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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 길찾기 |
이름 둘리, 주민등록번호 830422-1185600, 주소는 부천시 원미구 상1동 412-3번지 둘리의 거리. ‘아기공룡 둘리’는 만화가 김수정이 1983년 4월 전설의 만화잡지 보물섬에 연재를 시작한 작품이다. 녹색공룡 케라토사우르스 둘리는 얼음별의 엄마와 헤어져 지구로 왔으며 서울시 쌍문동 고길동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영희와 철수 남매의 친구가 되고 고길동의 조카 희동이와도 잘 지내지만 고길동은 이상한 생물체 둘리를 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거기다 군식구인 암컷 타조 또치와 깐따삐아 별의 외계인 도우너까지 합세해 고길동의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고길동은 얹혀사는 주제에 말대꾸는 기본이고 온갖 초능력으로 말썽을 부리는 이들을 내쫓는 궁리를 하지만 매번 되려 당하기만 한다. 둘리가 도우너의 시간여행 바이올린인 타임코스모스를 타고 친구들과 온갖 모험을 하게 되는 이 경쾌한 만화는 지금도 대한민국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제일 사랑받고 있는 만화 중 하나다.
그런 둘리가 ‘공룡 둘리’로 재탄생 됐다. ‘공룡 둘리’는 2003년 5월 영점프에 실린 최규석의 작품으로 이듬해 발행된 그의 단편집〈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 수록되어 있다. 1983년은 아기공룡 둘리의 탄생 20주년으로 만화의 도시 부천에서 둘리에게 주민등록증을 발급하고 둘리의 거리를 만드는 등 축제 분위기였다. 그런 가운데 홀연히 갓 대학을 졸업한 청년의 발칙한 작품 ‘공룡 둘리’가 나온 것이다. 최규석의 단편에 실린 김수정의 추천사에는 “다음에 또 누군가가 둘리를 그리겠다고 한다면 나는 단호히 거절할 것이다. 최규석 씨의 공룡 둘리는 단 한 번의 예외다”라고 적혀있다. 나는 추천사의 행간을 읽으며 김수정의 불쾌함을 엿볼 수 있었다. 상상하지 못하는 작가는 작가가 아니라며 최규석의 상상력과 용기를 격려하면서도 자신의 둘리가 깡 소주를 든 둘리로 성장해 나타나자 무척 당황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조금 불편했던 모양이다. 하긴 명랑만화가 졸지에 세태비판만화가 되어버리니 김수정이 현기증을 느낄 만도 하겠다.
최규석의 ‘공룡 둘리’는 2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매일 싸움질을 하는 희동이의 합의금 때문에 도우너를 외계인을 실험하는 박사에게 천사백만 원의 돈을 받고 넘겨주는 철수의 모습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민등록증도 없이 일하는 외계인 노동자 둘리는 프레스기계에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하고는 공장에서 해고된다. 도우너가 잡혀갈 때 손가락으로 ‘호이!’하며 외쳐보지만 이제는 초능력도 못 쓰는 처지다. 곧 해부될 위기에 놓인 도우너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쫓아다니지만 모두들 냉담한 반응이다. 길동이 아저씨는 도우너의 사탕발림으로 집을 날리고 빚더미에 앉은 후 화병으로 죽는다. 또치는 동물원에서 몸을 팔며 근근이 생활해 나가고 그나마 둘리와 포장마차에서 쓴 소주 한 잔 하는 마이콜은 밤무대 삼류가수 신세를 못 벗어나고 있다. 또치는 도우너를 구하러 가자는 둘리에게 이렇게 외친다. “둘리야! 이제 제발 네 걱정만 하고 살아! 더 이상 명랑만화가 아니잖니.”
‘아기공룡 둘리’가 나왔을 때는 바야흐로 5공화국 시절이다. 만화가 김수정이 둘리를 그릴 당시는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를 용납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었다. 자연, 심의를 걱정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7살의 장난꾸러기 남자 아이를 공룡으로 바꿔 둘리는 탄생하게 되었다. 아기 공룡이 어른 고길동에게 대들어야 하는 캐릭터니까, 수천만 년 전에 멸종한 공룡으로 설정하는 등 그 배경에도 작가는 심사숙고를 해야만 했다. 아, 버릇없는 빵꾸똥꾸 해리도 방송통신위원회의 심의를 받으니 요즘과 별반 다르지 않나보다.
세월이 흘러 작가 최규석이 ‘공룡 둘리’를 그렸던 2002~2003년에도 여전히 국가보안법은 있었고 노동자들은 못살았다. 사람들은 명랑만화를 보고 웃었지만 삶은 명랑하지 못했다. 전 국민이 월드컵에 열광했을 때 여중생 장갑차 압사사건이 일어났던 것처럼, 명랑한 삶 속에 감춰진 처절한 현실을 작가는 놀라운 성찰로 그려내고 있다.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이 잘린 둘리의 삶은 1980년대 후반에 활동했던 김호철의 민중가요 ‘잘린 손가락’에 교차된다.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잔 마시는 밤
덜걱덜걱 기계소리 귓가에 남아 하늘 바라보았네.
잘린 손가락 묻고 오는 밤 시린 눈물 흘리던 밤
피 묻은 작업복에 지나간 내 청춘 이리도 서럽구나.
하루하루 지쳐진 내 몸 쓴 소주에 달래며
고향 두고 떠나오던 날 어머님 생각하며
술에 취해 터벅 손 묻은 산을 헤매어 다녔다오.
터벅터벅 찬 소주에 취해 헤매어 다녔다오.
낡은 작업복에 목장갑, 움츠린 어깨의 둘리는 이 사회의 부적격자, 이방인이다. 추운 겨울, 둘리는 살아생전 아옹다옹했어도 가장 애증의 관계가 돈독했던 길동의 무덤을 찾는다.
“아저씨. 저 왔어요. 거긴 좀 살만해요? 조금만 누웠다 갈게요……. 눈이 오네요 아저씨. 다시 빙하기가 오려나 봐요.”
명랑만화 둘리는 20년 만에 주민등록번호를 갖게 됐다는데 이름도 주민등록도 없이 이 거리를 배회하는 수많은 둘리들은 어느 무덤가에서 조금만 누웠다 갈까.
* 뒷얘기 한마디.
책날개에 작가 최규석의 훤칠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축구선수 조재진을 닮았다고 하는 팬들도 있으나 그의 친구들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다. 작년 말,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이 만기출소하자 최규석의 홈페이지에는 출소를 축하한다는 내용이 달리기도 했다. 최규석 홈페이지. http://www.mokw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