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의한 정신성의 철학화가 마크 로드코 마크 로드코는 제2차 세계대전 후 10년 동안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던 미국 전위그룹‘뉴욕파’의 창립멤버 중 한 사람이다. 뉴욕파 운동은 추상표현주의나 액션페인팅이라는 미술용어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으며, ‘그린다’는 행위 자체의 가치를 중요시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대표 작가는 잭슨 폴록과 윌리엄 드쿠닝이다. 로드코는 맨 앞에 지명되지는 않는다. 로드코는 작품을‘그리지’않고 ‘칠하며’, 폴록과 드쿠닝이 붓에 의한 선적 표현인데 비해서, 로드코는 두세 개의 넓은 네모로 구성된 면의 표현이다. 로드코의 평면기법은 뉴욕파 내의 스틸, 뉴먼과 공통적이지만 폴록, 드쿠닝의 작품과는 대조적이다. 로드코는“자신의 작품은 액션페인팅이 아니다”,“자신과 추장표현주의와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미술이론서에서는 로드코를 추상표현주의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로드코는 생전에 잡지, 신문 등의 편집자와 비평가가 자신을 분류하면 화가, 창작가의 본질을 잘못 보게 된다는 말을 했다. 로드코의 작품은 색감이 뛰어나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가 사용하는 색이 매력적이라고 하면 어기대고 심술을 부린다. 왜냐하면 그에게 색은 표현상의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쁜 색을 내고 싶어 그리는 것이 아니니 자신을 컬러리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응수한다. 추상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로드코의 양식적으로 성숙한 단계의 작품(1940년대말 이후 약 20년)은 추상이지만, 추상화가와 자신은 다르다고 역설했다. 추상은 장식적인(decorative)이고 주제상실적이지만, 자신의 작품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쾌락적이고 장식적이지 않으며, 주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주제를 가진다. 그러니 기하추상이나 입체주의 계열 추상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로드코는 드 쿠닝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나의 그림(추상)은 렘브란트에게서 받아들인 것이다.” 또한 드 쿠닝의 아내 엘레느에게 “우리(뉴욕파)들은 각자의 예술내용을 미가 아니라 윤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파리파의 쾌락적 유미주의와 구분하며, 뉴욕에서는 지역주의, 지방주의의 리얼리즘에 등을 돌리고, 추상도 아니며 초현실주의도 아닌, 그러나 유럽전통과 뿌리는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추상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 동안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명제, 테마를 몇 번이나 바꾸고 논리적으로도 기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나아간다. 그 모습은 단순한 화가를 말하고 있지 않다. 한 사람의 도덕주의자, 프랑스문학에서 말하는 인간을 탐구하는 인생파 문인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실제로 로드코는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의 음악을 사랑했고, 셰익스피어와도 친했으며, 니체, 키에르케고르를 사상의 양식으로 삼은 화가였다. 문학적 소양이 깊어 젊었을 때 작가가 되려고 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문학성을 배제하고 추상에 도달하였으므로 그의 회화를 결코 문학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철학과 시가 그의 회화성의 원천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상은 니체,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실존주의 계통이다. 살던 시대는 불황과 전쟁의 격동이었으며, 끊임없이 불안이 엄습하며, 마음을 우울하게 한다. 그는 밝고 상쾌한 발색이나 강한 쾌적한 추상주의를 표현했지만, 만년에는 종교적이라 할 정도로 정신성이 깊은 어두운 색조의 검은 색과 갈색에 침잠한다.‘불안’의 사상이 거기 주입된 것이 틀림없다. 로드코는 66살이 지난 해 그의 생애를 자살로 마감했다. 만년 성공한 화가가 되었지만, 부와 명성을 얻는데 대해 자기혐오를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자살과 자기혐오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현재는 자살의 이유를 설명한 문헌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에서 그는 색은 모두 아름답고, 싫어하는 색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번지기기법과 선염법, 색을 겹쳐 칠하는 기술, 스테이닝기법 등을 사용하면서 색을 통제하는 색의 지휘자, 마크 로드코가 마치 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능숙하게 색을 사용했다는 것은 질투조차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