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을 만나다
칠보산의 숲길을 걷는 시간 (Ⅱ)
글 이미홍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 칠보산 숲길을 걸었었다. 칠보산휴양림을 찾았던 그 길은 온통 초록빛의 향연, 그 속에서 하얗게 빛나던 자작나무를 만났다. 무덥던 여름을 지나면서도 문득문득 생각이 났다. 그리고 가을이 익어가던 날에 그때 만났던 자작나무를 보러 다시 영리 칠보산길로 갔다.
마을 안에 연꽃이 많아 연곡, 연동(蓮洞)이라고도 불린 영리에는 12, 13세기 고려시대에 원 씨들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되는 칠보산의 역사만큼이나 고려의 흔적을 담고 있는 산 아래 마을의 역사도 깊다.
7번 국도에서 내려 부엉이바위와 영리 마을회관을 지나 삼성인력개발원으로 가는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골짜기를 통째로 담은 듯한 저수지가 나온다. 산에서 내려오는 골골 물이 하나로 모이는 곳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었다. 멀리 삼성인력개발원이 보이는 영리저수지를 끼고 돌아들면 개울 건너 왼쪽으로 칠보산휴양림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오롯이 휴양림으로 향하는 외길인 칠보산로를 따라가는 그 길은 자작나무 가로수가 함께 가는 길이다.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갈 만큼의 적당한 너비의 길이 굽이굽이 산허리를 타고 완만하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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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숲 |
자작나무를 길동무 삼아 마지막 언덕배기를 오르면 산꾼들이 쉬어가던 옛 삼거리가 나온다. 휴양림이 가깝다는 신호다. 영리와 삼계로 이어지던 옛길과 만나는 지점에서 잠시 멈춰 숨을 고르며 자작나무 냄새를 맡는다. 산이 높아지고 깊어질수록 초록의 숲 그늘 속의 자작나무 흰빛이 눈부시다. 길가 고목이 된 자작나무 기둥에 감탄하며 또 한 번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눈앞이 자작나무로 가득하다. 영리 칠보산길이 숨겨둔 자작이 골짜기 아래서부터 하얗게 제 몸을 드러낸다. 자작나무 기둥들 사이사이 자작나무 잎이 은사시나무처럼 얇게 흔들리며 반짝인다. 길에서 내려 숲으로 들어가 나무에 몸을 기대고 숲 사이로 열린 하늘을 본다. 높은 가지 끝에 파란 하늘이 열려 있다. 자작나무들이 깊은 숲속에서 제 몸을 밝혀 존재를 알리는 까닭도 끝내 닿지 못할 줄 알면서도 하늘을 꿈꾼 춘향이의 그네가 그러했듯 푸른 하늘을 염원해서일지 모르겠다.
등운산 산행기점
자작나무숲길에서 몇 걸음만 더 가면 등운산과 칠보산의 산행기점이다. 등운산을 거쳐 능선을 타고 칠보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로, 휴양림에서 시작되는 산행길과도 만난다. 그리고 그 길은 칠보산휴양림 안내소로 이어진다. 휴양림을 보고 금곡리 방면으로 내려와도 좋지만, 영리 쪽으로 하산하는 길이라면 자작나무 길로 돌아내려와 삼성인력개발원이 있는 범흥마을까지 보고 오는 것도 좋다. 범흥마을은 세 가구가 살고 있는 칠보산 바로 아래 영리 제일 끝동네로 산허리도 한 박자 쉬어가는 동네다.
도보로 가려면 무조건 영리 마을회관을 지나서 가는 길을 추천한다. 승용차로 접근할 경우 차량 교행이 어려운 지점도 있지만 차를 만나는 일이 드문 길이라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등운산을 거쳐 칠보산 정상까지 산행하는 이들의 경우 칠보산휴양림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등운산 산행기점에서부터 등산을 시작하는 이들이 많다. 휴양림 숲길에서도 등운산과 칠보산 등산로로 연결이 된다. 휴양림 안에서 시작되는 등산로는 두 곳으로 열린다. 하나는 산림휴양관 옆 숲길로 난 내부 등산로요, 다른 하나는 입구매표소 직전의 외부 데크 계단에서 시작되는 등산로다. 어느 곳을 택하든 잘 자란 나무들이 아늑하게 펼쳐진 칠보의 숲길을 지나 정상으로 오르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숲길 산행은 유금마을로 가서 유금사(有金寺)에서 칠보산을 오르는 길이다. 등산로가 잘 정비된 휴양림 안 숲길에 비해 이정표가 잘 되어 있지는 않지만 다른 등산로에 비해 비교적 거리가 길지 않고, 계곡을 끼고 정상으로 이어진 숲길도 험하지 않아 오르기에 무리가 없는 길이다. 잘생긴 노송과 허리 굵은 굴참나무와 단풍나무가 많아 봄이며, 가을이며 걷는 재미가 남다른 숲길이기도 하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볕 좋은 날을 골라 유금사 길로 칠보산의 또 다른 숲길을 만나러 들어간 까닭이다.
유금마을 사진
유금사는 영덕에서 병곡 고래불해수욕장 방면 영동4리에서 들어갈 수도 있으며, 병곡을 지나 금곡리에서도 갈 수 있다. 반대로 금곡리 방면에서 들어가 유금사를 방문하고 칠보산자연휴양림을 거쳐 영리 방면으로 나와도 좋다.
유금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개구리바위(金蛙)가 있다. 옛날 이곳 사람들은 장날이면 영해읍내까지 먼 시장을 보고 밤늦게 고개를 넘어 돌아오다 산짐승을 만나 위협을 받다가도 이 바위만 넘으면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고 한다. 유금마을로 가는 길, 그 바위에 다시 눈이 간 것은 거기에 칠보산에서 광물을 캐던 사람들의 흔적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칠보산 동쪽능선에서 작업하던 광부들이 차량이 잘 다닐 수 있도록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곧게 내려고 바위를 깨다가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과 함께 천둥이 치고 홍수가 나 깨어진 바위를 급히 붙였다는 이야기는 칠보산의 일곱 가지 보물 중에 구리와 철이 들어있다는 사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유금사 길은 유금마을이 지켜온 장화부인 이야기가 남아 있는 길이기도 하다. 절 옆으로 난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정갈하게 가꾼 송림 속에 장화부인을 모신 성황당이 있다. 칠보산의 신령스런 기운에 기대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는 당숲이다. 성황당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칠보산 신령님과 유금사에서 신라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의 극락왕생을 빌며 생을 마감한 장화부인의 위패를 모시고자 당을 건립하였다는 내력이 적혀있다. 장화부인의 애달픈 염원이 천년 세월을 지나 지금까지도 이 마을에 아늑하게 서려있는 것이다.
장화부인을 모신 유금마을 당숲
산허리를 돌아 접어들자 가을빛을 더하며 물들어가는 칠보산 능선과 그 아래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평화로운 유금마을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작은 다리를 건너기 전 개울 왼쪽길이 유금사 길이다. 금곡3리의 본래 이름은 유금(有金)이다. 6세기경 금(金)이 발견되었다 하여 유금이라 했는데,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금이 많이 나와 국가에서 금을 채광 하였던 곳이라 한다. 신라의 보물인 금척(金尺)도 이 유금마을에서 발견돼 선덕여왕께 진상되었다고 전하며,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왕명에 따라 이 마을에 유금사(有金寺)를 창건한 것도 아마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은가 한다.
유금사 사진
유금사를 들머리로 왼쪽으로 난 숲길로 칠보산을 오른다. 이정표는 따로 없지만 마을 어른께 들은 대로 절 옆, 계곡을 끼고 산으로 이어진 숲길로 찾아든다. 저 멀리 보이는 칠보산 정상과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계단논을 뒤로 하고 들어선 숲은 유독 산그늘이 깊다 했더니 소나무향이 갈수록 짙어진다.
유금사 산행 들머리길
소나무 숲길
모퉁이마다 지키고 선 아름드리 소나무를 지나 임도와 만나는 갈림길에서 임도를 버리고 산으로 난 숲길로 올라선다. 들어설 때는 한 사람이 지나면 딱 맞을 것 같은 산길은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단풍이 짙어지고 길섶에도 여유가 생겨 두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기도 하다가 때로 나란히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도 좋은 길이 된다. 발아래에서는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낙엽 밟히는 소리가 들리는데 고개를 들면 소나무 숲 사이로 사방이 온통 노랗고 붉다. 바람과 햇빛 그리고 맑은 산속의 공기가 숲과 나무를 이렇게 곱게 물들일 수 있다니, 자연의 경이에 그저 넋 놓고 감탄할 뿐이다. 노송 사이에서 붉은빛이 더 선명하다. 생각지도 않은 선물 같은 풍경이다. 유금사를 지나 정상으로 가는 이 길은 칠보산이 숨겨놓은 가을에 꼭 걸어야 할 단풍이 아름다운 숲길이다.
산 속의 길은 사람이 내는 길이라 길 곳곳에 사람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갈래길을 만나면 산악회 리본이 반갑고, 산을 다녀간 사람들이 쌓아 올린 돌무덤을 만나면 나도 작은 돌 하나를 찾아 그 위에 얹게 된다.
돌무덤이 있는 산길 풍경
잘생긴 소나무군락지와 곱게 물든 칠보산 정상 능선이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산굽이를 지나 한참을 더 오르면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을 만난다. 등운산과 자연휴양림 방면에서 이어지는 칠보산 능선길과 만나는 지점이다. 헬기장을 지나 정상으로 가는 능선길은 영덕에서 울진으로 길게 펼쳐지는 동해바다를 동무삼아 걷는 길이다. 바다를 연모하는 양 바다를 향해 가지를 뻗은 나무들로 인해 전망이 시원하게 트인 곳은 없지만 능선을 따라 숲길을 걷는 내내 나뭇가지 사이로 바다가 보인다.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를 이야기한 육사는 ‘광야’에서 바다를 꿈꾼다. 알고 보면 칠보산의 산자락도 끝내는 바다에 가 닿는다. 그런 의미에서 칠보산 산행 길은 ‘숲 냄새를 맡으며, 짙푸른 바다를 꿈꾸는 길’이라 말하고 싶다.
유금사를 향해 단풍이 고운 숲길을 통과해 되짚어 내려오며 다시 생각하니, 칠보산이 ‘일곱 가지 보물을 품은 산’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싶다. 오랜 세월 칠보산 자락에 기대어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마침내 칠보산의 일곱 가지 보물에 대한 전설로 남은 건지도 모른다. 숲길을 지나 유금사 산자락을 돌아 다시 사람의 마을로 나오는 길, 해를 구름 속으로 숨긴 칠보산이 바다를 향해 길게 산 그림자를 드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