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황구하_시로 거니는 상주]낙강에 쓰는 달의 문장
- 황구하
낙강에 쓰는 달의 문장
강 건너 미루나무가 시원하게 보내오는 바람결 좋은 해거름입니다. 홀로 물가를 거니는 황새를 바라보며 벌써 며칠째 몸져누운 당신을 생각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상처입어도 끝끝내 사람이고자하는 당신처럼, 연일 포크레인 소리에 놀라 자지러지는 강물도 끝끝내 생명이고자 저렇게 쉼 없이 흐르고 있네요.
지난 5월 말, 이곳 도남서원 앞 낙동강 자락에 몇몇 시인들 모였었지요. 사람 사는 세상을 그리워하며 ‘바보’로 살다간 그분의 죽음을 애도하던 날이었습니다. 그날 종일 해가 보이지 않고 사방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장대비가 몰려왔지요. 순식간에 강물은 드넓은 모래밭을 지워버렸습니다. 후줄근히 비에 젖어 정허루(靜虛樓)에 올라앉고 보니 물안개가 천지사방을 뒤덮어 모두들 꼼짝없이 갇혀야 했지요.
속절없이 마냥 비에 젖고 있는 개망초, 엉겅퀴 사이사이 노랗게 무리지어 피어있는 달맞이꽃과 눈 맞추며 막걸리 잔이 돌기 시작하자 시인들 옆엔 백석이 앉기도 했고 김수영이 술잔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읊는 시와 노래가 물안개를 둘둘 걷어 올리기 시작했는데요. 온통 흙탕물범벅인 채 강물은 흐느끼고, 멀리서 건너오신 백운, 퇴계, 창석 선생이 우리 손을 뜨겁게 잡고 앉아계셨습니다.
낙동강 천삼백 리를 보통 칠백 리라 일컫는 것은 상주를 기점으로 한 것입니다. 위로부터 퇴강 일대의 삼탄(三灘), 매호(梅湖), 죽암(竹巖), 자천대(自天臺. 경천대), 도남서원(道南書院), 관수루(觀水樓) 등 명승지 구간 40리가 모두 낙강시회(洛江詩會)의 공간이었답니다.
낙강시회는 1196년(고려 명종26년) 최충헌의 난을 피해 상주에 우거(음6월 14일부터 9월 20일까지)했던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시회로부터 1491년(성종22년)의 상주목사 강구손, 의성군수 유호인 등의 시회를 거쳐 1862년(조선 철종13년) 계당 류주목에 이르기까지 666년 동안 총 51회에 걸쳐 이루어진 역사적인 시회입니다.
이 시회를 열었거나 참석한 사람은 이규보, 안축, 김종직, 유호인, 김일손, 권오복, 이황, 강신, 조찬한, 이준, 조정, 조익, 류진, 전식, 전극항, 전극염, 조우인, 강사상, 채득기, 홍여하, 손만웅, 조정융, 정도응, 신석번, 이옥, 이만부, 권상일, 조천경, 이승연, 정종로, 이경유, 류주목 등입니다. 이 분들은 이미 한국문학사 및 유학사에 오른 선비들이어서 낙강시회의 품격을 한층 더 높여주었지요.
낙강시회는 강(자연)과 인간 사이의 끈이라고 생각합니다. 낙강시회 때 지어진 시를 보면 자연과 하나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흠뻑 젖어든 작품이 있는가하면, 세상과 자신을 향해 날 세운 정신은 실정(失政), 당쟁(黨爭), 탐관(貪官) 등에 대한 비판으로 격정적이고 신랄하기까지 한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낙강에 달 띄우고, 뱃놀이를 겸한 시회를 통해 같은 공간(낙강)에서 같은 제재(뱃놀이 시회)로 대를 이으며 창작해 온 작품들을 한 책자에 기록하였는데요. 그것이 바로 상주 시인들의 공동시집 『낙강범월시(洛江泛月詩)』, 일명 『임술범월록(壬戌泛月錄)』입니다. 1607년(선조40년) 상주목사 김정목과 조익, 이준, 전식 등이 뱃놀이를 한 시회까지 합쳐 낙강시회 작품을 망라하고 있지요. 하나의 강(낙동강)을 제재로 한 공동시집으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일인 듯합니다.
그 『낙강범월시』가 상주한문학의 기초를 닦아놓은 권태을 선생의 번역으로 2007년 7월 15일 아세아문화사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특징적 의미, 문학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참가자와 원문 소개를 비롯하여 충실한 번역문을 통해 『낙강범월시』의 진면목을 전해주고 있지요.
닻줄 풀어 시 물결꽃 피우던
중국의 소동파(蘇東坡)가 1082년 7월 16일 적벽유(赤壁遊)를 가졌고, 상산낙강범월시회로서는 가장 깊은 의의를 지니는 창석낙강범월시회(蒼石洛江泛月詩會)도 1622년 7월 16일에 열렸습니다. 공교롭게도 『낙강범월시』책이 2007년 7월 16일, 저에게로 건너왔습니다.
낙강은 홍범(洪範)의 원리가 된 신귀(神龜)가 출현한 낙수(洛水)와 연관되어 유도(儒道)의 정통 맥이 끊이지 않는 강이라는 상징성을 지녔습니다. 거기에 도남서원을 창건함으로써 상주 사람들에게 있어 낙강은 명승지로서만이 아니라 상산낙수향(商山洛水鄕)이라는 설화적 상징성까지 띤 강으로 인식되었지요.
유장한 강물과 함께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역대 51회의 시회를 2002년부터 상주의 문인들이 이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귀한 일인가요. 그것은 선배 문인들의 ‘자연과 인간과 시 사랑의 호방한 문학정신’을 받들고 섬기며 그만큼의 책임감으로 지금 여기, ‘사람을 만드는 문학, 세상을 살리는 문학’을 실현하고자 하는 뜨거운 다짐이라 하겠습니다.
“낙강시제 시선집 『2008 낙동강』에 실린 내 시 한 구절을 써 넣은 사발에 술을 따른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사발에 물빛 닮은 상주문학 사람들의 마음이 오롯이 담긴다. 시인들의 시 한 구절 한 구절을 이렇게 다 담아내는 그 마음 또한 시가 아니겠는가……곱게 물들어 가는 낮은 산 아래 끝없이 드러누워 있던 모래밭. 연둣빛으로 빛나게 익어가는 논의 벼. 잔디마당과 돌담에 옹기종기 앉아 있거나 지긋이 기대어있던 그림과 시화 작품들. 정호(程顥)가 제자 양시(楊時)를 고향으로 보낼 때, ‘우리의 도(道)가 장차 남방(南方)에서 행해지리라(吾道將行於南方)’한 데서 도남(道南)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도남서원. 그곳에서 상주 사람들을 만나고 왔다. 가슴 뜨거운 시인들을 만나고 왔다. 아울러 옛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배 문인들을 만나고 왔다. 그들을 만나고 왔다.”
작년에 낙강시제를 다녀간 시인들 중 대전의 윤임수 시인은 이렇게 참관 술회를 가슴 짠하게 보내오기도 했지요.
서쪽하늘에 노을이 막 물들고 있습니다. 저 붉은 기운으로 이곳 낙동강 자락에 자리를 펴고 선대의 손을 뜨겁게 잡을 낙강시회가 또 무궁무궁 이어지겠지요. 열두 번 웅덩이를 만나도 반드시 다 채운 뒤에야 흘러가는 강물처럼 당신, 훌훌 자리 털고 일어나셔야지요. 그래서 태초로부터 생명인 저 강물에 달의 문장을 쓰셔야지요. 사람이 사는 세상을 비추기 위해 하루하루 자신을 벼리는 달을 띄우고, 푸른 물에 장대붓을 적셔야지요.(♣)
- 글쓴이 : 황구하
-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