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해문_아시아의 아이들 놀이를 찾아서]아이들의 살림살이 ‘소꿉놀이’
• 편해문 2015-04-06

아이들의 살림살이 ‘소꿉놀이’

안동에서는 소꿉놀이를 ‘혼잡’이라고 하고 전라도에서도 ‘바깜살이’라는 말을 쓴다. 소꿉놀이 또한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볼 수 있는 놀이중의 놀이이다. 어른들이 하는 살림살이를 진지하게 따라 하는 놀이가 소꿉놀이이다. 전라도에서 쓰는 바깜살이란 말은 안에서 하는 진짜 살림살이가 아니라 바깥에서 하는 꾸며서 하는 살림살이란 뜻이다. 소꿉놀이하면 아릿한 풍경 하나가 걸어온다. 볕이 드는 처마 밑이었을까? 아니면 따뜻함이 조금 남아 있는 굴뚝 밑이었을까? 잘 씻지도 않은 얼굴 서넛이 옹기종기 앉아 깨진 사금파리나 병뚜껑에 풀을 짓이겨 김치를 담고 솔잎을 가지고 밥을 짓고 국수를 삶던 지금은 어디 사는지 모르는 내 어린 시절 동네 누나, 동생, 여자 친구들의 모습이다. 나는 아빠였고 동네 여자 친구는 엄마였다.
인도를 다니면서 이 소꿉놀이에 남달리 마음을 빼앗겼다. 놀이 가운데 소꿉놀이만큼 자연스러운 놀이도 없을뿐더러 세상 모든 아이들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하는 놀이라, 소꿉놀이를 잘 살펴보면 놀이의 많은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가게에서 파는 소꿉놀이 세트가 아닌 우리가 어렸을 때처럼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물건들을 소중하게 늘어놓은 진짜 소꿉놀이를 여러 번 마주치고 그때마다 절로 마음이 끌렸다. 이 나라 아이들의 소꿉놀이를 눈여겨보았더니 내가 기억에 남아 있던 40년 전 소꿉놀이는 가운데 토막이 부러지고 귀퉁이가 날아간 것이었다. 참 기억이란 믿기 어려운 것이다.

몇 차례 자연스러운 소꿉놀이와 만났다. 그러나 문제는 아이들의 놀이를 깨뜨리지 않고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까였다. 흔히 하듯 비디오카메라를 아이들 몰래 숨겨놓고 놀이를 관찰하는 일은 정말 옳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들이 낮게 소곤거리며 저만치서 소꿉놀이에 몰두하고 있는데 어떻게 아이들에게 다가갈 것인가. 먼저 카메라를 내려놓고 아이들에게로 갔다.  ‘저 사람은 무엇을 하러 온 사람일까?’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소꿉놀이 속에 잠겼다. 아이들은 놀이 속에 퐁당 빠졌다가 잘도 폴짝 뛰어나오곤 한다. 그렇게 아이들 곁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그러면서 나는 소꿉놀이란 것이 이토록 우리네 살림살이와 쏙 빼닮았구나, 싶어 새삼 눈물겨웠다. 또 아이들은 소꿉놀이를 통해 밖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것도 보았다.

아이들 놀이 가까이 갈 때는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아이들 스스로 어른에게 어떤 작은 역할이라도 주기 전에는 놀이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놀이를 깰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운이 좋게도 놀이에 끼워주면 좋아라 하며 아이들이 시키는 대로 하자는 대로 하면 된다. 시키는 대로 해서 유일하게 즐거운 일이 이럴 때가 아닐까. 소꿉놀이를 한참 들여다보면서 나는 문득, 소꿉놀이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 하나하나의 얼굴에서 제의를 집전하는 사제의 경건함을 보았다. 그 경건함은 어른들은 여기 들어올 곳이 아니라고 말없이 말하는 듯했다. 아이들 놀이에 흠뻑 빠져 있을 때 느끼는 이 지극한 신성함이 나는 좋다. 신성과 놀이는 하나였다. 아이들의 제의가 바로 놀이라는 말이다. 아이들의 놀이는 어른들의 종교와 견줄 수 있다. 아이들이 놀이에 빠져 몰입하는 것을 조용히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인도의 바이샬리, 오르차, 아우랑가바드, 함피, 뭄바이 등등과 네팔과 캄보디아에서도 소꿉놀이하는 아이들을 만났다. 비하르주에 속해 있는 한적한 시골 마을 바이샬리에서 길을 걷다가 소꿉놀이를 하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만났다. 남자, 여자아이들이 어울려 진짜 살림을 하듯 여러 가지를 차려놓았는데 여간 진지한 게 아니었다. 빨간 흙을 빻아 인도 음식인 ‘뿌리’를 만들고 흙으로 벽을 쌓아 경계를 짓고 있었다. 캄보디아에서 잠시 보았던 소꿉놀이 속 꼬마는 음식을 만들어 어디론가 나르기까지 했다. 마치 줄 사람이 있다는 듯이 말이다. 오르차에서 본 소꿉놀이는 정말 놀라웠다.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힌두 제단 앞에서 하고 있었는데 10살, 10살, 8살 여자아이 셋이 따로따로 방을 꾸며서 인도 음식인 짜이, 로띠, 사모사, 사부지에 같은 것들을 만들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진짜 음식 재료를 구해 와 소꿉놀이의 재료로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음식 하나하나의 화려함이 한낮의 오후를 더욱 눈부시게 만들었다.

여러 살림살이가 갖추어진 소꿉놀이 방에는 문도 있었고 소꿉놀이가 다 끝난 다음에는 물청소까지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제 이 마을에서 열다섯 살 먹은 여자아이가 시집가는 것을 보고 너무 어리지 않나 생각했는데, 오늘 아이들의 이 섬세한 소꿉놀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떨칠 수 있었다. 나는 놀이가 허구이거나 꾸며 노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놀이에서 언제나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를 하고 그들만의 작은 우주를 날마다 새롭게 창조한다. 아우랑가바드 뒷골목을 돌아다닐 때였다. 처마 밑에 아이들이 꼬물꼬물 모여 무얼 하나 하고 넘겨봤더니 못 쓰는 헝겊 조각을 이어 만든 인형을 가지고 한창 놀이에 빠져 있었다. 다른 놀잇감들도 있는 것 같아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소꿉놀이 도구들이 모두 흙으로 만들어 아궁이에 구운 것들이 아닌가. 그릇도 있고 수저도 있고 반죽을 미는 밀대도 있고 프라이팬도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요리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아궁이와 아궁이에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는 도구까지 있었다. 참 기가 막힌 소꿉놀이 세트였다.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에서 본 놀이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이 얼마나 구제척인 놀이를 하는지 또렷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갠지스 강가에는 커다란 돌 빨래판이 줄줄이 있다. 인도 사람들은 빨래를 비벼서 하지 않고 옷감을 돌돌 말아 돌 판에 때리면서 빨래를 한다. 평생 빨래를 해주며 사는 사람들을 ‘도비’라고 하고 이곳을 ‘도비가트’라 부른다.

어느 날,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도비가트를 지날 때였다. 아이들이 강가 모래에 나뭇가지들을 두 개씩 엇갈려 꼽고 이것들을 끈으로 이어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것이 빨래를 널어 말리는 간짓대를 세우고 빨랫줄을 거는 놀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이들은 커서 하게 될 빨래 일을 놀이삼아 하고 있던 것이었다. 아이들은 일상에서, 어른들의 일 가까이에서 풍부한 놀잇거리를 찾아 논다. 또 한 번은 함피에서였다. 이 마을에서 건넛마을로 가려면 조그만 배를 타야 하는데 이 나루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큰 나무 그늘 아래서 아이들이 한참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먹고 남은 코코넛 껍데기를 그릇으로 쓰고 있었는데 살림살이의 정갈함이 시골 할머니의 부엌을 보는 듯했다. 그런데 저녁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보니 아이들이 놀던 소꿉놀이 살림들이 고스란히 그대로 있었다. 누구도 흩트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듯 했다. 이것은 또한 말해주고 있었다. 내일도 아이들은 이 나무 아래로 나와 소꿉놀이를 할 것이란 걸. 어제도 그제도 이 나무 아래는 아이들의 소꿉놀이터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글쓴이 : 편해문

어린이책 작가, 창작과비평사 ‘좋은 어린이책’ 대상, 어린이도서연구회 자문위원,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상임위원,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전문위원,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그랬어 편집위원. 쓴 책으로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어린이 민속과 놀이문화』,『옛 아이들의 노래와 놀이 읽기』, 『아기를 주시는 삼신할머니』,『산나물아 어딨노』가 있고, 전래동요를 음반과 함께 펴낸 『께롱께롱 놀이노래』, 『동무 동무 씨동무』, 『가자 가자 감나무 』가 있다. 아시아 아이들을 담은 사진집『소꿉』을 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