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이선아_바람 따라 구름 따라]울진 소광마을
- 이선아
오늘부터 만성 갈 것. 돈 조났음. 안 가면 혼날 꺼심.
한번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 엄마의 글씨는 언제나 바람에 날렸다. 밥도 먹기 전에 쪽지를 보자, 한숨부터 나왔다. 만성 학원은 선생들이 까다로웠다. 통로도 좁고, 강의실도 좁았다. 강의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옆반에서 영어 따라 읽는 소리나 수학 선생이 이차 함수 그래프 그리느라 분필 부러뜨리는 소리가 딱딱 들렸다. 게다가 버스 정류장 근처라 각지에서 아이들이 몰려, 학원은 매일 북적거렸다. 자판기도 없었고, 물을 마시려면, 13개나 되는 강의실을 지나, 두 개의 독서실을 지나, 문제집을 배부하는 접수실을 지나 휴게실로 가야 했다. 휴게실안에서 정수기 앞으로 가려면, 파란색이거나 하얀색이거나 회색이거나 삼삼오오 교복들이 짝을 지어 만들어 놓은 미로를 지나, 덩치 큰 아이들이 마트로시카처럼 버티고 서 있는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왼쪽 구석에 젖은 낙엽 처럼 붙어 있는 정수기를 찾아야 했다. 정수기에 도착할 때마다, 나는 70년동안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가마가 되는 것 같았다. 목마른 자들이여 닻을 올려라. 그도 나도 반드시 다가마. 만성학원에서 제일 끔찍했던 건 매일매일 치는 단어 시험보다, 우등반, 열성반, 특별반, 그리고 노력반으로 나눠 놓는 학원의 열심이였다. 지금 다니는 학원에 가기 전에 만성 학원에 한달간 다닌적이 있었는데, 열성반으로 들어갔다가 노력반으로 떨어졌다. 학원이 창립이래 최단기간이라며, 노력반 국어 선생이 문제집을 쥐어 줬다. 문제집을 받은 순간부터 한달내내 어떻게 하면 학원을 옮길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괜한 짓이였다. 방법을 찾지 않아도, 중간고사 성적이 나오자 자연스럽게 가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엄마가 며칠, 머리를 싸매고 누워 생각을 하셨다.지금 다니는 학원은 단어 시험도 한 달에 한 번, 수학 숙제는 없었다. 진도도 많이 나가지 않았고, 중 3반이라고 해봐야 7명이 고작이였다. 무엇보다 집에서 가까워서 좋았다. 좋은 시절 다 갔구나 싶었다. 국을 데우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서 밥을 먹었다. 장조림과 김치, 9절 11매짜리 김을 두 개 챙겨 도시락을 쌌다. 계란 말이를 만들어 볼까 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매점 가서, 보름달 하나 사 먹어야지.’ 쪽지와 수강증, 용돈을 주머니에 넣고 현관문을 잠궜다.
“변함없구나.” 노력반 국어 선생님이 나를 보더니, 한마디 했다. 문제집을 받으러 갔다가 한달 동안 나를 경험한 국어 선생님에게 붙들려 내게 꼭 맞게 설계 했다는 맞춤형 학습법과 현실 가능한 목표 등수. 그리고 엄마가 바라는 나의 등수. 그 둘 사이의 크나큰 격차, 게다가 나의 실력과 인성에 관한 네버엔딩 스토리를 들어야 했다. 잡생각이 절로 났다. 만화책을 챙겨 왔던가, 아침에 바쁘게 나오느라 잊은 것 같은데, 어떡하지? 뒤에 앉아 만화나 그려야 겠다. 가만, 노력반이 몇 명이지? 그새 아이들이 줄었으려나, 에이 설마. 나름 대로 열심히 수업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국어 선생님이 따라와 했다. 노란 문 앞으로 가더니, 들어가, 열심히 해. 했다. 예? 저는 저기 빨간 문 인데요? 여기 맞아. 국어 선생님이 등을 떠밀었다. 특별반이였다. 상위권의 아이들만 모여 있는 반으로 진도도 그렇고, 실력도 그렇고, 내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다다를 수 없는 세계 였다. 똥도 못싼 우주 고아가 된 기분이였다. “엄마 한테 감사드려라.” 국어 선생님의 목소리가 뒷목부터 정수리까지 연결된 활주로를 타고 날아 나를 특별반으로 밀어 넣었다.
특별반은 책상과 의자부터 달랐다. 낙서도 없고, 반질반질 한 것이 문제집을 펴면, 그대로 눌러 붙을 것만 같았다. 책상은 하나하나 떨어져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넓은 강의실이 휑 했다. 어디에 앉아야 조금 덜 보일까 싶었다. 세시간을 버티려면 만만치 않으리라. 앞에 누가 앉느냐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특별반에는 아는 친구, 아니 애들이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에 어떤 자리를 먼저 선점하느냐가 중요했다. 책상의 배열을 빠르게 훑었다.
첫 시간, 수학 선생님은 계속 나와 눈을 맞췄다. 수학 선생님의 안경 너머 작은 눈을 쫓아 다니느라 눈에 쥐가 날 것 같았다.
“이차함수 y=-2x²+4x의 그래프를 x축의 방향으로 m만큼,......”
수학 선생님의 목소리가 줄었다가 다시 커졌다가 줄었다가 다시 커졌다가.
“y축의 방향으로 n만큼 평행이동시켜보면....” 점점 작게 들리더니.
“신입. 새.. 아이야 ” 목소리가 희미하게 느껴지더니,
“나와 보라고!” 엄청 커졌다.
“잠이 오나? 나와서 풀어 본나.” 수학 선생님이 손짓을 했다.
정적이 흐르고, 끼이익, 의자가 몸을 떨었다.
뚜벅 뚜벅 칠판 쪽으로 나아갔다. - Lascia ch'io pianga 나를 울게 내버려 두소서
교단으로 올라 짧은 분필을 잡았다. - Mia cruda sorte 비참한 나의 운명이여
일단 문제 아래에 =부터 썼다. y를 최대한 천천히 썼다. - È che sospiri la libertà! 나의 (잃어 버린) 자유에 난 한탄하네
식을 다시 한 번 그대로 아래에 베껴쓰고, 왼쪽 칠판에 그래프를 그렸다. 수학 선생님이 말했다. “인수분해 문제잖아.” - È che sospiri 난 한탄하네
“화장실가서 씻고 온나.”
수학 시간은 생각보다 거칠었다. 이대로 안 되겠는데, 전략을 수정해야 겠다. 이를 닦으며 생각했다. 입에 물을 넣고, 가글을 하며 오늘 집에 돌아가는대로 엄마와 사생결단 담판을 짓겠다 맹세했다.
영어 문제집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턱하고 문제집을 펴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진도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물어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용재였다. 용재가 공부를 잘했던가? 용재는 우리 동네, 정확하게 말하고, 우리 집 길 건너, 오른쪽으로 30mm 아래 쯤 내려가면 보이는 국수집 아들이다. 용재네는 국수를 직접 밀어서 팔았다. 학교를 마치고 오다 보면, 길게 뽑은 국수를 나무에 걸어 말리는 모습이 보였다. 용재의 엄마는 멜빵 바지와 두건을 쓰고, 가게 안 국수 커텐 속에서 밀가루를 치대고 밀기도 했는데, 언뜻 보이는 얼굴이 엄마보다 10년은 젊어 보였다. 용재의 엄마는 이곳 사람이 아니였다. 토박이들만 사는 이곳에 오게 된것은 순전히 용재 아빠 때문이였는데, 용재 아빠는 불의를 못 참는 정의감이 머리에서 시동을 걸면, 용재 아빠의 탄탄한 근육에서 나오는 물리적인 힘이 격하게 작동 되어 가끔 큰일을 치르는 탓에 동네에서 따르는 동생들이 있고, 모시는 형님이 있는 분으로써, 명성이 자자했었다. 한번은 기차길에서 형님과 아우가 있는 식구들을 실제로 거두는 자로서의 사명감을 다하기 위해, 생애 단 한 번 선빵을 날리는 큰 임무를 맡게 되었다가 다리를 다치게 되었고, 그 때 간호를 해 주던 간호사가 용재의 엄마였다. 둘은 사랑했고, 때문에 용재 엄마의 고향에서 도망쳤다. 용재가 태어나고, 용재를 맡길 곳이 없던, 아줌마는 가내 식품업인 ‘국수’를 밀기 시작했고, 다행이 밀개가 집을 자주 비우는 용재 아빠를 대신해 침입자를 막아낼 수 있는 무기의 역할까지 훌륭하게 수행해 주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엄마는 용재네 집이 이사오던 날, 아침 먹는 날 앉혀 놓고, 물 시중 까지 들어가며 용재네 집안 얘기를 했다. 만리장성보다 길던 엄마의 얘기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들이라는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내 귓속에 콕 박혀서, 용재를 볼 때 마다 엄마 아빠를 닮아 잘생기고 싸움도 잘하고, 사랑에 용감하며, 국수도 종류 별로 먹을 수 있는 환희의 아우라가 가득한 용재가 떠올랐다.
운동을 하고 왔는지, 곁에 앉은 용재에게는 땀냄새가 났다. 용재와는 학교가 달라서 볼 기회도 없었고, 용재네 국수집은 엄마가 근처에도 못가게 했기 때문에, 차라리 일년에 한 번 공설운동장에서 관내 학교 학생들이 시민체전 응원 연습하러 모일 때 보는 편이 빨랐다. 이렇게 보게 될 줄은...가슴 저쪽에서 무언가 팔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에게 정말 감사해야 겠다.’ 국어 선생님은 역시 선견지명이 있으신 훌륭한 분이셨다.
“학원은 갔어?”
“응.”
“문제집 주더니?”
“응.”
“이번에 정말 열심히 해야 한다, 너 지금 이대로면, 고등학교 떨어져서, 딴데 갔다가 다시 전학와야 해. 너 특별히 신경 써 달라고, 선생님 한테 내가...”
“엄마, 밥 좀 더 줘.”
“어? 그래. 국은 됐어?”
“건더기만 더 줘. 엄마는 오늘 어디 갔다 왔어?”
“어디라고 그러면 네가 아니? 넌 몰라도 돼. 원래 네가 머리는 좋아. 근데, 그 때, 그일 때문에..." 엄마는 굴비를 찢어 밥위에 올려주다가, 말을 멈칫 했다.
“괜찮아. 다 잊었어.”
2년전, 중학교에 입학하고, 골목을 지키는 윗 선배 언니들에게 맞은 적이 있다. 털었더니 천 오백원 밖에 안 나왔다고, 입술이 터지고, 귀가 찢어지게 맞은 적이 있다. 새로 산 운동화가 너무 하얗다는 것도, 몸보다 큰 노란 가방이 미제라는 이유로 몇 대 더 맞았으며, 잘 접어 신은 흰 양말도 기분 나쁘다고 했다. 언니들 중 반은 가방을 열어 색깔별로 갖춰놓은 한자루에 2천원이 넘는 펜과 가방과 짝을 맞춰 산 필통, 레코드 가게에서 산 최신 가요테이프, 소가죽으로 만든 수제 지갑을 구경하기 시작했고, 반은 내게로 다가와 때리기 시작했다. 분홍 손목 시계는 밟혀 깨졌고, 아침에 엄마가 다려준 교복이 가리가리 찢어졌다. 손등과 발목에는 언니들이 뱉은 침과 가래가 찢어진 상처에서 터진 피와 섞여 끈적거렸다. 골목안은 어두웠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으며, 나는 쓰레기통 옆에서 썩어갔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였고, 온몸이 욱신거려 물 한모금 삼킬수가 없었다. 엄마는 내손을 잡고 계속 울었었다. 엄마는 그대로 갚아주겠다고 했지만, 결국 선배언니들은 무사히 졸업했고, 지금은 어디서 잘 살고 있을 꺼다. 아마도. 그 후로 나는 학교에 정을 붙이지도 못했으며, 친구도 없었고, 말도 없었으며, 집안에서만 숨을 쉬고 살았다.
“ 공부 좀 해라. 엄마가 다 해 줄게. 학원 말고 과외 할래? 일단 좋은 고등학교부터 가고, 좋은 대학 가고, 니가 서울유니빠스에 안가면 누가 가?”
“유니벌스티. 요새 보러 다니는 땅은 좋아?”
“그런 거 신경쓰지 말라니까 자꾸 그러네. 너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 잘 되면 이사 갈 수도 있고.”
엄마는 콩과 보리를 섞은 밥을 그릇에 고봉으로 얹어 담고, 고기만 건진 육개장을 떠 줬다.
“염소 아줌마가 일수 찍겠대. 전화해 달래.”
“전화 왔디? 그런 얘길 왜 집으로 전화 하고 난리야. 여편네 무식해서는.”
“엄마 내일도 일찍 나가?”
“어? 어...응.”
“내일은 엄마 도시락 먹고 싶어. 내가 한 계란 말이는 맛이 없어서. 역시 엄마가 최고야. 당근이랑 파 넣고 엄마가 해 주면 안돼? 아니면 김 넣고.”
“그래.”
엄마의 얼굴이 환해졌다.
용재는 감기에 걸렸는지, 내 뒤에 앉아 계속 콜록 거렸고, 쉬는 시간에는 엎드려 있었다. 마지막 영어 시간이 시작됐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영어 선생은 엎드린 용재를 계속 깨우다가, 용재가 약을 먹겠다며 주머니를 뒤져 약 봉지를 꺼냈다. 영어 선생은 나가서 먹고 오라고 했고, 용재는 물 없이도 먹을 수 있다며 손으로 곱게 접은 약을 펼쳤다. 에취이 - 소리와 함께 가루약이 날렸다. 내 눈앞에 용재가 보낸 눈이 내렸다. 반짝 반짝, 예쁘기도 했다. 영어 선생은 용재의 감기가 떨어지도록 때렸고, 용재에게서 떨어진 감기는 내게 철썩하고 붙어버렸다. 용재만 생각하면 온 몸이 불덩이 같아 졌다. 불덩이를 간직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 졌고, 나는 약도 없는 병에 걸렸다.
“너 쟤 좋아하지?”
잘 못 들었나?
“뭐?”
“용재. 너 용재 좋아하잖아.”
채 달이였다. 달은 우리 학교에서 제일 예뻤다. 게다가 성격도 털털하고, 공부도 잘했다.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친절했으며, 노래도 잘했다. 달을 보고 있으면, 신은 공평하시다고 하더니, 가끔 실수 하시나보다 싶었다.
“안녕. 난 채 달이야.”
안다. 하지만 갈증으로 목이 쩍쩍 갈라지는 날, 어찌 어찌 수박 한통 서리하여, 엉거주춤 나오다가 제대로 엉덩이를 걷어차였는데, 통성명이 하고 싶겠는가?
나는 괜히 필통을 꺼내, 볼펜들을 챙겼다.
“너 강 피리지? 너랑 2학년때 같은 반이였는데, 혹시 기억나?”
“아니.”
생각과 다른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럴 줄 알았어. 너 앞에서 두 번째 앉았었잖아.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 처럼 움직이고, 다른 사람과 나누지도 않고, 고요하면서, 뭔가 있는 듯 하고.”
쉽게 좀 가자. 말도 없고 친구도 없고, 그냥 존재감이 없다고 말해.
“이거 먹어 볼래?”
달은 까만 비닐 봉지를 책상위로 올리더니 부스럭 거리며 봉지를 풀었다. 작고 갈색빛이 도는 깨가 박힌 도넛츠였다. 크기가 조금씩 달랐는데, 설탕이 묻어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는 것도 있었다.
“먹어 봐. 도넛츠 싫어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달은 설탕이 묻은 도넛츠 하나를 집어 내게 자꾸 권하였다. 도너츠가 입속에서 사르르 녹았다. 달은 도넛츠 봉지를 내 쪽으로 밀더니, 수업 준비를 하러 가버렸다. 나는 달이 보고 있을 것 같아. 도넛츠를 하나 더 먹고, 봉지를 매조지 한 다음 가방 속에 넣었다. 뒤를 돌아 봤더니, 달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달은 우리 집에서 버스로 다섯 정거장 쯤 되는 곳에 살았다. 엄마가 중앙 시장에서 분식점을 했다. 가끔 남은 밀가루로 달의 간식을 만들어 싸 주는데, 도넛츠는 엄마가 가장 자랑하는 간식이라고 했다. 달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찐빵과 만두도 내밀었고, 우유와 크림빵, 소보루빵과 초컬릿도 가져왔다. 화수분 같았다. 엄마가 크림빵도 만드시냐고 물었더니, ‘아니, 어디서 났어.’ 하며, 크림빵을 까 내입에 넣어주었다. 달이와 나는 학원에서 꼭 붙어 있었고, 다른 반이였지만 학교에서 도시락을 함께 먹는 사이가 됐다. 달은 내게, 열심히 공부하는 척 하면서, 딴 생각을 하는 방법도 알려 주었고, 교복을 맵시 있게 입는 방법이나, 컷트를 잘하는 미용실도 알려주었다. 새로 나온 지압 양말이나, 예쁜 방석을 파는 곳, 싸고 필기감이 좋은 샤프와 질이 좋은 스프링 노트도 알려주었다. 달과 내가 가까워지자 내게도 변화가 생겼는데, 전에 없이 아이들이 나를 알아보거나, 혹은 친절해 졌다는 것이다. 학원에서 고등학생 오빠들이 내게 달에게 전해주라며, 분홍색의 편지를 건네주기도 했었다. 달은 연애편지를 대부분 나와 함께 읽었었다. 편지의 주인은 내가 모를 때가 많았는데, 달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음을 엿보는 일이, 처음에는 재미있더니, 그내용이 그내용이라 나는 달이가 읽어주는 걸 듣거나, 달이가 재미있는 편지라고 하면, 같이 읽고 키득 거렸다. 한번은 흰색과 파랑색이 섞인 편지를 읽던 달이, 만화를 그리고 있던, 내게 편지를 불쑥 내밀었다.
“왜? 누군데?”
“몰라. 근데, 용재 친구가 준거야.”
“용재가 보낸 거라고?”
“아니, 용재 친구가 전해 준 거라고.”
편지에는 별 내용이 없었다. 좋아한다. 공부 열심히 해라 뭐 그런 내용이였는데, 맞춤법이 많이 틀려 영어 지문 처럼 해석을 해야 했다.
‘용재가 달이 좋아하나...아이..뭐야?’
“용재 아니야.” 내 표정을 살피던 달이 어깨를 쳤다.
“네가 어떻게 알아?”
“편지를 많이 받으면, 주인이 어떤지 대강 그림이 나오지, 용재는 정말 아니야.”
“너 용재 편지 받아 본 적 있어?
“아니. 근데, 확실히 용재는 아니야. 나한테 관심이 없어.”
“어떻게 알아?”
“딱 보면 알지. 백짓장 같은 네가 뭘 알겠니. 친구야, 분발하렴. 용재한테 고백은 언제 할꺼야?”
“그런 거 안해, 혼자 좋은 거지 뭐.”
“내가 대신 해 줄까?”
“뭐? 아니야, 아니야.”
“누가 직접 말한대?” 하더니, 달은 노래를 불렀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나는 다시 만화를 그렸다.
“오늘 우리 집에 가서 놀자. 학원 가지 말고.”
땡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학원을 가던 길이었다. 잡고 있던 달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엄마 늦게 오셔. 가서 맛있는 거 시켜먹고 놀자.”
아이스크림을 먹던 달이가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씩 웃었다. 우리는 뛰기 시작했다.
집앞에 도착해, 대문을 여는데,
“용재다.”
달이 낮게 속삭였다.
“어? 그래?”
내가 고개를 돌렸다. 용재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화끈 거려 시선을 땅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용재가 여기 왠일이지?”
“이근처 살아.”
“그럼 더 잘 됐네, 고백해. 학원도 같이 다니고.”
“싫어. 엄마가 싫어해.”
“왜?”
“물든대.”
“너는?”
“나는 뭐?”
“그래서, 안 좋아 할꺼야? 엄마가 말리니까?”
“아니, 지금도 좋아하잖아. 엄마 모르게. 히히. 근데 애들 괴롭히는 건 좀 그래. 들어와.”
달은 천천히 우리 집을 둘러보았다. 자개 장롱과 천연가죽 쇼파, 대리석 테이블. 안방에 걸린 그림이며, 화병, 바닥에 깔린 카페트, 고급 술이 가득한 장식장, 피아노와 벽난로까지 손으로 쓸어보며, 계속 탄성을 질렀다.
“아빠가 술을 좋아하시나봐?”
“아니 엄마가 술을 좋아해.” 내가 웃었다.
“뭐 시켜 먹을까? 자장면이랑 탕수육, 그리고 통닭도 먹을까?” 내가 달에게 물었다.
“여긴 뭐야?”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 여기” 달의 목소리가 복도를 따라 왼쪽 코너 쪽에서 들렸다.
“뭐?” 들고 있던 전화 번호부를 내려 놓고, 달을 찾아보았다.
“아빠 방.”
“왜 잠궈 놨어?”
“엄마가 못 들어가게 해.”
“왜?”
“몰라. 내가 아빠 생각 하는게 싫은지...”
“아빠랑 같이 안 살아?”
“응. 들어가 볼래?”
“문 열수 있어?”
“그럼, 우리 엄마 비밀 번호야 뻔하지.”
개선문, 젊은 사자들, 행복의 미학, 책상과 의자를 제외한 곳곳에 책이였다. 책은 책장이 모자라 바닥에 이리 저리 쌓여 있었고, 한쪽 벽에는 아빠의 이름이 적힌 상장들이 액자 속에차례로 걸려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책이 정말 많네. 아빠가 책을 많이 읽으시나봐?” 달이 책을 뒤적거렸다.
“그러셨다나봐. 지금도 좋아하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왜 아빠랑 같이 안 살아?”
“돌아가셨거든.”
누런 빛깔의 먼지가 잔뜩 묻은 리바똥장군을 뒤적거리던 달의 손이 멈췄다.
“사고야?”
“몰라. 광주에서 돌아가신 거랑, 엄마가 부처님 오신날이 되면 어디 절에 가서 하루 자고 와. 화장도 안하고 옷에서 향냄새가 진동을 해. 말은 안하는데 아빠 기일 같아. 엄마는 아빠 얘기 하는 거 아주 질색해.”
“아빠 보고 싶겠네.”
“글쎄. 아빠 얼굴을 본적이 없거든. 내가 태어나고 100일도 안돼서 돌아가셨대.”
나는 책을 베고 누웠고, 달은 책상 앞에 앉았다.
“이건 뭐야?”
빨간색 양장 커버의 수첩이였다.
“아빠 일기장.”
“봐도 돼?”
“응.”
“한문이 꽤 많네.”
“한글도 있어. 잘 찾아봐.”
“승문각에 다녀왔다. 택시비 550원. 거북선 450원. 정태 만남. 와 글씨 되게 잘 쓰신다. 이건 뭐야?” 달이 눈앞으로 펼쳐진 일기장을 내밀었다.
“아빠 시.”
달이 일기장을 가져가 소리내 읽기 시작했다.
“송(松)자 없어도, 시름 녹는다
작고 검고 쭈글쭈글 모양 없는데
종일 구름 쥐고편듯 즐거울...”
“즐거울 락樂. 글씨가 좀 지워져서 그래.”
눈을 감고 있던 내가 말했다.
“어쩌나, 염치없이 희망을 넙죽넙죽. 송구스럽게도 넙죽넙죽. 80. 4. 1.
네 생일이 4월 1일이야?”
“아니 3월 30일. 어떻게 알았어?”
“여기 나오잖아.”
“잘 찾네. 우리 엄마는 그거 읽고 송자라는 여자가 누구냐고, 할머니한테 막 울던데, 애놓고 누웠는데, 그랬다면서 아주 펑펑...”
나는 모로 누웠다. 바닥에서 솔향이 올라왔다. 바닥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등뒤로 달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 배고프다. 나가자.” 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은 말도 없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반 아이들 얘기로는 아프다고 했다는데, 달은 그 전날까지 나와 수업도 같이 듣고, 나를 집까지 바래다 주고 갔다. 점심 시간에 집으로 전화를 해 봤지만 받지를 않았다. 학원을 갈까 말까 백번도 더 고민하다가, 혹시 학원으로 바로 나오지나 않을까, 싶어 결국 가는 쪽을 택했다. 달은 오지 않았다. 달이 없으니, 수업 시간도 길고, 재미도 없었다. 가는 길에 달이 집에 들려 보아야 겠다 싶었다. 마지막 수학 시간이였다. 아차, 수학 문제집을 필기 한다고 달이 가져갔었다. 어떻게 하나, 수학 선생님의 회초리가 떠올랐다. 도망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책상 위로 툭하고 수학 문제집이 떨어졌다. 주로 맨 앞에 앉아 조용히 공부하는 미정이였다. 다른 학교라 친해질 기회가 없었는데, 달은 한번씩 미정이랑 노트를 바꿔보았다.
“같이 보자.”
“너 오늘 달이 만났어?”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 용재가 너랑 같이 보라던데.”
“용재랑 잘 알아?”
“아니, 용재 이거 무섭잖아.”
미정이가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냥 너랑 같이 보라고 하더니, 나가더라고. 하지만 이 몸은 용재보다 달이 얼굴 봐서, 기꺼이 적선하시겠다 이 말씀.” 미정이가 옆 책상을 당겨서 내 책상과 붙였다.
‘둘이 뭐야?’ 머릿속이 엉켰다.
“용재가 참 괜찮지. 얼굴 좋고, 몸매도 좋고, 여자친구 친구까지 챙기고, 달이만 아니면 내가 그냥.”
“무슨 말이야?”
“달이랑 용재랑... 너 몰라?” 벨과 동시에 수학 선생님이 들어왔고, 빠르게 한시간이 지났다.
“빨리 안와?”
엄마가 집 근처 골목까지 나와 있었다. 날이 어두워져,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목소리로 미루어 짐작컨대, 화가 많이 나 있었다. 학원을 마치고, 달이네 집에 들렸다가 오는 길이였다. 대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고, 쪽지를 써서, 우편함에 넣고 왔다.
“야, 튀어 와.”
라고 소리쳐 놓고, 튀어 오는 쪽은 엄마였다. 내 앞에 오자 마자 귀를 잡더니, 집으로 끌고 갔다.
“아야. 엄마, 왜?”
“왜? 지금 왜라는 소리가 나와? 너 성적이 이게 뭐야?”
대리석 탁자 위에 모의 고사 성적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수학은 올랐잖아.”
“너만 올랐어? 등수가 내려갔잖아!” 엄마가 소리를 빽 질렀다.
“너 자꾸 이런 식으로 할꺼야, 왜 정신을 안차려, 내가 너한테 밥을 안 주니, 돈을 안주니, 생고생을 해서 먹이고, 씻기고, 입혔더니 이게 뭐니? 네 밑으로 들어가는 돈이 얼만지나 알아? 무슨 보람이 있어야지, 보람이.” 뻐꾸기 시계가 9시를 알렸다.
“누가 그렇게 해달래? 그럼 학원 보내지 마, 안가면 나도 좋아.”
“야! 너 지금 뭐라그랬어? 뭘 잘했다고 대들어 대들길, 너 좋으라고 하는 거지, 나 좋으라고 내가 이래? 내가 혼자서 너 하나 키우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하는데, 양심이 있으면 반은 해줘야지. 반은. 동네 남사스러워서 원.”
“누가 낳아달랬어? 엄마 닮아서 머리가 나쁜 거잖아. 상도 많이 타고, 책도 많이 읽은 아빠 닮았으면 안 그럴텐데.” 엄마의 얼굴이 벌개졌다.
“무식한 과부 자식이 공부못하는거 당연하잖아. 나도 엄마랑 닮아서 창피해.” 어깨에 멘 가방을 내려놓았다. 엄마는 손을 벌벌 떨더니, 화병을 장식장으로 던졌다. 와장창 박살이 났다. 씩씩대며, 내방으로 가더니, 노트와 책을 가져와 내 앞에 던져 놓고, 만화를 그려 놓은 연습장을 벅벅 찢었다.
“엄마! 왜 이래!” 엄마를 말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찢은 연습장을 태워버리겠다며 라이터를 찾았고, 아빠 방에 들어가 책들을 가져와 불이 붙은 연습장 위에 던졌다.
“그만 해, 그만 하라고.” 나는 엄마를 잡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를 밀치더니, 아빠 방으로 들어가 벽에 걸린 액자도 떼어와 부수기 시작했다.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집을 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눈물이 자꾸 흘렀다. 손으로 훔치고 뛰다가 걷다가 다시 뛰었다. 교복치마가 자꾸 다리에 걸렸다. 달의 집의 불은 여전히 꺼져있었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별도 달도 없는 깜깜한 밤이였다.
엄마는 다음 날, 곰탕을 담은 보온병과 동그랑땡을 싼 도시락을 두둑한 용돈과 함께 두고 나갔다. 달은 여전히 학교에 오지 않았고, 전화도 없었다. 집 앞으로 가서 기다려 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연락을 달라는 편지만 계속 우편함에 넣고 돌아왔다. 장마처럼 지루한 날들이였다.
‘너 가볼꺼야?’
옆에 앉은 미정이가 옆구리를 찔러, 문제집을 가르켰다.
‘어딜?’ 내가 눈으로 말했다.
수학 선생 눈을 피해 빠른 속도로 연습장에 적어 내려갔다.
‘오늘이 그 날이잖아. 태강천 뒤편 공터. 주먹질.’
‘어?’
‘용재 갔어. 연중행사.’ 미정이가 짤깍하고 샤프심을 밀어, 글씨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용재도 보이질 않았다. 1년에 한 번 방학 때쯤 되면, 각 학교의 주먹들이 모여 순서를 정했다. 가끔 싸움이 커져 학교별 싸움이 되기도 했고, 고등학교 오빠들까지 합세해, 경찰들까지 나섰었다. 한번도 본적은 없었지만, 각목과 야구방망이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두고 두고 회자 되는 일이였다. 장소와 날짜가 알려지는 일은 극히 드물었는데, 암암리에 아는 애들만 가서 구경을 했다.
‘싫어. 무서워.’ 라고 문제집 아래 빈칸에 적고, 나는 빠르게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럼 우리집에 갈래? 하루 자고 가.’
‘자고?’
엄마의 세모 눈이 생각이 났다. 미정이네 집은 이곳에서 차로 두어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이였다. 미정이는 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는데, 오늘 방학을 해서 집에 들어갔다가 다음 주 화요일 학원이 다시 개강을 하면 나올꺼라고 했다. 미정이가 하도 동네 자랑을 해서, 한 번 가보고 싶기는 했었고, 달이도 없으니, 무료하기도 했었다. 문제는 엄마 였는데, 기말 고사 성적이 괜찮게 나왔으니 어쩌면, 허락해 줄 것 같기도 했다. 엄마의 벽돌만한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속옷과 비타민을 챙겨가고, 모양이 이상하거나 냄새가 나는 건 먹지 말라고 했다. 집으로 오고 싶으면 한밤중에라도 전화를 하라고 했다. 미정이네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알려주고, 내일 정오까지 돌아오겠다는 약속 끝에 전화를 끊었다.
미정이와 한 시간 후에 버스 터미널에서 만나기로 약속 하고, 집으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나오기 전에 아빠 방에 잠깐 들어가, 아빠에게 인사를 했다. 벽에 타다 남은 아빠의 상장이 걸려 있었다. 나는 액자의 귀퉁이를 문질렀다. ‘미안해. 대신, 보여 줄께’ 아빠의 수첩 한 장을 찢어 주머니에 넣었다. 이것 저것 넣다보니 시간을 지체했다. 버스가 잘 다니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절대 늦으면 안된다고 미정이가 신신당부를 했었다. 골목을 돌아 태광천 끼고 있는 지름길을 택했다. 길의 오른쪽 언덕 아래 경사진 공터에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반대편에서 사람들이 공터 쪽으로 뛰어 오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몸을 움츠려, 낮추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누군가와 부딪혀 배낭이 흔들렸다. “조심해.” 용재였다. 용재는 말을 빠르게 뱉고,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뛰어갔다. 걸음을 멈추고, 눈으로 용재의 뒤를 쫓았다. 수업 시간에 미정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렸는데, 용재 곁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달이였다. 틀림 없는 달이고, 아프다던 달이였다. 지금 배낭속에 들어있는, 미정이네 가니까 월요일에 전화 하겠다는 편지의 수신인인 달이였다. 지이잉하고 귓속에서 비행기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자리에서 꼼짝 할 수가 없었다. 용재와 얘기를 나누던 달과 눈이 마주쳤다. 달은 나를 보더니, 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달이 뛰는 것을 본 순간, 나는 버스 터미널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새파란 하늘 아래, 새하얀 구름이 앙증맞게 박혀 있었다. 노란빛이 도는 녹음과 산등성이 위로 햇살이 펴둔 금빛의 요가 펄럭거렸다. 한 잎 베어 물면 새콤한 맛이 날 것 같은 나무들이 부채질을 시작했고, 솔향의 비늘들이 버스의 속도를 받아 그릇을 만들었다. 솔향 속에 손을 적시어 보았다. 마음이 한갓졌다. 미정이네 집은 정류장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갔다. 잡색없는 깨끗한 7월의 논이 펼쳐졌고, 마을 어귀의 노송과 경로당, 표지석을 지나니 대광천에서 흐르는 물소리의 꼬리를 잡고, 새들이 날고 있었다.
“여기야.”
미정이네 집은 슬래이트 지붕에 앞마당이 넓었다. 잘 가꾸어진 정원수와 피고지는 무궁화, 고추와 토마토가 익어가고 있었다. 큰 은행나무와 자귀나무가 장승처럼 버티고 있었는데, 그 사이를 지나니 가래와 지게, 빈 닭장이 보이고, 곁에는 꽃대가 긴 원추리 꽃이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극성 스런 매미 소리 뒤로 가마솥 뚜껑이 들썩들썩 했다.
“왔나?” 잔꽃무늬 치마에 고무신을 신은 미정이 할머니께서 노란 플라스틱 바가지에 찹쌀을 씻어 나오셨다.
“오빠랑 언니는 안 왔나?” 미정이가 사투리를 썼다.
“내일 온다 카던데, 니는 우예 방학을 일찍 했노?”
“중학교는 빠르다. 할매, 닭 잡았나?”
“온다캤잖아. 익을라만, 시간이 좀 걸릴낀데, 함 돌아보고 온나.”
“숲에?”
“그래. 덥도 안하고, 산타기 좋지. 산안개가 낏다 카던데,”
“보기 좋겠네.”
“그키.”
“할매, 야는 피리.”
“소리 나는 피리?”
“안녕하세요. 강피리예요.” 내가 쭈뼛거렸다.
“집안 어른들이 흥이 많으신 갑지. 솔숲에서 피리 좀 불고 온나.” 할머니께서 웃으셨다.
대광천 속에서 울뚝 불뚝 솟은 돌들이 물결의 무늬를 갈랐다. 크고 깊은 소나무 숲이였다. 나무 줄기가 곧고 곁가지가 가늘고 짧았다. 거북이 등처럼 육각형 모양의 수피는 아래쪽이 회갈색이고 위족은 황적색이였다. 결이 고왔다. 좌우로 쭉쭉 뻗은 소나무들은 보기만 해도, 시원했다. 나무에 바짝붙어 나무를 올려다보니, 당장 하늘을 뚫어버릴 것 같이 기세가 등등했다.
“끝내주지? 저건 500년이 넘은 소나무야.”
“조금 기울어진 것 같은데?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거야?”
“아니, 원래 여기 소나무는 임금님이 갖다 쓴 건데, 저건 볼품이 없어서 안 잘라 간거야. 목재 가치가 없어서, 살아남은 거지. 머리가 좋은 소나무 같아. 너처럼.”
미정이 앞섰다. 소나무의 신들이 사는 거대한 사원 같은 숲은 늠름하고 과묵했다. 목적 없이 길을 떠나도 한눈을 팔거나, 탐욕과 질시의 뜨락으로 떨어질 것 같지 않은 순례자같은 송자들. 뿌리를 내려 몸담아 있는 곳에 홀로 우뚝. 사람을 겁내지 않고, 시간과 세월을 겹겹이 쌓은 수피로 굳은 살을 만들고, 빛과 자연의 소리로 채운 수많은 밤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키고 버텨, 곡선을 허락하지 않은 엄격함으로 피워낸 솔향. 최소의 것으로 피우고 올려내면 그뿐, 얕고 깊음을 따지지 않는 순결하고도 완전한 소모.
흙길을 밟고 계속 올라갔다. 높고 곧고 짙게 푸른 소나무가 삿갓재와 백병산 기슭을 따라 빼곡했다. 거리낌 없는 금강송들이 발 아래로 옮겨졌다. 금강송을 단단하게 만들어준 혼란스럽고 모진 바람이 불어왔다. 책을 불에 태우던 엄마의 얼굴도, 낮에 본 달이의 눈빛도 떠올랐다. 달이와 용재, 엄마와 아빠. 관계의 비밀, 혹은 사건의 진실을 온전히 다 담아내기에나의 피리는 얇고, 가벼웠다. 만약이라는 전제가 붙은 사건들이 진실로 내 앞에 서게 되면 피리는 잘게 찢기고. 으스러져, 온통 피칠을 하게 될 것 같았다. 산안개의 축축하고 시원한 바람을 타고, 깊고 구슬픈 피리 소리가 들렸다. 목이 풀리고, 몸이 풀리는 피리소리는 금강송이 만든 길을 따라,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넘어 이리저리 공중으로 미끄러져 지나고 있었다. 아프거나 쓰라리진 않았는데, 소리에 찔려 자꾸 눈물이 났다. 골짜기 속으로 산안개가 집을 짓더니, 아래로 소나무를 적시며 넓게 퍼져 내려갔다. 아빠를 낮게 불러보았다. 아빠도 이런 피리 소리를 듣고 그곳으로 뛰어들었겠지. 아빠는 희망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결국 나는 숲을 안고 미정이네 집으로 내려왔고, 밤새 뒤척저리다가 찢어온 아빠의 수첩에 오늘 낮에 본 숲의 풍경을 그렸다. 가방을 뒤져 만화책 속에 곱게 펴 끼워두고 반듯하게 누웠다. 계곡 물 소리가 방문 틈새로 들어왔다. 벽을 타고 달빛이 흘렀다.
집으로 돌아오니, 엄마가 까막 고양이가 됐다며, 목욕탕으로 밀어 넣었다. 등을 밀어 주던 엄마는 어제 저녁 때, 달이 라는 애가 찾아왔었다고 했다. 미정이 집에 놀러 갔다고 내일 다시 오라고 했더니, 수학 문제집을 전해주며 학원에 못 나가게 됐다며, 공손하게 인사하고 가더라고, 엄마는 달이가 너무 예쁘다며 언제 그런 친구를 사귀었냐고 물었다. 나는 엄마에게 아프니까 등을 살살 밀라고 했다. 고개를 숙이고, 입안의 짠것을 밀어냈다. 엄마가 등뒤에 있어서 다행이였다. 그날 밤 나는 집을 몰래 빠져나가, 달이네 우편함에 그려온 그림을 넣어두었다.
“엄마는 좀 어떠시니?”
옥수수를 내놓으며 미정이 말했다.
“괜찮으셔. 수술도 잘 됐고, 어디 다니는 거 좋아하시는데 못 하시니까 답답해하셔.”
“지난 번에 뵜을 때, 많이 마르셨던데,”
“갑상선 때문에 그렇지 뭐. 수술한 뒤에 더 늙어보인다고 요즘 짜증이 이만 저만이 아니셔.”
“퇴원하시면 염색부터 해 드려.”
“응.”
입안에서 옥수수의 찰기가 느껴졌다.
“결혼 준비는 잘 되가?”
“준비라고 할 것 까지 없지 뭐. 식만 여기서 올리고, 시댁으로 들어갈껀데 뭐.”
“시댁이 어디라고 했지?”
“LA”
“할머니께서 많이 서운하시겠다.”
“언니랑 오빠네 있는데 뭐. 여기 이사 올 사람 없겠지?”
“집 팔게?”
“나 떠나면 관리할 사람도 없고, 할머니도 이제 서울에 계시니까. 내놓으려고.”
“시골이라 나서는 사람이 있겠어?”
“지난 주에 보고 간 사람이 있긴 한데..” 미정이 말끝을 흐렸다.
“밥집 하면서 혼자 살꺼라는데, 아! 너 혹시 학교 다닐때 채달 기억나? 거 왜 예쁘장하게 생기고, 키 크고 노래 잘하던 애 있잖아.”
“걔가 여기 살아?”
“윗동네 살고 있더라고, 집을 보러 왔다면서, 연락을 주겠다더니, 아직 소식이 없네, 빵집이 바쁜가?”
“빵집 주인이야?”
“그렇다던데, 학교 다닐 때 보고 못 봤는데, 옛날하고 똑같더라. 걔는 예나 지금이나 어쩜 그렇게 이쁜지, 낼 모레 결혼하는 나보다 피부가 더 좋더라.”
“그래?” 달이 이곳에 있다.
“한 번 가봐. 여기서 가까워. 송자 빵집이라고, 문에 소나무 숲, 그림 액자가 하나 걸려 있는데, 조금 촌스러워.”
내 안의 묵은 시간들이 조바심을 내며 덜그럭 거렸다. 오늘은 무슨 달이 뜬다고 했던가? 송자가 알려 줄 것 같았다.
- 글쓴이 : 이선아
- 1977년생, 숭실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글 쓰고 책 읽기를 매우 좋아하며, 영화관에 혼자 가는 것을 즐긴다. 글 쓰는 직업을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있다. 현재 안동 MBC에서 구성 작가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