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황구하_시로 거니는 상주]허허씨와 예술촌
- 황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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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흐르는 시간이 고맙습니다. 이 봄을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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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도 햇살에도 꽃빛이 묻어오는 봄날, 그림전시회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상주예술촌 매화꽃 그늘에 세든 화가가 보내 준 것인데요. “그려짐과 그렇지 않은 공간과의 교감, 서로 다른 형태와 형식의 충돌, 그것은 그린 나와 그림을 보는 이의 관계에도 적용된다.”는 알싸한 봄소식이었지요.
상주예술촌은 경북 상주시 사벌면 매호리에 있는 문화예술 창작 공간이에요. 폐교로 몰락할 뻔한 공간에 미술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자연스럽게 연극, 사진, 음악 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공간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요. 옛 매호초등학교 건물에 사무실, 전시실, 작업실, 강당(공연장), 야외공연장 등을 마련한 것이지요. 그동안 음악캠프, 수채화, 누드크로키, 통기타 교실 등이 개설되었고 지금도 각종 이벤트 행사가 수시로 열리고 있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돈이나 명예를 삶의 중심에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귀중한 시간을 거기에 다 쏟기도 하고요. 그러나 거기 예술촌에 들면 그런 문제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집니다. 더없이 순한 자연과 사람과 예술이 둘러앉아 있으니 어느새 세상 너머 딴 세계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본질적으로 궁구해야할 삶의 원리를 생각하게 하고, 가치 있고 조화로운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합니다.
오로지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데다 다른 예술가들과의 소통을 통해 예술적 교류를 할 수 있는 예술촌은 누구라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데요. 널찍한 실내작업실과 야외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거나 무얼 뚝딱거리고 있거나 스케치를 하거나 물감이 잔뜩 묻은 작업복을 입은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지요. 그래서 오랜 시간에 걸쳐 작업해나가는 과정을 볼 수도 있고 순간적인 붓놀림도 숨죽이며 구경할 수 있지요.
나무의 결과 모양, 옹이와 벌레 먹은 자리도 그대로 작품이 된다든지, 생태 테마를 정해 밀고나간다든지, 작품의 모티브를 얻게 된 과정 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예술작품이 훨씬 생생하게 다가오는데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공간이 예술작품과 하나로 스며드는 힘을 보며 예술은 결코 먼 데서가 아니라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 삶에서 시작된다는 걸 새삼 실감합니다. 그것은 예술촌이 거느린 공간과 거기 세 들어 사는 예술가, 그리고 그 힘과 가능성을 느끼고 믿으며 드나드는 사람들이 잘 어우러진 덕분이겠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새와 개와 고양이들까지 수시로 찾아들어 예술촌 운동장이 한바탕 야단법석일 때 많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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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한 마리 예술촌에 들어와 얼쩡거리다 그림 하는 허허씨한테 딱 걸렸는데요 도망치지도 않고 기다렸다는 듯 낑낑 엉기는 것이 족히 며칠은 굶은 폼이었다지요 그는 얼른 화실 도화지만한 냉장고 문 열어 살얼음 낀 두부를 녹이고 과자 부스러기들 죄 꺼내 먹였다는데요 그때부터 그 개 한식구가 되었지요 그가 쓰는 화실 옆 교실 한 칸 예술이라는 이름이 적혀진 자물통까지 얻어서 말이에요 그 바람에 예술촌 한 귀퉁이 둘이 세든 건물 앞마당엔요 예술이 똥이 냉이꽃 돌나물 꽃다지 사이사이 민들레처럼 암팡지게 뿌리내리게 되었지요 그러다 동네 어슬렁거리던 개한테 꼬여 아니 꼬드겼는지도 모르지만요 한바탕 질펀한 거사를 치렀다네요 그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혀를 끌끌 차기도 하였는데요 그 무렵 가장 비싼 사료를 두 포대나 먹였다지요 어쨌든 예술이는 올망졸망 새끼를 일곱 마리나 낳았대요 젖 물리느라 늘어진 뱃구레 바싹 여윈 채 혹 새끼들 불편할까 꿈쩍도 하지 않고 힘 바짝 고누고 버팅기는 고것이 또 그렇게 안쓰럽고 귀하다며 그는 며칠 뚝딱거리며 널따란 예술이 집을 새로 만들어 주기도 했는데요 들락거리는 사람들한테 새끼 몇 마리 안겨주고 그가 색소폰을 빠바밤 불어대면요 예술이 고개를 치켜들고 우우 응수하며 지내던 어느 날 웬일인지 예술이랑 새끼 두 마리 보이지 않더래요 그는 안절부절 예술이 눈빛 묻은 예술촌 구석구석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림자를 늘이고 또 며칠 끙끙거리다 막걸리 두어 잔 연거푸 비웠는데요 안주 삼아 툭툭 주워섬기는 그의 말이 붉은 노을 틈에서 줄창 흔들렸습니다…… 지가 새끼 날라고 나한테 온 겨, 고만큼 키워 지 갈길 터줬응께 고만 갈 때 돼서 간 거여. 허허, 그게 예술이 아니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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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지요. 어쩌다 개 한 마리 예술촌에 들어왔는데 가끔 놀러오는 동네 개들과는 사뭇 달랐다지요. 몰골이 형편없었으니까요. 마음 착한 ‘허허씨’가 그 개를 ‘예술이’로 거두었지요. 아프고 여린 생명을 섬길 줄 아는 ‘허허씨’는 ‘예술가’의 다른 이름입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세상의 온갖 속박을 훌쩍 넘어 훨훨 나는 듯한 ‘허허’라는 말이 어쩌면 현실을 단단히 디디고 또한 현실을 초월하는 예술가의 그것과도 같아서 그렇게 붙여본 것이지요.
고단하고 지난한 현실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자신을 밀고 나아가 올곧게 시대를 이끌어가는 예술가를 존경합니다. 그래서 발 딛고 있는 지금 여기가 중심임을 아는 허허씨들이 예술촌을 지키고 지역을 지탱하며 아울러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힘이 된다는 걸 저는 믿어요. 저에게 늘 뜨거운 상징인 허허씨들과 어울려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일, 참 즐거운 일이지요.
한번은 손두부랑 막걸리를 끼고 유화물감 냄새 그득한 허허씨 화실에 여럿 모이게 됐는데요. 하수상한 시절이야기로 술자리가 무르익자 허허씨는 슬며시 색소폰을 들었지요. 그가 연주하는 ‘봄날은 간다’는 “연분홍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듯 척척 감겨들고 급기야 한 시인,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목청껏 불렀는데요. 저마다 젖은 가슴은 노래, 노래로 이어져 노을도 붉게 붉게 타올랐지요. 그래요. 허허씨들의 술자리는 늘 그렇게 알코올 도수보다 감성 도수가 높아 삶을 한층 뜨겁게 달구어놓지요.
예술이가 새끼를 낳았던 교실, 그곳은 지금 전시장으로 바뀌었습니다. 나무골조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과 타일 깔린 바닥, 허름한 시멘트벽에 하얀 페인트칠을 했을 뿐이지만 그 어느 갤러리보다 운치 있고 귀한 공간이지요. 또 천장 한 귀퉁이에는 새 가족이 사는데요. 언제부터인지 새가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새끼까지 깨어 나와서 잘 살고 있어요. 그래서 전시장엔 배경음악조차도 필요 없답니다. 가슴을 디뎌주는 천상의 음악, 새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내리니까요.
꽃나무 가지에서 노니는 바람도 드나드는 사람도 더없이 순해지는 상주예술촌, 오늘은 거길 가렵니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공간이 바탕이 되어 모든 풍경을 온전히 드러내주는 거기, “그려짐과 그렇지 않은 공간과의” 경계를 일찌감치 허물어버리고 삶 자체가 된 그림을 가리키며 허허씨는 또 이렇게 말하겠지요. “이 그림‘지가 새끼 날라고 나한테 온 겨, 고만큼 키워 지 갈길 터줬응께 고만 갈 때 돼서’ 보내는 거여.” ㅎ ㅎ 그게 예술이 아니겠는지요.(♣)
- 글쓴이 : 황구하
-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