.
어떤 자연의 이치를 끌어다 붙여도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이 자연경관을 보지 않은 이는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는 불가사의에 가까운 전경이다.
기적의 골짜기를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는 아무도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30도를 넘어가는 무더위 속에 아직도 얼음이 존재하고 있다는 이 현상을 현대과학은 어떻게 설명할까 싶다. 가장 근접한 학설을 인용하자면 온통 바위로서 만들어진 산이므로 냉장고의 원리를 대입시키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아직도 이 빙계 계곡의 내막을 속 시원하게 풀어내는 정확한 학설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전설이 더 가깝게 다가오는 지도 모른다.
이 자연의 신비함을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풀어낼 수 없으므로 바람과 얼음을 뿜어내는 산의 속내를 전설로 담아내고 있다. 그 산속의 미로는 결국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이래서 인간의 힘으로 풀어낼 수 없는 이야기들은 전설로 이어지는 모양이다.
빙계(氷溪)의 숨은 이야기 『요석공주와 원효대사 사랑이야기』 신라 무열왕의 둘째따님인 요석공주가 젖먹이 아들 설총(薛聰)을 데리고 지아비 원효대사를 찾아 이곳 빙산원(氷山院, 빙계계곡의 옛이름)에 이르렀을 때는 유월염천 유두(流頭)가 막 지난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공주일행이 서라벌을 떠나 보현산을 거쳐 조문국(召文國, 지금 의성군 금성면) 경내에 다다르자 궁궐터와 임금이 쓰시던 우물인 어정(御井)이 있었다. 동네어귀에서 원효대사의 거처를 물었더니 빙산사 빙혈(氷山寺 氷穴) 속에 기도하는 이상한 스님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빙혈을 지나면 찬바람이 씽씽 불어나오는 풍혈(風穴)이 있는데 얼마나 깊은 지는 아는 사람이 없소, 그 끝이 저승까지 닿았다고도 하지요.」 공주는 좁은 굴속을 더듬더듬 기어 들어갔다. 이리 꼬불 저리 꼬불 몇 굽이를 지나 얼마나 들어갔는지 몰랐다. 점점 추워졌다. 공주는 전신이 꽁꽁 어는 듯 하였다. 발이 미끄러지는 곳은 얼음판이었다. 얼마를 들어갔을까? 굴이 넓어졌다. 허리를 펴고 팔을 둘러도 거칠 것이 없다. 공주는 크게 소리쳐 불러 보았다. 굴속이 웅하고 울렸다. 울리는 소리가 마치 큰 쇠북 마지막 소리 모양으로 길게 꼬리를 끌다가 쓰러졌다. -춘원 이광수 작, ‘원효대사(하)’ 중에서- 춘원의 소설 속 이야기처럼 먼 옛날 이 계곡은 거대한 동굴(洞窟)이었다고 한다. 대지진으로 동굴이 무너지면서 풍혈(風穴)·빙혈(氷穴)구멍이 지금같이 좁아졌으나 보이지 않는 지하는 어떤 영상을 하고 있을는지 신비하기만 하다. 2006. 12
「아바아(여보)!」,
빙계계곡 역사·문학 연구보존회
이렇듯 애절한 전설이 살아 있고 여름에도 발이 시린 빙산자락의 계곡은 그 아래에 조그만 마을을 함께 품고 있다. 빙혈과 풍혈을 돌아보고 빙산사지 오층석탑 근처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빙계를 지키는 작은 마을인 빙계리 고샅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 마을길을 내려오다 보면 “주인 없음”을 그대로 전해주는 퇴락한 촌가 몇 채가 농촌의 현주소를 일러주고 있었다.
불가사의한 자연조건과 기품 서린 문화유적을 품고 사는 마을도 이렇게 늙은 촌부들과 함께 퇴락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발꿈치가 묵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을 바로 옆에는 아치형 무지개다리가 빙계계곡을 내려다보고 있고 몇 발자국 올라가면 오토캠핑장이 새 마을을 차리고 있는데 빙계 마을은 아직도 그냥 촌로들이 지키는 촌락이었다. 어찌 보면 순박함이 살아있는 원래의 시골마을이지만 문화유적지를 품고 있는 마을치고는 좀 더 멋을 부려볼 만도 하다 싶은 욕심이 슬그머니 일어나기도 했다.
내려오는 길, 아직도 길가 바람구멍에는 냉기를 머금은 하얀 김이 나그네의 발목을 어루만지며 작별인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 작을 바람구멍들이 끝없이 미로를 이루고 있을 산의 속내를 그려보노라니 한때는 이 빙계의 주인이었던 역사 속 선인(先人)들의 목소리가 공명이 되어 우렁우렁 들려오는 듯했다. 바위가 토해내는 서늘한 입김이 그냥 자연현상이기 이전에 한 자락 이야기로 더 다가오는 건 왜일까?
- 글쓴이 : 컬처라인
- 경상북도 북부권 11개 시군의 문화예술 관련 정보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