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황구하_시로 거니는 상주]상주아리랑고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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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거니는 상주
상주아리랑고개 사람들
글 황구하
지난 해 늦은 가을부터 권현옥, 이미령 시인과 구술집을 엮기 위해 상주아리랑고개 빙고(氷庫)마을에 같이, 또 따로 드나든 지 벌써 6개월이 흘렀습니다. 어느덧 마을 앞 둠벙 비탈에 노오란 애기똥풀이 꽉 들어차고 벚꽃이 활짝 눈부십니다. ‘빙고(氷庫)마을’은 임금께 진상할 은어를 저장하던 얼음 창고가 있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빙고가 어디에 있는지, 왜 아리랑고개라는 이름이 붙여졌을까 하는 궁금증으로부터 마을에 발자국을 찍었습니다.
한 번은 마을을 두르고 있는 빙고산과 화지산을 답사했는데요. 빙고를 관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안일호장(安逸戶長)의 묘소와 마을회관 앞이 ‘용알방울, 용알방구’로 부르는 둠벙이었다는 내력을 확실시해주는 청대(靑臺)의 발견은 무척 설렜습니다.
안일호장 묘소는 향토학자 김상호 선생이 우연히 발견했는데 궁금하던 차 빙고마을에서 김성석 화가, 이미령 시인과 합류해서 빙고산에 올랐지요. 층층 쌓인 낙엽 때문에 고생을 좀 했지만 산마루에서 빙고마을을 한눈에 훤히 볼 수 있었습니다. 안일호장 묘소는 “안일호장상산박공휘현택지묘(安逸戶長商山朴公諱賢澤之墓)”가 새겨진 상석만 있고 봉분은 없었습니다. 이장한 것 같지는 않고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가라앉은 듯했습니다. 상석 앞에서 절을 하고 다음에 올 때는 술이라도 한잔 올려야겠다고 이야기하며 내려왔습니다.
동네 어귀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김상호 선생께서 가드 레일 너머 빙고산 옆구리의 바위를 가리켰습니다. 무슨 글자가 있다고 했지요. 그러고 보니 대(臺) 자가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오른쪽에도 무슨 글자인가 있는데 흐릿했습니다. 어렴풋이 월(月) 자가 드러났지만 그거로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요. 김상호 선생께서 해가 좀 기울 때 다시 와야겠다고 했습니다. 햇빛이 사그라들면 보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경북 상주지역의 바위글과 그림』 책을 낸 분다운 경험의 지혜였지요.
해가 질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우석여고 뒤편 화지산을 돌아봤습니다. 덕분에 선생께서 연구하시는 바위 구멍 등 역사 공부를 했는데요. 여단(厲壇) 터로 추정되는 곳도 살펴보았습니다. 전쟁, 돌림병 등으로 비명횡사한 고혼을 제사하던 여단이 조선 초부터 있었다는 사실은 코로나19 역병의 시절을 건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귀한 정신임을 새기게 했습니다.
해가 산을 넘어갈 무렵 다시 그 장소로 갔습니다.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핸드폰 불빛을 바위 머리에 비추니 글자가 스르르 드러났습니다. 푸를 청(靑)이었습니다. 그 ‘청대(靑臺)’라는 글자가 드러나는 순간 “빙고(Bingo)!” 궁금한 퍼즐이 딱 맞춰졌지요.
청대의 암각서는 북계(北溪) 조광벽(趙光璧) 선생의 글씨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신빙성 있는 게 호가 ‘북계’인데 빙고마을을 부르는 이름 중에 ‘빗기’가 있습니다. 바로 ‘북계’라는 뜻인데 북계 선생이 “상주읍의 북쪽에 있는 북계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지요.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나서기도 했던 조광벽 선생은 이미령 시인의 시댁 조상이라서 감회가 컸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후렴)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아버지 어머니 어서 와요 / 북간도 벌판이 좋답디다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 백두산고개로 넘어간다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후렴)
문전의 옥토는 어찌 되고 / 쪽박의 신세가 웬일인가
원수로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 총 가진 포수가 원수로다
말깨나 허는 놈 재판소 가고 / 일깨나 허는 놈 공동산 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김소희 명창이 1989년에 성음스튜디오에서 녹음하고 음반에 수록된 「상주아리랑」의 곡조와 가사, 그 연원을 짚을 때는 가슴을 쳤습니다. 갑오경장 때 우리 상주에서도 동학농민군 100여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말깨나 허는 놈 재판소 가고/일깨나 허는 놈 공동산 간다”고 하는 것처럼 태평루와 현 남성청사 터에 있던 남사정에서 처형된 시신은 상주읍성 북문으로 나와 야산에 버려지듯 묻히게 됩니다. 그때만 해도 죽은 사람은 읍성 북문을 통해 나가게 했는데 북문을 나와 북천을 건너고 아리랑고개를 넘고 넘은 통한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것이지요.
또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만주와 “북간도 벌판” 등으로 이주했던 우리 민족의 애환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청개구리’ 악단 김의철 씨가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하다가 그곳 상주 유민들이 불렀던 「상주아리랑」을 듣고 감동하여 또 하나의 「상주아리랑」을 창작해서 음반으로도 나와 있다고 합니다. 중모리 절반, 엇모리 절반의 가락이 더욱 처연하고 아름다운 「상주아리랑」 계승을 위해 마을 분들 스스로 ‘상주아리랑보존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으니 뭉클한 일이지요. 상주 사람이면 누구나 다 「상주아리랑」을 부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귀에 쟁쟁합니다.
사실 마을 분들과 처음 인사를 건네며 방문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코로나19로 엄중한 시절이라 마을회관도 폐쇄되어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송구한 일이었습니다. 하물며 동네 개들도 경계의 눈빛을 늦추지 않고 연신 짖었습니다. 그럼에도 마스크를 쓴 채 벚나무길과 조릿대 터널을 일상으로 걸었습니다. 골목에 핀 패랭이와 국화꽃이 피고 지는 동안 한 분 한 분 인사를 하다 보니 여섯 살 어린이부터 아흔네 살의 어르신까지 50여 분을 만났습니다.
비닐하우스 농막에서 늘 팔을 벌려 맞이해주던 정구지 아지매, 추운 한겨울에 고생한다며 “들어 와 들어와.” 하시던 화목보일러 아재, 이 동네서만 밸밸밸밸 일곱 집을 일곱 번 이사했다는 부녀회장님, 이웃에게 개밥을 전해주러 가시던 곱단 할매, 빈집이 늘어난다며 한숨 쉬던 국가유공자 할배, “여가 핀하고 좋지. 너무 오래 살아 탈이라. 이제 꼼짝달싹도 못하고, 흘러 흘러 나이만 먹었어. 호박은 늙으면 사 먹기도 하지만 사람은 늙으면 써먹지도 못해여.” 하면서도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최고령의 할매 등 동네 분들은 일을 하다가도 반겨주고 뜨끈한 커피를 건네주며 모닥불을 쬐게 해주었습니다. “돌아다니면서 배곯으면 안 된다.”고 손을 끌어당길 땐 코끝이 시큰했습니다.
빙고를 비롯해 동학, 아리랑고개, 주막촌, 마을의 내력 등에 대해 여쭙고 개개인의 살아온 경험과 일, 가족 등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원폭 그거 맞고 여섯 살 때 한국으로 왔어. 부모님이 돈 벌러 갔다가 우리 형제들 낳아 가지고 거서 다 크고 그랬지. 할매 할부지가 여기 있으니까 일루 왔어. 배 타고 나왔는데 일본에서 기억은 별로 없어. 폭탄 맞아서 새카맣게 그을린 송장 누웠는 거랑 방에 시계가 뚝 떨어져 널브러져 있는 그 기억이 나여. 언니하고 오빠는 학교 가다가 다리 밑에 숨었다 카대. 엄마가 내 손을 붙들고 막 내뺐어. 바람 반대 방향으로 가야 된다 캐서 글로 계속 내뺐지. 그래서 그런가 딸도 암 걸리고 아들도 암 걸리고. 나 땜에 그렇지 싶어여. 자식들이 아프다 캉께 제일 마음이 아파. 나는 어차피 다 살은 몸이고 갈 사람이니까.
―황구하, 이미령, 권현옥, 『상주아리랑고개 사람들』, 27쪽
아이구, 그래 빙든 남편을 구루마에 싣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시아버지를 모시고 다니느냐.” 했어요. 구루마 끌고 오만 신랑은 “어디로 가여? 어디로 가여?” 이래요. 눈이 안 보이니까. 막 땀을 뻘뻘 흘리민서 구루마를 끌고 댕기만 어디 딴 데로 간다면서 욕을 해여. 아침도 안 먹고 새벽 네 시, 다섯 시에 그걸 끌고 가만 오후 세 시, 네 시 돼야 와요. 피 거르고 들어오면 나는 내대로 녹초가 되는 기라. 오죽하면 동네 사람이 “야야, 비 많이 오는 날 고만 거 잘못 밀어가이고 미끄러졌다 카고 휠체어하고 한테 저 물에다 잡아넣어.” 그런 말까지 하더라고. 그래도 사람이요 믿음이 있으니까 불쌍하더라고. 안 아프고 땡깡 직일 때는 그케 밉상인데 아파가이고 고생하니까 참 그렇더라고.
―같은 책, 55쪽
그렇게 가을과 겨울 지나 빙고 터에도 늦은 매화가 피고 마을은 한결 푸근했습니다. 상주미협에서 주관하는 공공미술프로젝트 「우리동네미술」 ‘아라리 아라리요 상주아리랑고개 길을 열다’ 사업으로 ‘빙고, 상주아리랑, 은어잡이하는 가족, 연자방아와 돌소(笑), 솟대, 빙고산 원두막 전망대, 글씨가 있는 얼음, 보부상이야기-비바람 부는 날, 마을지도-상주 아리랑고갯길을 걷다’ 등의 조형물과 ‘컬러풀 아리랑 골목길 미술관’과 ‘아리랑이야기’ 마을 벽화가 그동안의 작업과 사연을 곡진하게 상기시켜주었습니다. 특히 “어떤 작품이건 채우는 것보다 지우기를 잘해야 한다.”는 민경호 예술감독의 말씀은 큰 울림이었습니다.
구술집을 맡은 우리 ‘권이황 3인조’ 역시 마을 분들께 들은 이야기를 글로 옮겨 적으며 자료를 찾고 사진을 찍고 또 편집을 하며 고생을 좀 했습니다. 그러나 서로 채워주고 끌어주고 어깨동무하며 『상주아리랑고개 사람들』을 펴낼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사람을 배우고 마을을 배우고 나아가 상주를 배우고 역사를 배웠습니다. 때로는 눈물겹고 때로는 뭉클하고 때로는 웃음으로 마음을 나누었는데요. 그것은 우리 삶 자체가 이미 굽이굽이 아리랑고개라는 깨침과 깨달음이었습니다. 책을 펼치며 한 분 한 분 삶의 희로애락으로 한 굽이 한 굽이 넘어가는 삶의 이치와 지혜를 다시 새겨봅니다.(♣)
- 글쓴이 : 황구하
-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