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임은혜_연극으로 만나는 세상]인형극, 고요한 동작의 정신
- 임은혜
‘인형’하면 일반적으로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정도일 것이다. 바비 인형이나 양배추 인형, 테디 베어 등의 서구 인형이 떠오를 것이고, 조종 끈에 매달린 뻣뻣한 팔과 우스꽝스러운 동작들이 떠오를 수도 있다. ‘인형극’ 역시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보는 것으로 여겨져 국내외 여러 인형극 연행자들과 단체들은 아이들을 주요 관객으로 겨냥하여 작품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소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인형극, 재미있고 교육적인 작품이라고 선전하고 있는 인형극들을 보면 아이들에 대해 모르기로 작정한 어른들의 유치한 장난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이들을 존중하지 않고 그저 계몽해야하는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어른들의 질병이 인형극 무대에 고스란히 옮겨 있다. 제대로 걸음도 걷지 못하고 뒤뚱거리는 인형들, 발음도 정확하지 않고 코맹맹이 소리를 내가며 “편식하면 안돼요”, “엄마 아빠 말씀 잘 들어야 해요”, “공부도 열심히 해야죠."라고 말하는 인형들의 어수룩한 몸짓은 어쩌면 꿈을 저버린 어른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오래전 예술은 어린이 것과 아이들 것으로 애써 구분하지 않았다. 마을에서 꼭두각시놀음이 있으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마당으로 나와 한 자리에서 함께 보았다. 처첩을 거느리고 가부장적인 횡포를 부리는 박첨지라든가, 시뻘건 몸에 옷 하나 걸치지 않고 성기까지 내놓고 다니는 홍동지가 등장하는 인형극을 아이들도 어른들과 함께 한자리에서 보았다.
연극은 기성세대의 위선과 횡포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예술이었고, 아이들은 그러한 연극을 보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과 삶의 깊이를 공부할 수 있었을 게다.
1800년대 ‘그림 형제’가 썼던 백설공주, 신데렐라, 개구리 왕자 등의 원작이 실은 근친상간과 성, 죽음 등과 관련된 이야기들이었고, 어른들과 아이들이 함께 읽는 이야기였지만 오랜 시간을 걸쳐 비평가들에 의해, 교육자들에 의해, 국가 권력에 의해 수차례 가위질 당한 결과 지금은 아이들만 읽고 있는 예쁜 동화가 되었다. 아이들이라고 예쁘게 가공된 세계만 보아야 하는 것일까, 아이와 어른이 ‘죽음’에 대해 ‘성’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하면서 인간의 이상과 한계를 함께 바라보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문제일까. 아이들 역시 인생과 사랑,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다는 것, 어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심오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아이들이 볼 인형극이라고 해서 손쉽게 만들거나 공연할 수 없을 것이다.
고든 크레이그에 의하면 인형은 옛날 사원에 있던 석상 (石像)의 후예이다. 지금은 퇴락해버렸지만 신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모든 인형들이 천박한 코미디언으로 전락해버렸다고 한다. 그들이 무대에 나와서 하는 일이란 그저 우스꽝스럽게 넘어지는 것, 취해서 흔들거리는 듯한 걸음걸이, 사랑하거나 죽는 장면 역시 웃음을 일으키기 위한 것들 투성이라고 비판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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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인형들은 그들의 조상인 스핑크스가 해준 말을 잊고 있습니다. 그것들의 몸은 엄숙한 품위를 잃고 어색하게 굳어버렸습니다. 내게 인형은 지나간 문화가 지닌 고상하고 아름다운 예술의 마지막 여운 같은 거예요. 그러나 모든 예술이 우둔하고 저급한 손에 들어가면 그렇게 되듯이 인형도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
인형들은 신상의 위대하고 고결한 가계에서 나온 후손이라는 것이다. 수 백 년 전에는 지금 인형극에서처럼 뒤뚱거리지도 않고 리듬감 있게 움직였고, 그 때엔 조정하는 줄이나 숨어있는 인형 조정자의 코맹맹이 소리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올 가을 나는, 인형들을 신들의 후예로 복귀시키고자 힘쓰고 있는 인형극 두 편을 만났다. 그리고 이 작품들을 보러온 아이들의 집중된 에너지와 반응을 보면서 예술의 경계 없는 소통을 실감했다.
파차마마의 후예, 볼리비아 인형극단 ‘Para la Mano'
볼리비아에서 온 인형극단 'Para la Mano'의 인형극 ‘소박한 이야기(Historia Simples)'는 서로 다른 4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작품으로 편협, 권력남용, 고독이라는 극한의 어두운 면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웃음과 소박한 희망도 담고 있다.
두 배우, 후안(Juan)과 프란시스코(Fransisco)는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몸을 풀고 파차마마에게 기도를 올린다. 라틴아메리카 대지의 여신 파차마마는 종교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함께 호흡하는 생명의 기운이요 정신이라고 했다. 이들이 공연에 앞서 갖는 의식은 인형극이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니라 인형을 통해 신성과 만나는 제의이기 때문이다.
▲ 볼리비아 인형극 <소박한 이야기> 속의 인형들 (사진: Paralamano)
이 인형극에는 대사가 없다. 가슴을 파고드는 음악과 인형들의 고요한 동작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숨죽이게 한다. 전쟁으로 인해 자식을 잃은 늙은 노인의 소리 없는 절규, 울다 지쳐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고통어린 심장의 박동소리... 어떻게 그 작은 인형들이 삶의 고통을 그토록 생경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어떻게 그 고요함 속에서 우주적인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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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리비아 인형극단 ‘ Paralamano' 의 <소박한 이야기> .(사진:컬처라인) |
배우들은 인형들처럼 절제되어있다. 그들의 얼굴은 표정이 없고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 이들이 인형을 조작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들이 인형에 이끌리어 인형이 인도하는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몸으로 표현할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는 한계선 상에서 인간의 간절한 꿈을 담은 인형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배우들은 무대에서 사라지고 인형 뒤에서 자신의 존재를 감춘다. 볼리비아 인형극단 ‘Pralamano'의 배우들은 인형을 통해 신에게 다가간다. 인간 스스로의 한계를 고백하고, 자연과 우주 앞에 겸허하게 몸을 낮춘다.
플로베르는 “예술가란 자신의 작품 속에서 마치 창조주와 같이 보이지는 않으면서도 전능한 그런 것이다. 그의 존재는 모든 곳에서 느껴지되, 아무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예술은 인간적인 편견과 과민한 심리적 감수성을 넘어서 우러나야 한다."고 했다. |
배우는 자기를 들어내려고 노력할수록 연극과 멀어진다. 작품 속에 숨어있는 예술가, 자기를 무화시키고 있는 배우만이 무대에서 빛을 발하고 진정성을 발한다. 볼리비아 인형극단 ‘Paralamano'의 인형극이 빛났던 것은 파차마마의 후예임을 기억하고 인형극의 품위를 지켜내려는 인형극 배우들의 진정어린 소명감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하회별신굿 창작 인형극〈각시〉- 잃어버린 신화를 찾아서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극장 안에서 관객도 배우도 숨을 죽이고 예정된 시간을 기다린다. 가로등과 같은 불이 켜진다. 그 아래 자작나무 상자가 있다. 배우들이 함께 다가가 나무상자를 연다. 잘 열리지 않는다. 세 배우는 다시 한 번 힘껏 나무 상자를 연다. 기나긴 비밀의 시간이 한 순간 쏟아져 나오는듯한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린다. 그림자 영상으로 보름달이 비춰지고 배우들은 상자 속에서 조심스럽게 인형을 꺼낸다. 무엇인가를 보고 놀란 듯 동그랗게 뜬 눈에 벌어진 입으로 굳어있던 할미가 배우들의 막대에 의해 일어나 걷기 시작한다.
▲ 하회별신굿 창작 인형극〈각시〉에서 실을 잣는 할미, 관객들에게 실을 나눠준다.
천 년의 세월을 갇혀있던 신화가 되살아나듯, 안동 인형극단 ‘땅콩 감자’의 처녀작〈각시〉가 무대에 올랐다. 하회 별신굿을 기반으로 창작된 인형극〈각시〉는 하회탈 하나하나에 깃든 신화를 더듬어보는 것을 창작 의도로 삼았다. 본래 제의와 신화는 한 몸인지라 마을 공동체의 제의였던 하회별신굿의 탈들은 각각의 내력과 이야기가 있었을 텐데, 신화를 잃어버린 하회별신굿은 그동안 몸뚱이 없이 탈과 옷만 걸친 채 재연되어 왔다. 인형극단 ‘땅콩감자’는 그 잃어버린 신화를 찾기 위한 첫 번째 작업으로 주지, 각시, 이매, 할미 네 인물의 원형을 추적해 들어간다.
희생 제물로 바쳐져 고통을 감내하고 마을을 구하는 여신으로서의 각시, 우주라는 거대한 베틀 앞에서 운명의 씨줄과 날줄을 엮는 여신으로서의 할미, 우직한 두꺼비와 같은 이매, 분노의 화신으로서의 주지, 각각의 인물들은 우열이 있거나 선악구도로 편 가르기 하지 않는다.
목각 관절인형으로 변형된 하회탈의 인물 하나하나가 각자의 존엄과 품위를 갖고 빛을 발한다. 술 취한 듯 비틀거리는 저능아로 표현되었던 이매는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 위한 충직한 두꺼비 신으로, 할미 또한 늙은이의 무력감이나 신세 한탄보다는 깊이 있는 자태로 인생을 관조하며 실을 잣는 여신으로 화했다. 특히, 베틀무가를 부르며 운명의 실에 마력을 불어 넣고 그 실을 끊어서 관객들에게 한 올 한 올 나눠주면서, 이 인형극은 관객과 함께 존재의 운명과 삶의 비밀을 풀어갈 것을 제안한다.
▲ 각시가 할미로부터 운명의 실을 받는다. (사진: 인형극단 ‘땅콩감자’)
객석에서 각시가 걸어 들어온다. 운명의 실을 받기 위해 걸어온다. 하회별신굿에서 각시가 무등을 타고 등장하듯, 객석을 걸어오던 각시는 관객 중 아이 한명의 등을 타고 올라가 아이의 머리 위에 올라선다. 그 아이는 인형을 거부하지 않는다. 자기 머리위에 올라선 각시의 발을 공손히 붙잡고 배우들과 함께 무대 위로 올라간다. 이때 관객들은 각시를 혹독한 운명이 예정된 무대로 올려 보내야하는 아픔과 공명한다. 할미로부터 운명의 실을 받는 순간 관객은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삶의 비밀을 되새기게 된다.
▲ 이매의 도움으로 바다를 건너고 있는 각시. (사진: 인형극단 ‘땅콩감자’)
운명의 실을 받아든 각시인형은 개구리와 뱀 등의 양서류가 득시글거리는 늪을 지나고 뜨거운 불구덩이를 지나고, 갈라진 땅을 넘어 마침내 분노한 주지의 뱃속으로 들어가 마을을 구한다. 모든 신화와 예술이 그러하듯 인형극 〈각시〉또한 죽음의 세계와 대화한다. 멈추지 않고 걷고 또 걷는 각시의 여정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녀의 죽음은 곧 갈라진 땅에 비를 내리고 만물을 소생시킨다. 그리고 그녀 또한 꽃 한 송이로 다시 태어난다.
각시의 죽음과 할미의 관계, 이매의 사랑, 주지의 분노는 죽음과 재생이라는 씨줄과 날줄로 엮어지면서 하회별신굿의 신화를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죽음과 맞닿아있는 여정의 비밀을 포착하게 해주는 창작 음악과 전통에 기반 한 창작 노래는 인형극〈각시〉에 울림을 더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소통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하는 것이 연극의 언어이다. 특히 인형극은 멈춰있던 세계에 숨을 불어넣는다. 인형 뒤에서 신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배우야말로 고든 크레이그가 말한 ‘고요한 동작의 정신을 송축하는 꿈의 창조자’일 것이다. 죽음의 세계와 통하며 그 세계를 영광스럽게 맞이한다는 고요한 동작의 정신, 그것은 깊게 침묵하고 있던 인형들이 겸허한 배우의 손을 만나 움직이기 시작할 때 발하는 빛 속에 깃들어 있으리라.
- 글쓴이 : 임은혜
- 극작가, '나무닭움직임연구소'는 청송군 청송읍 송생리에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