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안상학_안동이 건네준 시와 말]병산 노을
- 안상학
병산 노을
쌍매화를 보러갔다가 꽃은 못 보고
대숲 일렁이는 서쪽 너머
세상에서 가장 큰 꽃으로 지는 노을만 보았네
만대루 마루 가득 내려 쌓이는 노을꽃잎만 보았네
쌍매화 보러갔다가 꽃 그림자는 못 보고
그대 가슴에 사랑이 꽃으로 지는지
내 가슴 마루 가득 꽃물들이고 우네
사라랑사랑 노을 물든 솔바람 소리
심장에 들이고 귀 기울여 우네
시작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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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은 언제 가도 좋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대로 다 좋다. 아침이면 아침, 저녁이면 저녁, 달밤이면 달밤, 별밤이면 별밤, 아니, 시도 때도 없이 다 좋다. 혼자서도 좋고 둘이서도 좋다. 술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병산이 있고, 강이 가로질러 흘러가고, 당연히 모래톱은 자기 마음대로 드러누워 있고, 병산서원은 꽃산을 베고 누워 있다. 비포장도로를 타고 들어가는 거기, 세상과는 영판 다른 딴 세상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지만 시도 때도 가고 싶지는 않다. 오래 드나들다보니 그리울 때가 따로 생겼다. 1월의 함박눈 내릴 때, 2월의 만대루에 겨울 노을 스밀 때, 3월의 병산 반달 뜰 때, 혹은 매화 필 때, 4월의 병산 진달래 필 때, 5월의 푸른 비 내릴 때, 8월의 나무 백일홍 필 때, 10월의 병산 단풍 들 때, 11월의 북풍에 낙엽 질 때가 그렇다.
이 시는 2002년 2월 말경 어느 저녁 무렵에 병산에 들렀다가 우연히 노을을 만나고 쓴 시다. 겨울이어서 해가 남쪽으로 내려가서 지는 까닭에 만대루 서쪽에서 바로 노을빛이 물들어왔다. 서쪽 먼 산에 붉은 해가 화인처럼 걸린 채 강렬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빛은 반질반질한 만대루 마룻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마루는 무슨 호수인 양, 바다인 양, 출렁이며 그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아니, 깊이 노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순간 나는 난바다 한 복판 범선에 앉아 노을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 황홀경은 자못 강렬한 것이어서 지금까지도 눈에 선연하게 남아 있다.
그날은 성질 급한 매화가 혹 몇 송이 내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마음으로 갔다가 매화는 못 보고 세상에서 가장 큰 노을꽃을 본 날이었다. 그 노을은 마음 좋게도 내 마음까지 짙게 물들여 주었다. 노을과 만대루 사이 바짝 마른 대숲이 바람의 행방을 일러주고 있었다. 대숲의 그림자가 일렁일 때마다 노을도 출렁거렸다. 내 마음도 따라 흔들리던 날이었다.
- 글쓴이 : 안상학
- 1962년 경북 안동 출생.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7年 11月의 新川」당선. 시집으로는 『그대 무사한가』(1991), 『안동소주』(1999), 『오래된 엽서』(2003), 『아배 생각』(2008) 등이 있다. 현재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