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황구하_시로 거니는 상주]존애원, 세상을 살리는 납설수(臘雪水)
- 황구하
밤사이 또 눈이 내렸습니다. 몇 년 만의 폭설이라더니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졌습니다. 온통 하얀 세상에 들뜨던 마음도 잠시, 출근길 마음이 심란합니다. 제설차가 지나간 길은 다시 눈으로 덮이고 눈을 뒤집어 쓴 자동차들은 발이 묶였습니다. 감나무며 은행나무 가로수는 아예 눈과 한 몸뚱이로 얼어붙었지요. 강풍이 몰고 온 한파에 세상마저 꽝꽝 얼어버린 겨울 한복판입니다.
폭설과 한파로 인한 사건사고와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칼바람’, ‘눈 폭탄’이라는 말까지 심심치 않게 쓰는 걸 보면 이제 자연기후변화는 또 하나의 전쟁입니다. 황사, 가뭄, 태풍, 장마, 지진, 폭설과 강추위 등은 분명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안겨주니까요.
지난 1월 12일 일어난 아이티 지진만 해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강진으로 아이티는 지금 폐허더미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내전과 쿠데타, 자연재해로 점철된 역사를 가진 가난한 나라 아이티의 이번 지진은 더욱 견디기 힘든 상처이지요. 이미 수십만의 사망자와 피해자가 생겼고 집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길거리로 내몰렸습니다. 환자들이 병원 밖까지 끝도 없이 누워 있고 마취제, 거즈, 항생제, 진통제 등 기본적인 것마저도 태부족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거기다가 병원 앞에는 백인 경비원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고 합니다. ‘차별 아닌 인종차별’까지 하니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장은 참혹하기만 합니다.
400여 년 전, 이 땅을 휩쓸고 간 임진왜란의 참상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상주도 북천전(北天戰)을 겪으며 기아와 가난, 질병을 피해갈 수 없었지요. 비명횡사하는 백성이 속출하고 민심도 크게 동요되었습니다. 그때 그 고통과 현실을 뜨겁게 끌어안은 사람들이 있었지요. 당대 상주의 정신적 지주였던 사회지도층 선비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전래의 미풍양속은 스스로 지키고 계승시켜가야 한다는 소명감을 지녔던 것이지요.
| (무대, 가을 낮 오후. 대청마루에 빙 둘러앉아있던 문중 대표들 일어서서 서로 악수를 나누고 그간의 안부 이야기로 다소 웅성웅성한 가운데 서로서로 예를 갖추고 앉는다.) | |
|
진양정씨
창령성씨
영산김씨 |
(좌중을 휘 둘러보며) 지금부터 낙사계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회의 안건은 우리 상주지역 백성구휼에 관한 문제입니다.
(다소 흥분되고 격앙된 어조로) 왜적이 상주성에 들어와 관청·영청·객사 등을 모두 불 지르고, 성 밖 큰 집들까지 모두 불질렀습니다. 왜적들은 상주성 안팎에 머물며 날마다 노략질하고 마필까지 남김없이 거두어 그들의 짐바리를 수송하고 닭, 개, 소 등도 모조리 휩쓸어 갔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 상주가 이러할진대 온 나라는 어떻겠습니까? |
|
- 중 략 -
(문중 사람들은 모두 두루마리를 펴놓고 보고 있다.) |
|
|
진양정씨
전주이씨 |
자, 조용히 해주십시오. 지금까지 의논된 것을 다시 한번 함께 정리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 약사계는 사설의료시설을 창설하기로 합니다.
―황구하 희곡, 「존애원」부분 |
당대의 사정으로 보아 나라에서도 방방곡곡 위급에 처한 백성을 치료하기에 여력이 달리는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의료시설을 만들어 향토백성을 질병과 굶주림으로부터 먼저 구제하고자 나선 것이지요. 갸륵한 뜻을 모은 문중 계원들은 각기 출자한 쌀과 베로 기초적인 기금을 마련했습니다. 한약재는 손을 빌어 채집하고 당재는 무역을 하여 썼지요. 환자는 지역이나 신분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환자숙박소와 약재창고도 건물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임시로 마련하여 사용하였지요. 주치의는 계원이기도 한 청죽 성람선생이 맡았습니다.
그렇게 13개 문중 자치적으로 사설의료국 ‘존애원’을 전국 최초로 설립하게 된 것이지요. 존애원(存愛院)은 정자(程子)의 존심애물(存心愛物) 정신을 근본으로 합니다. 1599년 의료 활동을 시작으로 1797년 전후까지 근 2백년간 그 기능을 유지하였습니다. 의료시설이 아주 적었던 당시 많은 약재와 시설을 갖추어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였지요. 인근지역의 의료지식을 갖춘 사람들도 스스로 찾아와 존애원을 돕고, 정조가 그 실천적 나눔의 정신에 감복하여 “크도다, 이 계여. 나도 응당 이에 들리라.”하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전형적인 양반 계급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존애원은 양반에 대한 기존 관념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사람다운 정신의 높이를 세워줍니다. 1993년 2월 25일에는 경상북도지방문화재 제89호로 지정받기도 하였는데요. 존애원의 재정지원을 담당했던 13개 문중의 ‘낙사계’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매년 음력 2월 10일에 모임을 갖고 있답니다.
지난해 늦가을, 상주시 청리면 율리 존애원에서 당시의 의료시술행사와 낙사계 모임이 재현되었습니다. 「존애원」연극공연(극단「둥지」)이 있었지요. 임란이 휩쓸고 간 참상과 당대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 그리고 존애원에서의 요모조모의 풍경이 그려진 것입니다. 또 현재 낙사계 회원들이 존애원 설립과정과 재정지원 방안을 논의하는 모습을 재현하기도 했지요. 아울러 함께 한 사람들에게 400여 년 전 굶주린 백성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국밥 한 그릇씩 공손히 대접하였습니다. 늦가을 찬비에 아랑곳없이 ‘존심애물(存心愛物)’의 정신을 뜨겁게 잇는 날이었지요.
존애원은 의료 활동 외에도 두 가지 기능을 겸행하였습니다. 예절 교화장 역할이 그 하나입니다. 1607년 정월 대보름에 상산사노(우곡 송량 ․ 석천 김각 ․ 주일재 정이홍 ․ 희암 윤진)로 존경받던 분들을 비롯하여 고년자를 모시고 존애원 백수회(경노회)를 개최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후진을 양성하고 교육을 진흥시키는 강학소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존애원 건물이 창건된 1602년 12월에는 남계 강응철을 비롯한 여러 선비들이 『중용』을 강론하기도 하였지요.
존애원의 설립목적이 ‘인간애의 구현’에 있다는 점은 숭고한 덕목입니다. 아이티 현장에 급파된 세계의 구호팀들 역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소명감으로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너진 건물 잔해더미에서 한 사람의 생존자라도 더 구해내기 위해 애를 태우는 것입니다. 구호물자를 전달하는 과정도 원활치 못해 큰 고생을 하고 있다지요. 여진을 우려해 거리로 나와 있는 이재민들의 고통은 또 어떠하겠습니까. 슬픔과 불안을 떨치기 위해 기도와 찬송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는 사람들은 가슴을 저리게 합니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상점을 약탈하고 갈수록 폭력과 범죄가 난무한다는 보도는 더욱 안타깝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을 합니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경주 최부잣집의 지침과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백성을 구제했던 상주 존애원(存愛院)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러나 이제 공동체적인 삶을 위한 나눔이 어떤 특정 계층만의 의무이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김밥 할머니와 떡볶이 할머니,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들의 나눔은 훈훈합니다. 대학생과 직장인들이 생활비를 아껴 후원금을 내고, 전업주부와 노인들까지도 시간을 쪼개 봉사를 하지요. 그들은 말합니다. “기부와 봉사는 우리가 밥을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요.
|
섣달에 냅일날이 들어서 냅일날 밤에 눈이 오면 이 밤엔 쌔하얀 할미귀신의 눈귀신도 냅일눈을 받노라 못 난다는 말을 든든히 녀기며 엄매와 나는 앙궁 우에 떡돌 우에 곱새담 우에 함지에 버치며 대냥푼을 놓고 치성이나 드리듯이 정한 마음으로 냅일눈 약눈을 받는다 이 눈세기물을 냅일물이라고 제주병에 진상항아리에 채워두고는 해를 묵여가며 고뿔이 와도 배앓이를 해도 갑피기를 앓어도 먹을 물이다 ―백석, 「古夜」부분 |
오늘은 동지로부터 셋째 미일(未日)인 납일(臘日)입니다. 예전엔 납일에 내리는 눈을 특별하게 여겼습니다. 그 눈을 정성껏 독에 받아 녹인 납설수(臘雪水)로 각종 환약을 빚었습니다. 또 그 물로 눈을 씻으면 눈이 밝아진다고도 하고요. 의서(醫書)에 “납설수는 염병과 모든 병을 다스린다.”고 한데서 생긴 풍속이지요.
눈이 또 펑펑 쏟아집니다. 천지사방 경계도 없이, 높고 낮음도 없이 온통 하얗습니다. 아프고 가난한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뜨겁게 끌어안았던 존애원. 그 나눔의 실천이 세상을 살리는 납설수가 되기를 “치성이나 드리듯이 정한 마음”을 가져봅니다. 햇빛에 반짝이는 눈꽃에 흑진주 같은 아이티 어린 아이의 눈물이 자꾸 겹쳐집니다.(♣)
- 글쓴이 : 황구하
-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