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정창식_마을이 있는 문경시]산호벽수(珊瑚碧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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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있는 풍경
산호벽수(珊瑚碧樹)
글 정창식, 사진 김우용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82호 변동식 가옥의 전경
마을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마을을 지키고, 마을은 사람으로 빛나고 다시 다음 세대로 이어간다. 더욱이 수 백 년 역사가 깃든 전통적인 마을에서라면 사람의 역할과 영향력은 정말 크다. 그런 마음으로 마을을 찾았다. 그리고 사람을 만났다. 산양면 미르물, 진정(辰井)1리, 이 마을은 500여 년 전부터 초계(草溪) 변씨(卞氏)들이 세거해 온 우리 지역의 유서 깊은 집성촌 중의 하나이다. 그곳에서 초계(草溪) 변씨(卞氏) 28세손으로 서울중앙지방법원장과 모 법무법인의 대표변호사를 지낸 변동걸 변호사를 만났다. 마을 입구에 문경대 지역개발연구소 특임교수인 변동식 행정학 박사도 함께 나와 있었다. 사실, 변동걸 변호사는 몇 년 전부터 인연을 이어오고 있고 변동식 박사로부터는 우리 지역문화와 관련해서 적지 않은 조언을 받고 있었기에 마중이 고마웠다.
“우리 마을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한마디에 객(客)은 진객(珍客)이 되었다. 그래서 고개 숙여 예를 드렸다.
마을 앞에 조성된 용샘
행정명인 ‘진정(辰井)’은 마을에 ‘용(龍)샘’이라고 부르는 우물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미르물’의 한자음이다. 마을 입구 못(龍潭) 가에는 초계 변씨 문경 입향 560년을 기념하는 세거비(世居碑)가 우뚝하다. 그 비를 보면서 후손들의 애향심과 자긍심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꼈다. 비(碑)에는, 1460년 경 초계 변씨 11세손인 지락헌(至樂軒) 변흠(卞欽) 공이 문경 반암에 입향하여 당대의 공신 채수(蔡壽)와 허백당 홍귀달(洪貴達)) 등과 교유하였다는 지락헌기(至樂軒記)의 내용 일부를 새겨 넣었다.
“용샘은 물이 맑고 깨끗했는데 지금은 우물의 형태로만 남아 있습니다.”
마을 앞을 흐르는 개천가에 상용천(上龍泉), 중용천, 하용천 등으로 구분되는 용샘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개천에는 봄나물인 미나리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6‧70년대에는 이 마을에 70여 호 정도 살았는데, 지금은 25호 정도 됩니다. 그 가운데 안동 권 씨들이 10여 호 정도 있고요.”
변동식 박사의 마을의 유래와 현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는 문경시의 정책자문단장을 지내는 등 지역 발전에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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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나무 |
춘강재의 회화나무, 보호수로 지정된 회화나무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한다 |
마을을 내려다보는 곳에 수령 460여년이 된 큰 회화나무가 한옥 두 채를 지키고 있었다. 회화나무는 임진왜란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랬다. 저 회화나무는 오랫동안 사람과 집, 그리고 마을을 지켜왔다. 그리고 지금은 보호수로서 마을의 역사를 증명하며 마을을 가치롭게 하는 상징이 되고 있음이다.
회화나무를 경계로 왼쪽은 변동걸 변호사의 춘강재(春崗齋)이고 오른쪽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482호로 지정된 ‘문경 변동식 가옥(聞慶 卞東軾 家屋)’인 해강재(海崗齋)이다. 먼저 춘강재로 향했다. 춘강재는 변호사의 조부인 변종헌(1902~1948) 선생의 호 춘강(春崗)을 당호(堂號)로 정한 것이다.
해강재
“이 집은 한옥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흙집을 고쳤어요. 제게는 딱 맞춤입니다.”
그는 얼마 전 부조(父祖) 등 삼대(三代)의 한시를 모은 청계유향(淸溪幽香)과 조부 춘강 선생이 1943년에 각종 사료와 문헌 그리고 갈명(碣銘) 등에 근거하여 시조인 시중(侍中) 변정실 공 이래로 변 씨 문중의 빼어난 인물에 대한 공훈과 학문 등 사적을 조사, 수록하여 정리한 청계세고(淸溪世稿)를 발간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숭조(崇祖)의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는 고향인 이곳에 자주 내려온다. 조상에 대한 흠모(欽慕)와 옛집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변문(卞門)에 대한 자랑과 긍지가 늘 이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1530년경에 초계 변 씨 안인(安仁) 공(公) 등이 산북면 웅창마을에 학문과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세운 수계소(修禊所)가 우리 지역 최초의 서당인 죽림서당의 시초가 되었어요.”
춘강재에서 바라 본 회화나무
춘강재 사랑방에 앉아 변 박사의 설명을 들었다. 창 너머 회화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보호수로 지정된 해강재 앞 나무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했다. 어쩌면, 이 마을 상징의 하나는 저들 회화나무라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서당이 없이 교육환경이 열악하였던 우리 지역에서 수계소는 서당의 역할을 대신 하였다고 한다. 이때 이를 주도한 이는 변안인(卞安仁), 황사웅(黃士雄), 서소(徐訴) 등 3문중 5인이었는데, 다섯 명 가운데 세 명이 초계 문중에서 참여하였다고 한다. 선조들의 지역 교육에 대한 열정은 이후 영빈서당 설립과 운영에도 영향을 미쳐 우리 지역 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지금도 초계 변 씨를 비롯한 문경지역의 18대 문중이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지역의 인재들을 양성하는 교육활동에 누구보다 노력해 오셨습니다.”
변 박사는 직접 조사한 영빈서당에 대한 유래와 문경지역 서당의 현황 자료들을 보여주었다. 그는 우리 지역 서당의 활용계획 등에 대한 정책 방안을 관계 당국에 건의하고 있는 중이다. 옛것을 새롭게 하려는 그의 생각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해강재의 뒤안
변 박사의 고택인 해강재(海崗齋)로 갔다. 해강재는 1941년 지어진 것으로 전통 한옥구조에 유리창문과 좁은 복도 등 근대 건축양식이 접목돼 특색이 있다.
“조부께서 서울의 미가헌이라는 근대식 한옥을 보고 오셔서 그대로 지어셨다고 해요.”
그때, 정면 현판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추사 김정희의 호 완당(阮堂)이 새겨 있었다.
“산호벽수(珊瑚碧樹)”
봉원사 현판에도 걸려 있는 저 글은 푸른 산호와 나무의 모습을 뜻한다고 하는데, 필체나 문장의 아름다움이 뛰어남을 비유할 때 쓴다고 한다.
“원래는 청연시경(靑蓮詩境)이라는 글씨 현판이 옆에 있었어요.”
문득,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서 교육에 힘쓰며 시(詩)와 문(文)을 즐겨 했던 선조들의 성정에 맞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접이 소홀했습니다. 우리 마을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회화나무 앞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아마도 이 나무 아래에서 수 백 년 동안 같은 이별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마을의 유래를 담은 세거비
변동걸 변호사, 늘 밝게 웃으며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는 그에게서 권위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함께 있으면 그가 연장임에도 친구처럼 또는 막역한 인생의 선배를 대하는 마음인 것을 알고 스스로 놀라곤 한다.
마을을 둘러보았다. 낮은 언덕들이 마을을 감싸고 집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듯 사이좋은 이웃처럼 보였다. 어쩌면, 이와 같은 풍광과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닮게 된다. 같은 문중(門中)의 형제사이인 변동걸 변호사와 변동식 박사 그들도 마찬가지다. 마을을 나왔다. 그때 용샘 어딘가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그 옛날 살았다던 미르(龍)가 깨어나고 있는 걸까?
마을 입구
- 글쓴이 : 정창식
- ▪ 현 문경문화원 이사 ▪ 안동대학교 문화산업전문대학원에서 스토리텔링을 전공하였다. [주간문경]에 문경문화와 관련된 글을 연재하고 있다. 문경의 자연과 마을, 유적과 문화재 그리고 오래된 이야기들을 새롭게 봄으로써 문경문화의 가치를 높이고 싶어한다. ▪ 저서 수필집 "아름다운 선물 101" (2010) 에세이집 『아름다운 선물 101』 은 우리 인생에서 있어서 스치는 인연들과의 소중한 관계, 베풂의 마음 등 일상에서 느낀 감정들을 엮은 책이다. 수필집 "문경도처유상수" (2016) 주간문경에 2010년부터 연재하고 있는 문경문화와 관련된 글 중 57편을 선별해 책으로 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