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황구하_시로 거니는 상주]느릿느릿 설렁설렁
- 황구하(guha3049@hanmail.net)
느릿느릿 설렁설렁
모란이 활짝 오셨습니다. 올봄엔 무슨 허기가 그리 많은지 첫 꽃을 찾아 여기저기 많이도 돌아다녔습니다. 봄까치, 매화, 노루귀, 복수초, 바람꽃, 얼레지 등을 만나기 위해 산으로 들로 누비고 다녔지요. 그러다 보니 집 근처 골목엔 어느새 명자, 박태기 떠나고 이팝나무, 수수꽃다리, 모란까지 돌아왔습니다.
점심때쯤 함창버스정류장 앞에서 할머니 두레집 봉사를 마치고 나온 이숙 씨, 현옥 씨, 순덕 언니와 만났습니다. 현옥 씨가 “함창예고을 금상첨화” 마을미술프로젝트 오픈하는 날 시간에 쫓기어 못 보았던 곳을 둘러보면 좋겠다 했지요. 나 역시 예술의 거리, 그 골목이 벌써 며칠째 짠하게 궁금했거든요.
가야마을로 들어서는 입구, 청년 조각가 정의지의 작품이 우뚝 눈에 띄는데요. 엽전 모양으로 서 있는 조형물엔 모심기, 곶감 말리는 모습, 가야왕릉, 우물터 등 아이 웃음소리 뛰노는 사람살이의 풍경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엽전’이라는 이름은 만드는 과정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나뭇가지에 잎사귀가 매달린 것 같은 틀에 쇳물을 붓고 굳으면 잎사귀처럼 매달린 돈을 똑똑 떼어낸다지요. 엽전을 지니면 행운이 온다는데요. 아이가 부유하고 넉넉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서 돌잡이 물건으로도 올려지지요.
짝짝, 손뼉 치고 주문을 외면 금방이라도 커다란 엽전이 떼떼굴 굴러 마음 머무는 곳에 집을 이루고 마을을 이루고 들을 이루고 내를 이루고 둥글둥글 산을 이루어 「거룩한 풍경」을 자아낼 것만 같습니다.
서기 42년 낙동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6가야 중 하나로 전해지는 전고녕가야왕릉(傳古寧伽倻王陵) 앞에서 마침 후손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1,500여 년간 구전되던 이 왕릉은 1592년 어느 날, 관찰사 김수와 함창현감 이국필 등이 ‘古寧國太祖伽倻王陵’이라고 음각된 묘비를 찾아내면서 비로소 이 능의 주인이 고녕가야의 왕이라는 걸 확인했다고 합니다. 왕릉에서 한참 떨어진 둔덕에 햇빛 환한 왕후릉이 있는데요. 둘 다 소박한 능역이지만 역사는 지금 여기 살아가는 현재인 동시에 미래라는 걸 숙연하게 일깨워줍니다.
그래서인지 구전과 설화 속에서 왕과 왕후를 걸어 나오게 하는 이창호 작가의 「가야의 혼」은 5령의 잠을 자고 훨훨 깨어나는 누에처럼 뭉클합니다. 떨어져 있는 왕릉과 왕후릉이 안타까웠는지 왕과 왕후를 상징하는 조형물 사이 물결처럼 길을 만들어주었더군요. 수령 250년 이상 되었다는 두 그루 회나무 사이 우물이 있는데요. 우물은 생명, 정화, 부활, 농경, 왕권 등을 상징하는 마을의 중심이고 성지입니다. 또한 만나고 소통하며 공동우물물을 마시는 사람들끼리 두레를 결성하여 함께 노동을 하는 삶의 공간이었지요. 이곳에서 지금도 동제를 지낸다고 하는데요. 우물을 화강암으로 다시 제작하여 그 생명의 물줄기를 잇는 것처럼 마을 사람들의 애환과 표정이 슬며시 다가와 발길 오래 머물게 합니다.
우물터 뒤편 빈집엔 정말 마을 어르신들 이야기가 도란도란 들려옵니다. 주민들의 누르스름한 사진과 때 묻은 물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데요. 있으면서 없는 것 같은 혹은 없으면서 있는 것 같은 샘골, 옹기골, 에제비, 갓골, 장터, 비석골, 세실, 양지마, 바탕골 등 바로 우리 마을과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순덕 언니는 “여기는 저절로 다 시구만.” 했고 이숙 씨는 “우리 언제 여기서 모임 한번 가져도 좋겠네요.” 했지요. 은행나무가 내려주는 그늘이 더 길어지면 그런 날이 오겠지요. 꼬박꼬박 졸면서도 앉아있고 싶은 쉼터는 맘 따뜻한 너름새가 묻어납니다.
골목 곳곳 빈집이 눈에 띄는데요. 빈집은 저마다 녹슨 사연이 먼지처럼 쌓이고 주인을 기다리다 허물어지는 벽과 주저앉은 담장 아래 풀이 무성합니다. 그중 한 빈집의 이야기는 가슴을 치게 합니다. 명주 짜는 일을 했던 부부는 바쁜 일과 중 자식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전국 방방곡곡 떠돌며 자식 찾아 헤매고 다니기를 수수 년, 끝끝내 찾지 못했다는데요. 그 부모 심정 오죽하겠습니까. 자식 없는 컴컴한 집에 들어가는 게 끔찍했답니다. 그래서 급기야 살던 집을 떠나게 되었다지요. 먹먹한 사연 어찌 이뿐이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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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점을 맞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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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몇 채의 빈집을 지나며 문득 함창이 고향인 김주대 시인이 떠올랐습니다. 김주대 시인은 얼마 전 문인화 전시회도 열었지요. “정갈한 시어와 고졸한 멋이 살아있는 그의 시화는 ‘문인화’에 속하지만, 그 틀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다. 서양화의 투시법을 도입하거나, 글자만으로 그림을 완성하고 공백을 과감하게 없애는 등, 틀을 깨는 참신한 시도로 문인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는 평을 얻으며 전시회도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그의 고향집에는 어머니가 사신다고 들었습니다. 김주대 시인이 어느 날 이곳을 거닐게 된다면 또 하나의 뜨거운 시와 그림이 펼쳐지리라 여겨집니다.
지역 주민의 집 한쪽에 세워진 김성석 작가의 「명주로드」는 새소리 날아드는 왕후릉을 바라보고 있는데요. 전통과 첨단 사이 속도에 함몰된 ‘나’를 응시하며 명주의 고장 함창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생동감 넘칩니다. 거대한 스틸의 이 작품을 작업할 때 잠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바람소리 차가운 한겨울이었지요. 일회용 봉지커피를 타주며 작가는 잠깐 손을 녹였는데요. 구름, 햇살, 산, 강 등을 바탕으로 사람의 무늬가 어우러짐을 이야기했습니다. 고예독왕(孤詣獨往)하는 것이 예술가의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제대로 읽어내고 사유하고 실천하는 치열한 정신을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그림 속에서 짚어봅니다.
1일과 6일 장이 서는 함창시장은 만남과 소통, 삶의 일상을 넘어 예술과 커다란 맥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주민과 고객, 상인과 예술가와의 혼연일체로 예술시장이 되고 있지요. 시장의 벽 곳곳에 과거 함창 주민들의 모습이 그려져 두루뭉술한 즐거움을 줍니다. 시장 천장에는 높낮이에 변화를 준 조형물이 설치되어 물결을 이루고 있는데요. 비단과 비단길로 이어지는 열린 시장의 이 조형물은 지역 주민들과 예술가가 함께 호흡하며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을 어르신들과 아이들의 작품이 마을의 기억과 소중한 추억이 될 만한 곳에 이정표가 되어 이끄는 것처럼 ‘함께’ 어우러짐이 흐뭇합니다.
함창지역 가장 큰 양조장이었던 ‘세창도가’에 이르면 양조장을 중심으로 한 술과 얽힌 마을 생활사와 에피소드를 볼 수 있습니다. 과거 세창도가 직원들의 숙소였던 곳에는 「김석환의 갤러리」가 채우고 있고 사무실은 「라온섬유갤러리」로 탄생했습니다. 명주로 만든 붉은 빛깔의 원피스가 하도 고와서 한 벌 입고 싶었습니다. 또 조각보가 흐느적일 때마다 엄마 냄새가 나는 듯해 공연히 눈시울 붉어져 큼큼거리기도 했지요.
이쯤에서 막사발에 봄 한잔 담아 마시고 싶어지는데요. 과거 술을 만들던 자리 이재형 작가의 「술, 시간 갤러리」는 술에 대한 추억과 상상이 실타래로 풀어지고 있더군요. 느린 움직임과 선율이 흐르는 설치물을 지주대 삼아 타고 오르는 풀은 마치 “나도 좀 봐주세요.” 하듯 절묘한 또 하나의 작품이었는데요. 양조장의 창고를 활용한 ‘술도가’ 허름한 벽 아래에도 민들레가 소복합니다.
골목 곳곳 자연석이나 벽면과의 교감을 통해 얼굴 형태를 그린 요아킴, 추이아의 작품처럼 무성한 풀과 꽃과 나무와 텃밭에 자라는 마늘, 감자, 보리 등속 모두 삶의 작품이지요. 쌓여있는 연탄재와 툭 던져져 있는 폐타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함창마을미술프로젝트는 앞으로 2, 3차 더 진행되어 예술의 거리가 더 운치 있고 풍요로워질 것 같습니다. 작업에 참여한 작가는 육근병, 오승환, 정의지, 양현진, 오유경, 김경아, 이창호, 최혜정, 김성석, 백용성, 이강준, 이재형, 고순정, 윤동환, 김승영, 박기진, 이미정, 신순단, 박남규, 김석환, 최정은, 요아킴, 추이아, 안경진, 이승원, 그리고 상주예총 등인데요. 그중 김석환 작가는 인연이 있음에도 오픈 날 처음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대전문학관 권미강 수필가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함창엘 가고 있는데 거기서 만나자는 거였습니다. 김석환 선생께서 벌써 한 달째 함창에 거주하며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했지요. 고녕가야왕국 그리고 주민들의 삶과 문화의 부흥을 기원하는 제의라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합니까. 전화를 받은 건 대전으로 달리는 버스 안이었지요. 무슨 운명처럼 친구는 오고 나는 가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김석환 선생님과의 만남이 더욱 반가웠지요.
세상은 빨라졌고 우리 골목은 아이가 사라지고 개 짖는 소리가 사라지고 자전거소리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러나 “담장 아래 새로 나온 풀들이 허리를 흔들고/봄날 한쪽에/아직은 이런 쩌렁쩌렁한 어린 노래의 골목이 있으니” 느릿느릿 설렁설렁 걸어볼 일입니다.
고대와 현대를 넘나들며 삶의 “노랫소리로 환하게 채워지는 골목”, 함창 예술의 거리는 무인역인 함창역에서 시작해도 좋고 마쳐도 좋습니다. 우리 삶의 강물이 흘러가는 곳 어디일까요.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한 함창역에서 느림의 우체통에 엽서 한 장 넣으며 발길을 돌립니다.
“꽃만 기다리는 사람에게 두메마을 봄풀을 보여주리.” 어느 선승의 깨우침처럼 역 앞 은행나무에 연초록 이파리 활짝 오셨습니다.(♣)
- 글쓴이 : 황구하
-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