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황구하_시로 거니는 상주]공갈못, 또 하나의 우주
- 황구하
땅거미 내려앉는 초가을 저녁, 공갈못가를 거닐고 있습니다. 여름 내내 환했던 백련과 홍련이 이제는 점점 사그라지는 서로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네요. 사방은 고요하고 연밥에 촘촘히 박힌 연자도 숨죽인 채 또록또록 익어갑니다.
오늘 낮에 택배로 온 책들을 주섬주섬 꺼내는데 느닷없이 커다란 보름달이 쑤욱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책과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어느 화가의 팸플릿이 미끄러지면서 ‘만월(滿月)’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척 펼쳐진 거지요. 어스름한 연못 위 고개 숙인 연잎과 연밥, ㄱ자 누정 기와지붕 끝에 걸려 있는 커다란 보름달이 연못에 또 환하게 떠서 찰방거리는 수묵담채 그림이었습니다. 한없이 깊고 그윽한 가을의 정경이 가슴속으로 쏴아 밀려와 저로 하여금 기어코 여기 이렇게 서성거리며 저녁달을 기다리게 합니다.
공갈못은 제천의 의림지, 김제의 벽골지와 함께 삼한시대 내지 기원전 1세기경의 고령가야국시대에 축성되었다고 추정합니다. 공갈못은 옛 고녕가야(古寧伽倻)의 땅입니다. 고려 현종 때는 함창현(咸昌縣) 남면(南面)에 속했지요. 이 못은 한자로 “공건(功建) ․ 제공건제(堤公倦堤) ․ 공골지(空骨池) ․ 공검지(恭儉池) ․ 공검(恭儉) ․ 검호(儉湖) ․ 공검호(公儉湖)”등 여러 가지로 쓰고 있으나, ‘공갈못’이란 이름은 한자표기 이전 순수한 우리말이지요. 신채호는 ‘고링가라(古寧伽倻)’의 와전으로 ‘공갈’이 되고, 지금 공갈못이 그 유허(遺墟)라고 했습니다. 즉, ‘공갈’은 ‘큰물’ 또는 ‘큰물이 갈라지는 곳’이 됩니다.
한편 공검지 축조방법에 바탕을 둔 ‘공글리다(땅바닥을 단단히 다지다) ․ 공구다(곤고다, 돋우다, 받치다)’라는 방언에 바탕을 둔 의견도 있지요. 그리고 공갈못 축조목적인 관개수리와 관련 ‘공알’이라는 말에서 그 어원을 찾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농경문화, 즉 쌀과 관련됩니다. 상주는 넓은 곡창지대였습니다. 농경생활이 시작되면서 수리시설의 필요성은 더할 나위 없었겠지요. 그런 면에서 공갈못의 역할은 지대했을 겁니다. 쌀이 우리의 생명인 것처럼 공갈못은 그 생성의 근원이요 오래고 오랜 생명의 자궁, 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성과 자애의 뜻을 소박하게 ‘공알’이라고 지칭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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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갈못 풍경 |
이 못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한 연대를 모릅니다. 정약용의 『아언각비(雅言覺非)』에는 “공갈못이 중국의 오호(五湖)나 동정호(洞庭湖)와 같은 호(湖)의 규모를 가졌다(空骨池, 眞是湖也)”고 하였고,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는 “둑 길이는 880보요, 둘레는 22리다.(長八百八十步, 周二十二里)”라고 하여 “남쪽에서는 가장 큰 못(南方陂澤之最大者)”이라 하였습니다. 「고려사」에 “명종(明宗)25년 사록(司錄) 최정분(崔正汾)이 옛터에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명종25년 이전부터 이 못이 존재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공갈못은 그 명성만큼이나 많은 전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문학성뿐만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아 온 민중들의 삶과 의식이 잘 녹아있기에 더욱 값지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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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사방의 물이 하도 많아 둑을 쌓으면 터지고 하여 ‘공갈’이란 아이를 못 둑에 묻고 쌓아 ‘공갈못’이란 이름이 되었다는 매아(埋兒)설화 ②못 둑 공사현장에서 굶주린 백성들의 참상을 보고 ‘사람을 묻지 않으면 못 둑은 영영 완성되지 못한다.’는 중의 말을 따라못 둑에 묻히기를 자처한 중을 말뚝 삼아 둑을 완성하였다는 인주(人柱)설화 ③상주 공갈못 청룡과 경주 용담 황룡의 결혼을 반대하는 백룡과의 사랑싸움 쌍룡연투(雙龍戀鬪)설화 ④국사봉(國祀峰) 신이 된 용 이야기 ⑤공갈못에 얼음이 얼면 용이 얼음위에 밭갈이를 하여 얼음이 갈라터지는 그 형상을 보고 다가오는 해의 흉 ․ 풍년을 점쳤다는 용경(龍耕)설화 ⑥겨울밤인데도 못 근처에 있는 소들은 땀을 흘리는데, 그것은 소들이 밤을 새워 공갈못 얼음을 갈기 때문이라는 우경(牛耕)설화 ⑦붉은 콩 서 되를 하나씩 먹으면서 말을 타고 못가를 돌아도 콩이 모자란다는 공갈못 크기 설화 ⑧백곡(百谷)의 물이 이 못으로 흘러 들어오면 당상(堂上)이 날 텐데 구구속수(九九谷水)가 들어 와서 당상이 나지 못했다는 지형(地形)설화 ⑨공갈못 구경을 못하면 저승에도 못 간다는 이야기 ⑩공갈못 용을 잡은 이여송(李如松)설화 ⑪뱀과 거머리가 없다는 못물설화 ⑫지킴이 건드려 공갈못이 메워졌다는 설화 ⑬기타 소란 거북이 ․ 가마실 ․ 오리실 ․ 물탕골 등의 지명(地名)설화 |
이렇게 다양하게 전해지는 이야기와 함께 ‘연밥 따는 노래’가 공갈못을 상기시켜주지만 온전한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 자리가 들판이 되고 마을이 되고 시장이 된 것이지요. 상주, 함창 간 국도에서 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공갈못 노래비’와 ‘공갈못 옛터’ 비가 서 있습니다. 조금 남았던 못터도 인근에 오태저수지가 완공되면서 1964년에 완전히 메워졌다고 합니다. 민요와 전설을 거느린 옛 공갈못은 사라지고 다만 몇 년 전 복원해놓은 지금의 못이 있지요.
최근 지역에서는 본격적으로 공갈못 복원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공갈못 옛터 주변의 논을 모두 연못으로 바꾸고 못의 규모를 더 크고 깊게 하기 위해 공사가 한창입니다. 중요한 것은 외형상의 복원을 넘어 역사적 가치존중과 지금 여기를 끌어안는 정신,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삶의 문화로 채워지도록 하는 것일 겁니다.
문화예술계에서도 다각적으로 고민하고 궁리하며 공갈못을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공갈못 연꽃 문화제’가 열리는가 하면 공갈못 이야기 ‘상주 함창 공갈못에’를 인형극으로 선보이기도 하고, 지역 음악가가 작곡한 공갈못 주제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연밥 따는 노래’ 춤과 낭송공연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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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 함창 공갈못에’ 인형극(인형극단 공갈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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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갈못, 연밥 따는 노래’ 춤과 낭송공연(상주거리문화예술단) |
그렇습니다. 공갈못은 우리네 현실과 꿈의 공간입니다. 거기엔 천 년의 역사가 있고 삶이 있고 정신이 있습니다. 학술사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농경, 음악, 연극, 뮤지컬, 마당놀이, 인형극, 사진, 민속, 문학, 미술 등 문화예술의 무량한 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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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光澹澹屬新晴 가을빛 담담하여 새 맑음을 더했는데 |
졸재(拙齋) 채소권(蔡紹權. 1480~1547)이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의 『함창팔경(咸昌八景)』중「검호추월(儉湖秋月)」에 차운한 작품입니다. 이 시는 마치 오늘 낮에 건너온 팸플릿 그림 직전의 한 장면처럼 해지는 가을날의 공갈못 정경이 쓸쓸하고 아련한 먹 향으로 다가옵니다.
또 조찬한(趙纘韓. 1572~1631)은 “좌우를 살펴보니 푸른 연잎이 덮개처럼 뜨고 연대는 수풀처럼 죽 늘어섰는데 천연스런 꽃봉오리가 묏봉우리처럼 돋은 위를 배가 지나가니 맷돌 도는 소리가 나고 천의 생황과 만의 잎사귀가 누웠다가 다시 일어서며 붉은 연꽃이 서로 비비고 푸른 잎이 서로 부딪혀 향기는 바람 되어 사방으로 번졌다(顧眄左右, 則翠蓋林立, 天葩峯茁, 舟行其上, 碾然有聲, 而千竿萬葉, 偃而還直, 磨紅戛碧, 香泛爲風.”고 「공검지기」에 기록하였지요. 진흙 속에서도 정갈하고 우아한 꽃을 피우는 연꽃은 혼탁한 세상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는 상징으로 존재합니다. 그 연꽃이 싹트고 꽃피우는 모태는 바로 연못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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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황구하
-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