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황구하_시로 거니는 상주]탯줄, 생명의 길
- 컬처라인(cultureline@naver.com)
시로 거니는 상주
탯줄, 생명의 길
글 황구하
함창 태봉산
상주에는 세 곳의 태봉이 있습니다.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 화서면 상현리, 모동면 상판리의 태봉이지요. 태봉은 ‘태실(胎室)이 있는 산’ 혹은 ‘태(胎)를 봉(封)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 왕실에서는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길지(吉地)를 골라 탯줄을 봉안했습니다. 이를 장태(藏胎) 또는 안태(安胎)라고 합니다. 이 의식은 생명의 탄생을 귀히 여기고 자손의 안녕과 장래 삶의 풍요를 축원하기 위함인데요. 반드시 들 가운데의 둥근 산봉우리에 태실을 만들었습니다. 함창, 화서, 모동의 태봉 또한 그러한 조건에 잘 부합되는 곳이지요. 그러나 탯줄을 담은 태항아리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1930년대 경기도 서삼릉으로 이봉(移封)되었다는데요. 일제강점기 조선의 정통성을 말살하기 위해 횡포를 부린 일본으로부터 태실을 보호하기 위함으로 여겨집니다.
초봄, 딸내미랑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의 태봉산에 다녀왔습니다. 임산부의 배 모양을 하고 있는 태봉의 정상까지 이어진 철 계단을 올랐는데요. 가파른 경사에 다리도 아프고 숨이 턱턱 막혀 쉬엄쉬엄 오르는 데도 금세 땀이 흘렀습니다. 그래도 성성한 소나무와 생강나무 맑은 꽃빛을 만나니 더없이 환했습니다. 계단 중간쯤에는 하얀 새똥이 물감처럼 흩뿌려져 있었는데요. 나무를 올려다보니 백로 떼가 서식했던 흔적이 보였습니다.
태봉산 정상은 마치 임산부의 배꼽 같았습니다. 태봉정(胎封亭) 아래 태함이 예쁘게 서 있었는데 항아리 모양의 검은 바위에 낀 이끼가 세월을 말해주었지요. 이 태실은 연산군 원자(元子) 금돌이(金乭伊)의 태를 봉안한 것이라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사람들이 태를 넣어둔 백자를 꺼내갔다는데요. 태함의 뚜껑이 열린 채 나뒹굴고 있는 것을 1994년에 복원했다고 합니다.
화서 태봉 금표비
태함 아래 계단을 따라가면 금표비(禁標碑)가 있는데요. 글자의 마모가 심했습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홍치14년 7월 2일(弘治十四年七月初二日立店)’과 ‘왕자태실(王子胎室)’이 새겨져 있는데 상주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라 합니다.
딸내미는 태실을 처음 본다며 “아이고, 아들이 태어났을 때 연산군은 아비로서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좀 짠하네요. 우리가 평가하는 왕이기에 앞서 그도 한 아이의 아버지인데….”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딸내미의 출산과 육아는 좀 애틋함이 있지요.
딸내미는 사위와 함께 중국에서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2020년 1월 중국에서 잠시 다니러왔다가 코로나19로 출국하지 못했습니다. 직장 때문에 사위 혼자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불룩한 배를 안고 딸내미는 우리 집에서 엉거주춤 머물게 되었지요.
벚꽃이 한창이던 4월에 출산을 했습니다. 출산이 임박한 진통이 오며 구미까지 가야 했고(상주의 병원은 코로나19로 출산을 받지 않음) 사위의 빈자리는 내가 대신 지키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점심 무렵 간호사들이 분주해지더니 나에게 탯줄을 잘라줄 거냐고 묻더군요. 오, 이런 순간이 오다니, 감격스러우면서도 떨렸지요. 아기의 쩌렁한 울음소리에 놀랄 틈도 없이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탯줄을 자르는데 그만 울컥 뜨거움이 올라왔습니다. 아기를 받아 안으며 딸내미 역시 눈물이 그렁그렁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아기는 “아기야, 고생했어. 엄마야.” 하는 딸내미의 목소리를 듣고는 울음을 뚝 그쳤습니다.
코로나19의 무서운 틈을 뚫고 우리에게 온 아기는 그래서 더 갸륵했지요. 태어난 아기를 보기 위해서는 하루 정해진 시간에만 면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 면회 시간이 왜 그리도 불편했는지 모릅니다. 다들 엄마, 아빠가 아기를 보러 오는데 우리 아기만 아빠가 올 수 없으니 그 상황이 슬프고 미안했습니다. 그런 딸내미와 아기가 너무 안쓰러워 산후조리는 집에서 하자고 했지요.
두어 달 지나 이제 딸내미는 아기를 데리고 다시 사위가 기다리는 중국으로 가겠거니 생각했는데 세상이 그렇게 끝도 없이 야속하게 흘러갈 줄 몰랐습니다. 아기를 데리고 비행기를 타려면 어찌해야 하나, 내가 같이 갔다 와야 하나, 예방접종은 물론이고 애가 아프면 어쩌나, 중국에 가면 저 어린 걸 또 어찌 키우겠나 한숨을 쉬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런 걱정은 오히려 행복한 일이었지요.
비자가 문제였습니다. 딸내미의 비자는 상관없었지만 아기의 신규 비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내주지 않았지요. 막막한 현실에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이런 경로 저런 경로로 비자 발급을 위해 애를 썼지만 아기 비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식구들은 식구들대로 진이 다 빠졌습니다. 사위는 사위대로 중국에 홀로 남아 직장생활하면서 밥이나 제대로 챙겨 먹고 있는지, 날마다 애태울 걸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장마는 또 왜 그리도 긴지, 그해 여름과 가을 내내 질척거렸습니다.
결국 사위가 용단을 내렸습니다. 중국에서의 직장과 살림을 모두 정리하고 2021년 1월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사위가 자가 격리를 마친 작년 설날, 외손녀는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휴대폰으로만 보던 아빠와 상봉을 했습니다. 처음엔 손을 내밀고 품에 안겨 “아빠빠빠….” 그러다 제 아빠 얼굴을 한참 응시하더니 울기 시작해 온 식구를 다 울렸습니다. 아기도 통곡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화서 태봉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의 태봉은 선조의 12남 인흥군(仁興君. 1604~1651. 어머니: 정빈 민씨)의 태실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취는 없지만 ‘태봉’이라는 지명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지요. “조선 시대에는 조정에서 특별한 혜택을 주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고, 일반 백성에게 태봉은 오히려 불이익을 줄 때가 있게 되기도 했다. 즉, 노동에 동원되든가, 살던 터전에서 쫓겨나야 하든가, 화소(火巢) 지역이라 경작을 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생겨나기도 했다. 직접적인 피해가 아니라 하더라도 흉년에 백성은 굶주리는데 허례허식으로 국가재정을 낭비하여 비난을 받기도 했을 것”(조희열, 「상주의 태봉(胎封) 考」, 『상주문화』 제21호(『태봉등록』 2, 숙종4년 6월 24일. 『선조실록』 권60))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지명으로 남은 태봉리 태봉산은 너른 들을 오가며 볼 수 있는 푸근한 풍경입니다.
상주시 모동면 상판리의 태봉은 조선 제9대 성종의 3남 안양군(安陽君. 1480~1505. 어머니: 귀인 정씨)과 4남 완원군(完原君. 1480~1509. 어머니: 숙의 홍씨)의 태를 묻은 곳입니다. ‘상주역사공간연구소’ 대표 김상호 선생의 도움을 받아 답사했는데요. 상판저수지 아래 냇물과 들판을 가로지르며 오르는 산 모양 역시 임산부의 배와 같았습니다. 산이 가팔라서 오르는데 애를 먹었는데요. 갈비(솔잎)가 수북하고 길마저 없으니 주르륵주르륵 미끄러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성냥처럼 꽃망울을 달고 있는 참꽃이 군락을 이루며 길잡이인 양 눈길을 끌었지요.
모동 태봉
산 정상 둥근 가장자리에 있어야 할 태실 대신 한 기의 묘가 자리하고 있었는데요. 오래 돌보지 않은 듯한 묘 옆자리에 두 팔 벌려 품을 만한 크기의 둥근 태함 세 개가 반쯤 땅에 묻혀 있었습니다. 태항아리를 넣고 보호하는 위아래 두 개를 한 쌍으로 볼 때 하나는 짝을 잃은 것인데요. 태함과 묘가 함께 자리하고 있는 광경은 처음이었습니다. 원래 태함이 있던 자리에 묘를 쓴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데요. 풍수에 관한 사람 욕심의 허와 실을 생각하며 삶과 죽음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새겨보았습니다.
손녀가 연필을 쥐고 끄적끄적/밥상 휴지에다가/뭐라 뭐라 웅얼웅얼하면서/삐뚤빼뚤 선도 그리고/동그라미도 그리고/뭘 자꾸 그리고 그린다//고작 16개월 애기가 뭘 자꾸 그린다냐,/꽃게찜을 먹다가 한마디 했더니/어머니, 저 선 하나로 오늘 본 나무도 그리고 새도 그리고 고양이도 그리고 구름도 그리고 마당에 핀 꽃도 그리는 거예요//남은 꽃게 두 마리 얼른 사위 그릇에 얹어주었다
―황구하, 「사위한테 시를 샀다」 전문
외손녀와 딸
외손녀는 어느새 두 돌을 맞이합니다. 외손녀가 태어난 지 일주일쯤 됐을 때일 겁니다. 기저귀를 보느라 배냇저고리를 들췄는데 손가락 길이만큼 매달려 있던 탯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깜짝 놀라 찾아보니 아기 팔 아래 얌전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그새 탯줄이 말라 저절로 떨어지고 배꼽이 앙증맞게 드러났지요.
탯줄, 생명의 길입니다. 엄마와 아기의 길입니다. 그 길은 내가 엄마로부터 이어져 왔듯 나와 딸, 그리고 우리 아기에게로 이어져 또 하나의 존재를 탄생시켰습니다. 아직도 코로나19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절 아기가 태어나고 엄마가 태어난 것이지요. 더불어 저도 외할머니로 태어났고요. 그래서 아이 밴 엄마 같은 태봉은 인간 본연의 생명 존중, 삶의 태동 같은 또 하나의 상징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아이들이 잘 자라기를 바라는 내 마음에 태봉이 있습니다.(♣)
- 글쓴이 : 황구하
-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