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이선아_바람 따라 구름 따라]영덕 인량마을
- 이선아
기차가 지나간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지나간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지나간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서 지나갔다.
“면접 어땠어? 은하수?”
술잔에 소주를 따르며 내가 물었다.
“야야, 흘리지 말고, 너는 맨날 술 아까운 줄을 모르니.”
황구는 딴소리였다.
“면접 어땠냐고.”
“별거 없던데, 나한테는 많이 묻지도 않고.”
“뭐 물어 봤는데?”
“지원 동기하고, 여태 뭐했냐고 물어보더라.”
황구가 양은 밥그릇에 담긴 흰 쌀밥을 야무지게 다지더니, 크게 한 숟가락 떴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궁금하시면, 합격시켜달라고 했지. 흐흐.”
입안의 밥을 채 삼키기도 전에 황구는 무말랭이와 깻잎을 걸쳐 다시 밥을 떴다.
“여긴 글렀어.”
“은하수 말이야?”
“아니. 여기 식당. 좀 멀더라도 이모집으로 가는 건데.”
“네가 배고프다고 식은 땀나서 도저히 못 걷겠다고 했잖아.”
나는 황구에게 내 밥을 좀 더 덜어줬다.
“나가야겠어.”
“뭐? 너 밥 덜 먹었잖아.”
“오늘 따라 우리 주파수 참 안 맞는다. 알바 말이야.”
“아...그거. 왜? 점장이 아직도 느끼해? 니가 예뻐서 그런거야.”
“어디 가서 그런 얘기 하지 마라. 너 세계 평화를 흔든 죄로 잡혀간다. 내가 지금 이 모양으로 뒷골목에서 숨어 사니까 그나마 세계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거야. 아무래도 여기 밥은 압력 밥솥 밥이 아닌 것 같아. 밥알이 계속 입에서 도네.”
“왜 그만 둘껀데, 주급이 많다며?”
“주급이 많으니, 바라는 것도 많고. 좀 한심해서.”
“누가? 점장이?”
“밥 한공기 더 먹어도 돼?”
황구가 내 빈 밥그릇을 보며 물었다.
“제일이는 조용하네.”
“지금쯤 동남 아쪽으로 돌아다니고 있을꺼야.”
나는 밥을 한 그릇 더 시키고, 멸치 볶음을 황구 쪽으로 밀어주었다.
“제일이 요즘 뭐 해?”
“엊그제 전화 왔더라고, 아부지랑 사업 구상 중이라고. 바빠서 너한테는 말하는 걸 잊었나부다.”
“한동안 조용하겠네. 커-억.”
“야 너는 여자애가 입 좀 가리고 트림해라. 그러니까 제일이 같은 킹카도 놓치지.”
“누가 킹칸데? 놓치기는 뭘, 아직도 얼굴 보고 있구만. 징글징글하게. 떨어질려면, 9년 전에 빠이빠이 했었게.”
황구가 제일이를 만난 건 고 3때 여름 방학이었다. 공부한다고 서울에 올라갔는데, 첫 소개팅 상대였다. 이마가 반듯하고, 눈썹이 가늘고, 쌍꺼풀이 진한, 아직 볼 살이 빠지지 않은 황구에게 제일이가 수줍게 다음에 또 만나고 싶다고 했다.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고, 주문한 콜라 한잔을 다 마시기도 전이였지만 황구는 엉덩이를 긁더니 방귀를 뀌었다. 아주 시원하게. 그 후로 제일이는 우리의 형제가 되었다.
“배도 찼으니, 소주 한 병 할까? 안주도 있는데?”
“밥 다 먹었구만 안주가 어딨어?”
“야야 흐음- 하. 저거. 냄새 좋잖아.”
황구가 고갯짓을 했다.
옆 테이블에서 삼겹살 굽는 냄새가 솔솔 풍겼다. 황구가 나를 말갛게 봤다.
“그래. 저 냄새면, 소주 세병은 먹겠다. 그래도 소주만 마시기 그러니까 멸치만 조금 더 달라고 할까?”
“나는 동생이 너무 좋아.”
황구가 쌜쭉 웃었다. 큰 눈이 까맣게 빛났다. 밖에선 우르르 쿵쿵 천둥이 치고 있었고,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오랜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기다리던 비였으나, 가을을 재촉하는 것이 나는 반갑지 않았다. 은하수에 입사 원서는 나도 냈었다. 물론, 나보다 좋은 학교를 나오고 나보다 좋은 학점을 가졌고, 나보다 토익 점수가 높은 황구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내가 서류 전형에서 떨어질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한 번, 지푸라기라도 한 번, 혹시 모를 0.00001%라도 한 번, 기대보고 싶었다. 원서를 내고 혹시 내가 합격된다면 하는 상상을 하는 단 2분 동안은 그래도, 행복할 테니까. 아주 몹시.
빗소리와 함께 열린 가게 문으로 바람이 불었다. 황구의 곱슬머리가 흔들렸다. 좋은 향기가 났다. 내 앞에서 밥상을 초토화 시켜 놓고 있는 식인귀는 나보다 2분 6초 먼저 세상에 태어난 쌍둥이 누나다. 누나라고 불러야 했지만 부모님은 내가 황구라고 부르는 걸 허락하셨다. 쌍둥이라고 같은 옷과 신발을 신기거나 같은 헤어스타일로 만들어 사진을 찍지는 않으셨다. 사진첩도 내 것과 황구 것을 따로 만들어 주셨으며, 초등학교도 다른 곳에 다녔다. 같이 태어났지만 다르게 자랐다. 때문인지 황구와 나는 취향도 많이 달랐다. 취미도 달랐고, 친구를 사귀는 깊이도 달랐다. 흔히 쌍둥이는 아플 때도 같이 아프다거나 서로에 대한 식스 센스가 있다고 하지만 황구와 나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그런 것에 비해 황구와 나는 우애가 좋았다. 황구가 머리를 땋기 전까지 황구와 나는 늘 붙어 다녔다. 어렸을 때는 화장실도 같이 갔었다. 황구와 나라기보다 우리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남매이자 친구이자, 가족 공동체 구성원이자 때로는 경쟁자로 서로에게 애틋했고, 황구가 몸이 약했기 때문에, 애틋함은 배가 되었다. 부모님께서는 항상 내게 황구를 부탁하셨고, 나 또한 항상 황구를 보호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족들의 근심에 성적과 품행으로 보답했던 황구는 부모님이 바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며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렸다. 황구가 명문 대학에 붙었을 때는 양장점을 하는 아버지 가게 앞에는 크고 넓은 현수막이 걸렸다.
“오늘은 안 바래 줘도 된다.”
“같이 가. 가는 길이잖아.”
황구의 고시원은 내가 있는 곳에서 한 블록 더 가야 한다. 같은 고시원을 썼으면 했는데 황구는 나보다 2만원이 더 비싼, 창이 있는 방이 남아 있는 고시원으로 갔다.
“어디 좀 들렸다가 가려고.”
“어디?”
“어디 있어.”
“어디냐고?”
“나도 좀 감추고 살고 싶다. 동생이나 얼른 들어가 공부해.”
“술 냄새 피우면서 어딜 돌아다녀. 오늘 면접 보고 왔으니까 피곤할 텐데, 그냥 가서 쉬어.
“지금 들어가면 고시원에 민폐야. 술 냄새 나고 부시럭거리고.”
“같이 있어 줄게.”
“너 공부하기 싫지? 오늘 제끼고 한 잔 더 할까?”
나도 황구가 너무 좋다.
결국 우리는 소주 한 병을 사서 근처 공원으로 갔다.
“은하수에 꼭 가고 싶었어?”
“아니. 전화 오니까 본 거지.”
“그럼 어디 노리는데?”
황구는 말없이 웃었다.
“대기업들 공채 떴던데?”
“시간 참 빠르네. 여기 들어와서 공채가 벌써 세 번째던가?”
귀뚜라미가 따르르르 울었다.
“이번에 지원 부서를 옮겨 볼까봐.” 내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우리 금구, 머리가 많이 길었네. 면접 보려면 잘라야지.”
계속 술만 마시던 황구가 만원을 쥐어줬다.
면접 대기실에서 황구 생각이 났다. 아침에 깨워달라고 했는데, 갑자기 우리수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가 오라는 바람에 전화를 하지 못했다. 우리수는 은하수와 함께 원서를 넣었던 곳인데, 꼭 이곳에 취직이 되고 싶다기보다는 은하수에 넣은 이력서가 한 곳에만 넣기엔 너무 아까울 정도로 잘 쓴 것 같아서 몇 곳 더 찾다가 얻어 걸린 곳이 우리수였다. 사람들은 온갖 표정으로 거울을 보거나, 준비해온 자료를 보거나 대기실에서는 면접장 특유의 긴장이 흘렀다. 일자리를 찾는 또래의 백수들이 돌고 돌다 보니, 면접장에서 더러 아는 얼굴을 발견 할 때도 있었지만 우리수에서는 그런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끝내주는 양복을 입은 사람들, 아찔한 하이힐들 사이에서 나는 계속 어색해 하기만 했고, 유창한 프랑스어와 중국어가 난무했다. 영어라도 몇 마디 나오면 조금 안심이 될텐데, 공중위로 떠다니는 말들을 눈치로 때려잡기가 멋모르고 처음 쳐본 토익 시험처럼 어려웠다.
다섯 명을 의자에 앉히고 중구난방으로 물어보는 면접이었다. 면접이 시작되고 몇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면접관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지원자들을 잘 쳐다보지도 않고 외국어로 묻기 시작했다. 낮은 목소리의 알 수 없는 단어들이 핑퐁 레이스를 펼쳤다.
뭐라는 거야....이 회사가 다국적 회사였나?
넥타이가 답답하고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옆에 앉은 149번이 뭐라고 손 모양을 만들어서 보여주는 듯 했고, 무슨 대답에 어떻게 저런 행동이 나오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허리를 조금 폈다. 시선을 어디에 두고 있어야 할지도 몰랐고, 지금 내가 어떻게 앉아있는지도 그려지지 않았다.
정신 차리자. 정신을 차리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취미가 뭔가?” 한국 말이었다.
“네?” 면접관이 나를 보고 있었다.
“취미가 뭔가?”
“달리기입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긴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특기가 뭔가?”
“박수를 빨리 칩니다.” 면접 위원들의 동작이 멈췄다. 하필 그게 생각이 났다.
차라리 호랑이에게 물려서 응급실에 실려 가야 했다. 내가 생각해도 한심했다.
“사실입니다.” 아 제발...더 한심해지기 전에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해보게,” 심사위원들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뭔가 숨을 돌릴만한 건수가 생긴듯 팔짱을 끼고 나를 응시했다.
가능한 한 힘껏 박수를 쳤다. 소리가 면접장을 채우고,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삐질삐질 땀이 흘렀다. 더 열심히 쳤다. 내 귀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박수 소리 속에서 어차피 오고 싶었던 회사가 아니라며 변명하고 있는 내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휴일에도 일을 하는 지친당신들을 위해, 어쨌거나 밀리지 않고 자리 하나 차지하고자 아등바등 외국어를 구사하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봉사하고 있다. 일찌감치 내 주제 파악 끝내고 격려하고 있으니, 잘 해보라고. 치잇.
어둑어둑하더니, 금새 해가 졌다. 뛸 때는 몰랐는데, 신호등 앞에 잠깐 멈춰 섰더니 기운이 빠졌다.
‘오늘 참 많이 뛰네.’
일렬로 늘어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눈이 부셨다.
우리수에서 나와 버스를 탔는데 황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마음에 드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는데, 이력서에 증명사진을 빠뜨렸다며 고시원에 가서 가져 오라는 것이었다. 지하철 역에서 다시 찍으라고 했더니, 그럴 돈이 어딨냐며 소리를 빽 질렀다. 지갑 안에 있으니까 통째로 가져오면 된다고, 고시원에 전화해 두겠다고 했다. 오거리에서 차들은 질서 정연하게 움직였다. 사람들도 움직이고, 자전거도 움직이고, 광고지가 아무렇게나 흩날렸다. 신호등을 기다리기가 지루해 황구의 지갑을 뒤졌다. 잔뜩 모아 놓은 쿠폰과 동전, 현금카드 한 장, 삼천원이 다 였다.
‘증명사진은 어딨지?’
더 뒤지기 시작했다. 가족사진 뒤로 증명사진 한 장과 오래된 흑백 사진이 보였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사진이었다. 어디서 오린 것인지 사진에 날짜도 없었고, 벽산정이라는 글씨 앞에 얼굴에 눈을 시커멓게 칠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구지?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며 소리를 냈다. 서둘러 지갑을 접어 넣고, 다시 뛰었다. 혀를 내민 간판들 사이에서 황구를 찾았다. 황구는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곱슬머리가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하루 종일 안 씻었냐? 이래서 무슨 이력서를 내?”
“외모 보는데 아니야 괜찮아. 지갑?”
“여기. 알바 할 시간에 지원서 한 장이라도 더 쓰는 게 낫지 않아?”
사진에 풀칠을 하던 황구가 멈칫했다.
“히히히. 왜 그래? 알바해서 용돈 줄게.” 하면서, 어깨를 쳤다.
“거기, 흑백 사진은 뭐냐?”
“왜 지갑을 뒤지고 그래.” 아까보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증명사진 찾느라 그랬지. 누구야?”
“지그프리트.”
“지.. 뭐? 외국인이야? 너 설마 외국인 자형....”
“참 가지가지 한다. 이력서만 주고 올테니까 기다려, 밥 먹으로 가자.”
외국인보다는 제일이가 낫지 않나? 그나저나 제일이는 잘 갔다 왔나...
그 때였다. 양반은 못되는 제일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제일이 회사 근처에 있는 술집은 넓고, 볼거리가 많았다. 시간 대 별로 프로그램이 다양했다. 가수가 나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고, 마술쇼를 하기도 했으며, 막간을 이용해 바에서는 웨이터가 칵테일 쇼를 보여줬다. 테이블이 100개 넘었는데, 빈자리가 없었다. 사람들은 공연을 즐기거나 일행과 술을 마시거나, 노래를 듣거나 떠들었다. 나도 마음 편하게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한숨 대신에 수다를 떨 수 있으면 좋겠다. 나도 황구에게 배부르게 술 좀 사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술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황구가 시킨 새우튀김이 나왔다. 에어컨 곰팡이 냄새를 노릇하게 익은 새우들이 삼켜버렸다. 황구는 맥주 한 잔을 앞에 놓고, 부지런히 안주만 먹었다. 한 손에는 새우를 한 손에는 피클을 들고, 아삭거리며 먹었다.
“받아.”
제일이가 황구에게 명함을 내 밀었다.
새우와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황구 대신 내가 받았다. 드림 리조트 기획실장 조엘 방. 부드럽지만 위엄 있는 글씨체였다. 시원한 파란색 바탕에 글씨는 약간 볼록하게 디자인 돼 있었다. 빳빳한 명함을 튕기듯, 제일이가 말을 이었다.
“세부 좋더라. 호핑투어 좀 했는데, 거기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멀었지.”
제일이가 나와 눈을 맞추었다.
“어? 그래? 나는 세부라는데 몰라.”
“상식 아니냐. 취업 준비하는 애가 상식 백과 이런 거 안보냐? 필리핀에 있는 대표적인 휴양지잖아. 샹그릴라도 있고.”
“샹그릴라? 그거는 중국에 있는 거 아냐? 아니다. 아침에 신문에서 싱가포르 샹그릴라 특가 뭐 그런 거 본 것 같았는데...”
“네 수준이 그렇지.”
대형 텔레비전에서 야구 경기를 보던 황구가 메뉴판을 폈다. 황구는 메뉴판을 꼼꼼하게 살피더니, 내게 모듬 소세지가 어떻겠냐고 물었다. 주문을 마치더니 제일을 보고, 음식은 어땠냐고 물었다.
제일은 얼굴이 밝아지더니, 꼬치가 어떻고, 호텔에서 맛본 씨푸드에 대해 떠들었다.
“마젤란 크로스는 가봤어?”
“아 거기! 가봤지 그럼.” 제일은 몸을 황구 쪽으로 바짝 붙여 계속 떠들었다. 제일의 침이 어묵탕으로 튀었다. 황구는 말이 없어졌다.
조엘 방은 무슨. 셔터 방이라고 지었어야했다.
“산 페드로 요새는 가봤어?”
“요새가 있어? 글쎄, 우린 레저 쪽으로만 돌아서 잘 모르겠는데,”
제일의 표정이 심각해 졌다.
“도교 사원이랑 비버리 힐즈는 어땠어?”
“황구야, 오호ㅡ, 이런 황구야, 너도 다 됐구나. 도쿄 사원은 도쿄에 있겠지. 비버리 힐즈는 미국에 있고.”
제일이가 유쾌한 듯 술을 마셨다.
황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갑자기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제일이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어깨를 툭툭 치고, 화장실에 가겠다고 일어섰다.
“황구, 오라는 데 없어?”
“모르겠는데, 직접 물어봐.”
“황구가 나한테는 신비주의잖아.”
트레이닝 복 입고 머리 며칠씩 안 감는 떡진 머리로 부자집 도령님께서 부르는 족족 쪼르르 달려나와 하루 종일 굶은 사람처럼 안주를 밥 삼아 얻어먹고 있는 신비주의는 처음 듣는다. 나는 빨리 다음 안주가 나왔으면 좋겠다 싶었다.
“머리는 좋은 애가 왜 저러고 있는지 몰라.”
드디어, 시작됐다. 제일이는 가끔 황구에게 서운한 걸 내게 털어 놓는데, 한 번 시작하면 날을 샌다. 황구가 마음을 안 받아주는 걸 그렇게 푸는 구나 싶기도 하고,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제일이가 막내 동생 같다. 나는 눈을 풀고, 귀에 길을 뚫어 얘기를 실실 흘려보낸다.
“.....합격해도 안가지. 꼴에 자존심은 세서 우리 아빠가 들어오라고 했는데도.....”
“뭐? 황구가 너희 회사에?”
“몰랐어? 오호라, 죽고못사는 남매 사이도 비밀이 있구만.”
머릿속에서 납조각이 둥둥 떠다니고, 황구의 무엇들을 더듬어 보았다. 아무리 용접해 보아도 비밀스러웠던 무엇이나 전조를 보이는 행동이나 용접 되지 않았다. 파란 불꽃만 사방으로 튀었다. 그때, 황구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제일이가 받았다. 제일이는 벌떡 일어서더니, 엉거주춤한 자세로 전화를 받고, 예 예 하더니 걱정마십쇼.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야 너 왜 황구 전화를 받어.”
“그럼 니가 받던가.”
또 전화가 울렸다. 제일이 손에 있던 휴대 전화를 빼앗았다.
“안녕하세요. 주식회사 은하수입니다.”
아..저절로 고개가 숙여 졌다.
“최종 면접입니다. 내일 10시 반까지 본사 7층으로 오세요,”
친절하지만 건조한 목소리였다.
“야! 남의 전화를 왜 니가 받어.”
황구가 뒤에 서 있었다.
“아니 그게...은하수에서...야! 우리가 남이야?”
무안해진 내가 소리를 질렀다.
“왜 소리를 지르니?”
“내가 소리 안 지르게 생겼어? 뭘 그런 걸 가지고 화를 내. 제일이 회사는 왜 안들어 갔어?”
황구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전화를 매몰차게 빼앗았다. 황구는 몸을 돌려 출입구 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황구야!”
제일이가 황구를 불렀다.
“아버지께서 택배로 옷 보내셨대. 화이티잉”
황구는 우리 둘을 쓰레기 보듯 하고 떠났다.
“왜 저래? 안 어울리게.” 다시 엉거주춤하게 서서 어색하게 웃고 있던 제일이가 들고 있던 손을 수줍게 내렸다.
아버지가 보내신 택배는 결국 내가 찾았다. 황구는 도통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침을 먹자고 해도, 옷을 찾아가라고 전화도 하고 문자도 넣었지만, 황구는 대답이 없었다. 아버지가 보내주신 황구의 옷은 습자지에 곱게 싸여진 투피스였다. 이번에는 흰색이었다. 아버지가 이옷을 만들려면 며칠 밤을 새야 하는지 안다. 황금라사의 주인인 아빠의 재단 솜씨는 동네에서 알아주었다. 기능 올림픽 대회에서 우승한 적도 있었고, 한 때, 동네 유지들이나 고위 공무원들이 아빠를 집으로 초대해 옷을 만들어 주길 청한 적도 있었다. 황금라사의 전성시대는 우리가 양복점 건물을 사자 막을 내렸다. 기성복은 빠르고, 확실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고, 라사를 밀어냈다. 매끈하고 반지르르하던 마네킹들은 때가 꼬질꼬질하고 칠이 벗겨져 흉측하게 변해갔다. 지금은 아이들의 교복을 맞추거나 동네 단골들이 수선하러 오거나, 가끔 재단일이 들어오면, 쿨러가 쿨쿨 댄다. 주인님, 기름 칠 좀 해 주세요. 하면서.
오늘 은하수 면접이라더니, 이거 챙겨 입고 가면 얼마나 좋아. 에이. 모르겠다. 알아서 하겠지. 했다가, 결국 아침밥을 포기하고 옷을 들고 황구의 고시원으로 찾아갈 때였다. 방정맞은 휴대전화 벨소리가 들렸다. 우리수의 전화였다. 신제품 홍보겸 시음회가 있으니 와서 박수 좀 쳐 줬으면 했다. 뭔 소린가 했다가 수고비도 얼마 챙겨 줄 것이라는 말에 두말하지 않고 가겠다고 했다. 시음회가 있는 강남 어느 백화점 앞에서 나는 박수를 쳤다. 행사를 진행하는 사람, 춤을 추는 행사 도우미들 속에서도 나의 혼신을 다한 손뼉은 빛이 났다. 손이 벌겋다 못해 얼얼하고, 아팠지만 5만원이나 받았다. 황구랑 직화구이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황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후로 나는 우리수 신제품의 박수 부대로 며칠 동안 시내 곳곳을 더 불려 다녔다. 계속 황구에게 전화를 했지만 황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래 가는 구나 싶었다. 학원비라도 조금 보태줄까 싶어 문자를 넣으려다가 관뒀다. 결정적으로 박수 치러 다닌다는 얘기도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직화구이 고기집 텔레비전 앞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고시원 앞 수퍼마켓에 들러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고 나오는데, 오늘 받은 일당이 만져졌다. 이 길로 나가봐도 괜찮을 듯 했다. 책상을 벗어나니, 재미도 있고,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니 나도 정.상.인이 된 것 같았다.
‘그럴듯한 행사 대행사로 키워보면 어떨까? 사이트에 박수회사 하나 만들어 놓고. 돌잔치, 백일잔치, 칠순도 뛰고, 각종 행사 환영해서 거창하게 꾸며놓고, 말이야. 광고만 잘 하면. 제일이보다 먼저 사장될지 누가 알아?’입안의 아이스크림이 사르르 녹았다.
황구는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았다. 슬슬 걱정이 됐다. 집으로 전화를 했다.
“별일 없으시죠?”
“그럼. 우리 걱정은 말아라. 황구가 옷 예쁘다고 하지? 네 껀 이주 정도 후에나 보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괜찮냐?”
“아....예.”
황구가 집에 간 게 아닌 모양이다. 수화기 너머로 재봉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뻑뻑한 것이 아직도 안 고쳤나보다.
“한 번 갈께요.”
전화를 끊자마자 벨이 울렸다. 제일이었다. 회사 기공식이 있는데 박수나 몇 번 쳐주고, 밥이나 먹고 가라고 했다. 특급호텔 요리니 먹기 힘든 것이라며, 황구도 데려오라고 했다.
나도 황구가 치는 박수소리를 듣고 싶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황구는 내가 술래인 걸 즐기고 있나보다. 한쪽이 고장 난 이어폰처럼, 팔 빠진 마네킹처럼. 황구가 비워둔 내 옆자리는 절뚝거렸다. 똑바로 눕지도 못하는 좁은 고시원 방에서 팔베개를 하고 웅크리고 누웠다.
행사장에 지각을 한 나는 옅게 들리는 박수소리를 따라 계속 달렸다. 익숙한 모습의 누군가가 보였다. 황구가 앞에 있었다.
황구는 나를 쳐다보더니 바로 앞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고, 나는 황구를 쫓아 뛰었다.
황구야 황구야
아무리 소리 질러도 돌아보지 않았다.
황구가 들어간 문을 열었다. 철문이 다시 나타났다. 또 열었다. 다시 또 나타났다. 나는 안간힘으로 사력을 다해 다시 문을 열었다. 문이 몇 개가 연달아 내 앞을 가로 막았다. 황구의 박수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지이이이, 직지이이이.
휴대전화의 진동이었다.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여보세요.”
“저그, 누구시오?”
“예?”
감고 있던 눈을 떠, 휴대전화의 액정을 봤다. 황구의 전화번호였다.
“황구야?”
“색시 이름인가? 색시가 전화기를 여기 두고 갔네, 와서 찾아가.” 잘게 떨리는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네? 거기가 어딘데요?”
“버리밥집.”
“버리밥집이 어딘데요?”
“마을 들어오는 길에 밥집 말이여.”
“그게 아니라 그게 서울에 있는 거예요?”
“서울? 무신 소리야 여긴 영덕이지.”
영덕이 어디야...도대체 거긴 왜 간 건지, 뭐가 있는 건지, 전화를 끊고, 바지부터 입었다.
마을은 상냥한 아가씨 같았다. 햇볕 조각들이 마을에 고여 부드럽고 나긋하게 움직였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풍경과 처음 봤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익히 봐 왔던, ‘아주 아주 먼 옛날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을에’라고 시작하는 옛날이야기를 듣는다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떠올릴 듯한 마을이었다.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침묵이 되려 편안하게 느껴지는 집들은 처마가 만들어 놓은 짙은 그늘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곳의 시간을 잡아 바람을 입히고, 나무의 날숨으로 칠을 해 곱디고운 가루로 만들어 질척거리고 있는 혼곤한 일상에 뿌려놓고 싶었다.
“여기 이 담장 참 예쁘지. 호미가 걸려 있는 것 좀 봐.”
조금 그을린 황구는 대문 앞에서 씩하고 웃었다. 만괴헌이라는 당호를 가진 집은 전통가옥이었는데, ㅁ자형의 주택으로 안방과 도장방, 상방 전면에 툇간이 있었다.
“이 집에 살던 사람이 가난하게 자라서 맨손으로 만금을 모아 홀로 가문을 일으켰는데, 돈을 많이 벌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왔대. 자신에게 논을 판 사람이 사기를 당한 걸 알고, 같은 논을 두 번사기도 하고, 의리하나는 짱이었다더라.”
의리라...“제일이네 낼 모레 기공식 한다는데?”
황구는 내 말에 대꾸가 없었다.
“너도 갈래? 맛있는 거 많이 준다는데? 호텔음식이래.”
황구는 만괴헌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 이렇게 불쑥 들어가도 되는 것인가? 나는 안채를 가린 담장 곁에서 머뭇거렸지만, 황구는 익숙한 몸짓으로 만괴헌을 짚어나갔다. 바람과 잠자리와 벌과, 마을을 사랑하는 햇살이 마당 안에 가득했다.
황구는 집을 나와 멀뚱멀뚱 땅을 차고 있는 내 손을 잡더니, 사과나무와 콩들이 담장 밖으로 몸을 내놓고, 주인의 발길을 기다리는 나락들을 지나 누군가 큰 토란잎들로 숨겨 놓은 듯한 팔작기와집 앞에 멈췄다.
“여기서 사람들이 공부했었대.”
“고시원처럼?”
“차원이 다르지. 여기 좀 앉아봐.”
충효당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과는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웅장하다기 보다 소박한 편에 마을을 향해 있는 모습이 단정했다. 뒤쪽으로 한 뿌리에서 두 개로 갈라진 회화나무도 볼 수 있었는데, 가을 햇살에 아직 밀리지 않은 푸른 녹음이 아름드리 큰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무엇이든 다 자신의 속으로 녹여 내는 것 같은 나무는 우리가 그 속, 어디에 모양을 잡고 앉아 있어도, 숨은그림찾기로 만들어 줄 듯 했다.
“고시원 나갈까봐.”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 일 잡았구나!” 황구가 목소리를 높였다.
“잡았다기 보다, 나 요즘 박수친다.”
나는 나무에 기대 서 있는 황구를 느끼며, 여차저차 박수치러 다니고, 인터넷에 카페를 만들고, 제일이네 기공식까지 이야기를 풀었다.
황구는 시선을 담장 밖으로 던지며, 물었다.
“재미있어?”
“재미보다는 돈이 들어오니까 덜 답답하고, 행사 다닐 때 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래도 내가 사회 어디에 끼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오라는 곳도 없고, 갈 데도 없고, 친구들은 치고 달리는데, 나는 먹고 노는 게 점점 더 익숙해지고, 어느 날엔 되려 면접 전화가 걸려올까 두려울 때도 있어. 어떤 식으로든 명함 한 장 파면, 되는 거 아닌가. 일단 시작하면, 어떻게든 길이 생기겠지. 운이 좋으면 제일이 보다 빨리 사장이 될 수도 있고. 잘되면 내가 누나 용돈도 줄 수 있을 것 같고....”
황구는 이마를 문지르더니, 입속에 물을 물고 내 뒤로 돌아 돌 위에 걸터앉았다. 열매가 빨간 얼음 보석처럼 박혀 있는 석류나무들을 바라보며, 방금 세수를 끝낸 산들과, 가끔씩 새하얀 구름에게 길을 내주는 쪽빛 하늘을 어깨에 걸고, 침묵하는 황구를 기다렸다. 황구 앞에 보여진 구부정한 나의 등은 어디가 접질린 듯 뒤틀려 있었을 것이다. 나비가 등 뒤에서 자꾸 미끄러지고 있었다.
“내가 뭐 보여줄까?”
황구가 발을 동동거렸다.
황구를 따라 간 곳은 지붕이 몇 개나 되는 제법 큰 종택이었다. 오봉 권책의 종가집이라고 쓰여 있었다. 촘촘하고 폭신하게 잘 깔린 잔디와 바라는 것 없는 바람 소리. 아기자기한 돌담과 여름을 정직하게 견뎌낸 순정한 녹음들이 속정 깊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의 왼편으로 없는 듯 있는 듯 대나무 숲이 알 수 없는 주문을 흥얼거렸고, 그 앞쪽으로 옥황상제의 정원, 오른편에 심어져 있을 것 같은 전나무가 대나무의 주문을 듣고 있었다. 어쩌면 제비가 흥부에게 줄 박씨를 여기서 준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쪽. 여기.”
황구는 몇 걸음을 옮겨 나를 보고, 손을 허리에 올리고, ‘김치-’ 했다.
어디서 봤는데...아 흑백사진.
“여기구나. 지푸라기 형님이던가?”
“형님이 아니라 아빠야. 아빠가 여기서 찍은 사진이야. 아빠가 백조의 호수, 지그프리트였을 때.”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지고, 귀가 늘어졌으며 배가 볼록 나온 아빠와 사진 속에서 눈이 빛나던 건강한 청년을 같은 인물로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아빠 꿈이 무용수였던 거 모르지. 나는 안다. 아빠가 이곳 돌담 위에서 마임을 했었어. 발끝으로 서서 아빠는 앙트르샤, 주테. 딸래미 아라베스크야. 우아하지? 그러셨지.
아빠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한 얼굴이었어. 이곳에서 자신의 발자국을 하나하나 짚어 새기려던 그 눈빛, 생명이 꿈틀대고, 아무 염려 없는 그 눈빛을 기억해, 면접장에 가면 그게 자꾸 떠올랐어. 재봉틀 앞에서 빈 눈으로 노루발 사이로 옷감을 밀어 넣는 아빠 말고.
어렸을 때 아빠는 나를 앞에 앉히고, 노루처럼 뛰어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싱싱하게 펄떡거리는 근육들을 격렬하게 허공으로 띄우고, 접혀있던 날개를 폈지, 시뻘건 피를 뜨겁게 데워, 사위의 모든 계절을 당신 속으로 숨겨 버렸던 아빠를 기억해.”
사진속의 아빠가 이곳 정원 사이를 뛰어 다니는 듯 했다. 정침 뒤에서 사그락거리는 대나무 숲의 주문을 들으며, 아빠는 몸으로 꿈을 노래하고, 꿈의 노래를 들은 희망은 다시 그 곳에서 노래가 새긴 흉터에 생명이 들어차는 고통을 느끼며 몸을 떨고 있었다.
“은하수, 최종 면접 봤어?”
“안 갔어.”
황구는 마루에 앉아 하늘을 응시했다.
“나 은하수 말고도 최종 면접 안간데 많아.”
“미쳤구나. 지금이 어느 땐데...”
“금구야, 나는 자꾸 도망치고 싶어. 아빠가 내게 기대하고 있다는 거 알아. 공부도 열심히 했고, 졸업도 빨랐지만 난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어. 하고 싶은 게 없으니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빛나는 청춘이 싫어. 내가 그 속에 있다는 것도 싫고, 나 같은 청춘이 수백 수천이고, 도대체 청춘이 뭘 할 수 있는데, 떠밀리듯 취직하지 않으면 낙오자라는 소리나 듣고, 하지만 나는 이제까지 네 꿈이 뭐니 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 꿈도 없는 청춘이라고. 꿈도 없는 청춘이 시절을 축내고 있지. 사실, 너 모르게 한 달 정도 회사에 다녀봤는데, 아침마다 눈뜨는 게 지옥 같더라고. 눈을 뜨자마자 슬퍼졌지. 정신을 차리자마자 슬퍼지는 거야, 회사를 가는구나. 착착 직사각형 투명 플라스틱 통 안에 담겨 나온 100장의 명함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어. 그 따위가, 나를 쪼개서 가두고 있었어. 나는 내가 뭐가 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내가 뭘 싫어하는구나만 깨달았어. 한심하다는 거 알아. 별나다고 하겠지. 면접을 포기할 때마다 아버지의 기대가 머물던 자리가 아프고 쑤시지만 내 인생을 깜깜한 정전 속으로 몰아넣을 순 없잖아.”
하고 싶은 것이 없어서 슬프고 눅눅한 심정을 마음에 괴어둔 채 살아야하는 청춘. 암담하고, 막막하고, 빛이 없는 정전이었다. 손을 놓고 기다리든, 빛을 찾아 더듬거리거든, 발송중이라는 단어만 뜨는 이메일처럼, 서버를 찾을 수 없다는 따따따www 처럼. 아직 결정된 바는 없지만 검토 중이라는 원청회사 대답 같은 우리의 내일, 우리는 내일을 기다렸지만 내일이 답답하기도 했다.
“사진 찍을까?”
내가 황구의 손을 끌어 당겼다.
“나중에 애들한테 보여주자. 정전 됐을 때, 겁먹은 엄마라는 제목으로.”
“너는?”
“정전이 편했던 삼촌이라고 적지 뭐.”
노을이 번져왔다. 해가 지니 쌀쌀해졌다. 황구에게 겉옷을 벗어주었다. 계절이 제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하늘을 높게 올리고, 서둘러 열매의 색을 바꿔주고, 꽃을 떨어뜨리고, 나뭇잎을 색칠하고, 바람이 몸을 일으킬 때마다 계절이 분주해졌다. 계절은 제 길 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잘 몰랐다. 뿌리를 내릴 땅은 어디고, 어떤 꽃을 원하는지, 우리가 가진 씨앗은 뭔지, 도망치고, 빗나가고, 흘러가고, 우리는 혼란스럽고, 아팠다. 갈지자 같은 걸음이 하루를 쓸어갔다. 행동하든, 생각하든, 무엇이든, 어떻게든 우리는 짧은 발을 버둥거렸다. 같은 계절로 다른 시간을 보내고, 세월을 쌓은 앞선 사람들이 무릎이 꺾이고, 바퀴도 없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이야기 하는 걸 보면, 어디로 가든, 정답은 모르겠지만 틀린 답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바람에 손을 넣어 박수를 쳤다. 불을 지펴야 했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올 수 있도록.
- 글쓴이 : 이선아
- 1977년생, 숭실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글 쓰고 책 읽기를 매우 좋아하며, 영화관에 혼자 가는 것을 즐긴다. 글 쓰는 직업을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있다. 현재 안동 MBC에서 구성 작가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