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백소애_쑤세미의 골방에서 만화읽기]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 쑤세미
“너무 커서 들르지 않는 소리, 침묵”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소년의 이름은 한견주. 굳을 견(堅)에 기둥 주(柱)라는 멀쩡한 이름이 있지만 사람들은 개 견(犬)과 사람 자(子)자로 바꿔 그를 ‘개자식’이라 부른다. 나이 오십이 넘어 겨우 생원 진사시에 합격해 할 일을 찾지 못해 어슬렁거리는 촌구석 재산가의 서자다. 죽은 어미가 기생이라 과거나 벼슬은 생각지도 못하는 처지, 그러니 세상이 밉고 서책을 낀 놈만 보면 두들겨 패고 다닌다. 비 오는 날은 짚신 사이로 스며드는 빗물을 피해 서책을 찢어 징검다리를 만들어 걷다 길 가던 이가 “이 놈 뭐하는 짓이냐”고 꾸짖자 “훈장님이 말씀하시길 책 속에 길이 있다 해서 길을 만드는 중이네요.”하는 맹랑한 놈이다.
그날도 ‘개뿔도 모르는 것들이 글방 드나든다고 아는 척’ 하는 꼴이 뵈기 싫어 양반집 도령들을 실컷 매타작하고 있는데, 눈에 뵈는 게 없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는 소경, 황정학(황 처사)을 만나게 된다. 세상에 대한 원한을 엉뚱하게 풀고 있다고 꾸짖는 황 처사를 따라 길을 떠나는 견자는 그와 동행하면 할수록 그의 비범함에 매료되어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밤에 달이 있고, 컴컴한 방안엔 등잔이 있고, 이 맹인에겐 지팡이가 있다. 너에겐 뭐가 있니?”
훨훨 세상을 떠다니고 싶은 견자는 “나그네는 짐이 가벼워야 한다.”는 황 처사의 말처럼 살기가 쉽지만은 않다. 마음 주는 여자를 만나게 되지만 ‘사랑은 자신을 가두는 항아리’니 깨고 가라는 스승의 말을 따라 견주는 세상으로 나선다. 어느 날, 마음속에 대단한 야심을 품고 있지만 고고한 풍채의 선비 이몽학을 만나게 된다. 그 자신 서자 출신이라 갓을 쓰지 않는 자에겐 칼을 뽑지 않는 고수다. 도포자락 휘날리며, 생명을 중시 여겨 상대의 갓을 갈가리 쪼개서 항복을 받아내는 잘난 사내 이몽학에게서 견자는 열등감을 느낀다.
무능한 임금과 동서로 나뉘어 끊이지 않는 당파싸움에 민심은 어지럽고, 거사를 목적으로 군사 훈련을 하던 무력단체 대동계(大同契)가 관군과 싸움을 하는 시절, 거친 야생마처럼 세상을 떠도는 견자는 칼 뒤에 숨는 법을 배우라는 스승 황 처사의 말을 곱씹는다.
“내가 너만 했을 때 임꺽정이란 큰 도적이 일어났는데 많은 백성이 그를 아꼈다.”
민심을 잃은 정부는 꼭 화를 당하고 만다고 스승은 말한다. 병을 얻은 황 처사가 그믐날 손가락 끝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달이 떴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다. 무엇 때문에 길을 나섰고 무엇 때문에 살아왔는지 견자는 혼란스럽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혼란한 와중에 이몽학이 세상에 불만을 품은 자들을 결합해 거사를 일으킨다. 사내라면 ‘큰 뜻’을 품을 수도 있으나 견자는 자신의 마음속 의문이 풀리지 않은 터, 그와의 합류를 거부한다. 견자는 꼭 한번은 대결하고 싶었던 이몽학과 칼을 겨누게 되는데 ‘서로 반한’ 적들의 칼끝에 살수(殺手)는 없다.
물일을 하는 어미가 나무에 아이를 묶어두고 일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견자는 아이의 한계와 어미의 사랑을 생각하며 문득 ‘각성’한다. 물음을 찾아 길을 떠나고 거기서 세상사를 마주하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견자의 여정은 어지간한 철학서적 한권 읽는 것보다 더 큰 질문을 던져주고 사색에 잠기게 한다.
“스승님은 앞을 못 보니까 잘 아시겠네요. 도대체 안 보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는 눈을 떴으니 보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겠구나. 보인다는 것은 무엇인지 가르쳐다오.”
“보인다는 것…산, 들, 강, 하늘…그냥, 그냥 보는 거죠 뭐.”
“그럼 나도 그냥, 그냥 안 보일 뿐이다.”
이 사제 간의 대화는 지친 제자의 포기한 질문으로 다시 이어진다.
“아니 그럼 대체 본다는 것은 뭡니까?”
“거 질문 잘했다.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무엇을 알아요?”
“내가 장님이라는 걸.”
“나 참, 뭐가 뭔 말인지. 저도 스승님이 장님이라는 거 알아요.”
“니놈이 장님인 줄은 모르잖느냐.”
이 칠흑 같은 세상에 진짜 눈을 뜬 이, 첫 눈 오는 날 눈 위에 그려 넣은 스승의 얼굴을 그리워하던 견자, 오랜만에 만난 스승의 고린내 나는 발에 입맞춤을 하던 견자의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스승은 ‘성을 함락시키는 이보다 제 마음을 다스리는 이가 진짜 칼잡이’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구름을 벗어난 달도 보인다는 스승의 말에 견자는 고개를 숙인다. 그것은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소리, 침묵’이 뜻하는 바와도 같을 것이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세상을 알아간다는 것이고 배움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도적들의 산채에서 수장으로도 있어봤고 신분상승의 기회도 있었지만 견자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내고 길을 간다. 그는 어느새 세상을 달관한 듯 살아가며 구름을 벗어난 달을 가리키던 스승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해도 옆에 스승이 있는 것처럼 묻고 찾고 깨닫는다. 스승에게 또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철학적인 대사와 수묵화와 같은 담백한 멋이 가득한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댕기머리 총각 견자의 ‘성장기’이자 계급과 세상에 저항한 인간의 이야기다. <경복궁 학교>, <내 파란 세이버>, <그의 나라>, <호두나무 왼쪽 길로>등과 같은 주옥같은 작품을 발표한 박흥용 작가의 대표작이다. 여백의 미와 특유의 곡선미가 돋보이는 그림체와 깊이 있는 풍자와 해학은 선 굵은 이두호의 <임꺽정>을 볼 때와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바다출판사에서 3권짜리 개정판으로 새로 묶여 나왔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이준익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도 무척 재미있었는데 왜 흥행이 되지 않았을까? 조금은 다른 이야기로 각색됐지만 영화도 무척 매력 있었다. 능글맞은 황 처사 역의 황정민과 세상을 바꾸고 그 중심에 서고자 했던 이몽학 역의 차승원, 천방지축 견자 역의 백성현의 연기 앙상블이 아주 멋진 영화였다. 임금이 등 돌리면 삐딱하게 서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하고 외치던 고관대작들의 행태도 재미있었다. 특히 왜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알면서도 안 쳐들어온다고 임금에게 고한 뒤 자기들끼리 나눈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아니 왜구가 쳐들어오는데 왜 안온다고 합니까?”
“쟤네(동인)들이 온다고 했는데 우리도 온다고 할 순 없잖아. 우린 당론으로 그렇게 정했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1-3/ 박흥용 글, 그림/ 바다출판사
- 글쓴이 : 백소애
- 강원도 태백 출생. 아이큐는 낮지만 머리가 좋다고 굳게 믿고 있음. 변덕이 심하고 우유부단하나 따뜻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조카들에게 헌신적이며 인간성 또한 좋다.....고 믿고 있다. 학생 때 교무실에서 밀대자루로 바닥 밀면서 은밀히 훔쳐본 생활기록부에는 ‘예의 바르나 산만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한참을 갸우뚱 하다가 담임이 수학선생님이었기에 그냥 이해하기로 함. 다소 후진 취향을 지니고 있으나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쓸데없는 걱정과 호기심이 많음. 같은 계획을 몇 년째 하고 있으며 역시나 올해도 다이어트와 앞머리 기르기에 도전할 생각이며 과메기에 없어서는 안 될 다시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 웹툰도 괜찮지만 만화책은 역시 종이책으로 보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날로그 건어물녀. 좋아하는 것은 무한도전, 오뎅으로 만든 떡볶이, 삼겹살에 매실소주, 비오는 날, 생활의 달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괴짜가족 류의 저질유머. 비 오는 날 무한도전 틀어놓고 배 깔고 누워 만화책 보면서 빈둥거리며 사는 것이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