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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효선_동해연안의 문화여행]울진 갯마을 풍락초(風落草)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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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연안의 생활문화
울진 갯마을 풍락초(風落草)를 아시나요
글. 남효선
해마다 ‘개구리가 눈을 뜬다’는 경칩(驚蟄)을 지나 ‘봄이 온다’는 춘분(春分)이 가까이 오면 울진 등 동해연안 갯마을 아낙들은 한 해 해사(海事) 준비로 분주합니다. 농촌 사람들이 춘분을 기점으로 한 해 농사를 준비하듯 동해 연안 해촌 갯마을 사람들에게도 이 무렵은 한 해의 살림살이를 장만하는 돌곽(石藿; 자연산 돌미역) 수확에 나서야하기 때문입니다. 울진지방 갯마을 사람들에게 돌미역(햇미역)은 어떤 바닷일 보다도 중요하고 각별한 일이자 한 해의 살림살이를 가늠하는 소중한 생업입니다.
지금도 울진지방에서는 “울진사람들 미역 없으면 다 굶었지.”라는 향언(鄕言)이 전승되듯 미역은 갯마을 사람들 뿐 아니라 울진사람들에게 매우 요긴한 환금 작물이었습니다. 그 해 돌미역 농사를 잘 지어야 식구들의 먹거리는 물론 자식농사를 위한 학자금 등 비용을 넉넉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울진지방의 미역농사는 농촌의 그것처럼 개인 사유물이 아닌 바다라는 총유자산의 몫입니다. 때문에 돌미역 채취와 수확은 갯마을 사람이면 누구나 수확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어촌계원에게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를 울진사람들은 ‘곽암권(藿岩權)’이라고 지칭합니다. ‘곽암(藿岩)’은 미역이 자라는 바다 속 바위군락을 뜻합니다. 이를 울진사람들은 ‘짬’ 또는 ‘미역방우(미역바위)’라고도 부릅니다. 말하자면 미역의 생산, 수확 권리를 뜻하는 곽암권은 바로 해당 짬의 관리권을 부여받은 어촌계원이 갖는 고유한 권리입니다.
울진 연안 갯마을 사람들에게 철마다 처녀 머릿결처럼 풋풋하고 치렁치렁한 햇미역을 선사하는 짬은 목숨만큼 소중한 생명밭입니다. 울진사람들은 자식을 키우고 가계를 일으켜주는 짬에 각별한 의례체계를 갖춰왔습니다. 늦가을이면 어촌계원 모두가 바다 속 짬으로 들어가 끌개와 닦개로 정성스레 미역바위를 닦았습니다. 이를 ‘기세닦기’라고 합니다. 짬을 깨끗하게 갈무리해야 한 해 미역 풍년이 들기 때문입니다. 조상대대로 이어온 생태어로의 구체물입니다.
미역이 포자를 뿌리내리기 전 동짓달 달 밝은 밤에 갯마을 사람들은 마을에서 아이를 쑥쑥 잘 낳고 건강하게 키운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바다 속 짬으로 내보내 고사를 지냈습니다. 이를 울진사람들은 ’짬고사‘라 부릅니다. 고지 바가지에 정성스레 담근 막걸리를 가득 채우고 노오란 좁쌀을 섞어 정갈한 마음으로 미역바위에 부으며 한 해 미역농사 풍년을 기원했습니다. 노오란 좁쌀을 붓는 까닭은 미역바위에 햇미역이 좁쌀처럼 다닥다닥 야물게 촘촘하게 뿌리를 내리라는 간절한 소망 때문입니다.
‘풍락초’는 미역 수확철에 앞서 파도에 떼밀려 ‘불(백사장을 이르는 울진지방 방언)’가로 밀려오는 돌미역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울진연안 갯마을 아낙들과 나이 든 어른들은 갯바위를 후려치는 파도가 일렁거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까꾸리’를 들고 마을 앞 바다로 나갑니다. 허옇게 배를 뒤집으며 갯바위를 부수듯 달려오는 파도 속에서 갯마을 아낙들은 제 키보다 열 배는 길어 보이는 긴 대나무 까꾸리를 들고 연신 파도에 떼밀려 뭍으로 달려오는 돌미역을 건져 올렸습니다. 한 올의 돌미역도 허사로 보내지 않고 소중하게 갈무리해 살림에 보태기 위함입니다.
파도에 떼밀려오는 미역을 건지는 일을 울진 갯마을 사람들은 ‘풍락초 건진다’고 합니다. 풍락초를 건져 올리는 도구인 까꾸리는 긴 대나무 장대에 흡사 닻처럼 생긴 소나무 가지 뭉치를 잘라 단단히 동여맨 형태입니다. 파도에 밀려오는 돌미역 올을 건져내기에 안성맞춤이지요.
이렇게 한 올 한 올 파도 속에서 건져 올린 풍락초는 한 달 내내 태백준령을 넘어 동해로 내닫는 바람을 받아 질 좋은 ‘울진 돌미역’으로 변신해 북면 원당말래를 넘어 넢재를 지나 멀리 봉화 소천장으로 유통되었습니다. 울진 연안에서 태백준령을 넘어 봉화, 영주로 이어지는 산길을 울진사람들은 ‘십이령 바지게길’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은 울진산 토염(土鹽)과 자연산 돌미역이 주요 유통물산이라는 점에서 ‘소금과 미역의 길’인 셈이지요. 소천 배나들장에 도착한 울진산 돌미역은 평생 바다 구경은 한 번도 하지 못한 안동과 영주 등 영남내륙의 어느 민가에서 튼실한 아이를 출산한 산모의 산후조리에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이렇듯 돌미역은 울진연안 갯마을 사람들에게는 자식을 키우고 가계를 일으키는 생명초이자, 영남내륙의 안동, 봉화, 영주지역에서는 새 생명을 키우는 생명초였습니다.
삼월 중순에서 사월 초순에 이르기까지 행여 동해연안 7번 국도를 따라 울진지방을 지나다가 보면 초로의 아낙들이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갯바위를 후려치며 달려오는 파도에 맞서 긴 까꾸리 장대를 들고 미역을 건져 올리는 모습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한 올의 돌미역 한 조각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건사해 뭇 사람들의 새 생명을 위한 밥상에 올리는 울진아낙들의 생명을 향한 곡진한 몸짓입니다.
이렇게 한올 한올 건져 올린 싱싱하고 달큰한 돌미역은 하루 종일 파도와 맞서며 해사(海事)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돌아온 지아비와 아이들의 밥상에 올라 식구들의 주린 먹성을 달큰한 맛으로 달래 줄 것입니다. 그렇다고 햇미역철 파도에 떼밀려오는 돌미역을 아무나 함부로 건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갯마을의 주민 중 어촌계원이나 그 마을의 어촌계원이 아닌 가구의 사람들만 건질 수 있습니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건질 수 없는 것이지요.
곽암권이 해당 마을의 어촌계원들만이 갖는 고유 권한이지만, 햇미역철, 파도에 떼밀려 오는 풍락초를 어촌계원이 아닌 동리의 이웃들이 건질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은 울진 등 동해연안 갯마을 사람들의 더불어 함께 사는 모둠살이의 소중한 가치인 셈입니다.
- 글쓴이 : 남효선
-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안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공부하였다. 1989년 문학사상의 시 부문에서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였다. 한국작가회의, 경북작가회의, 안동참꽃문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둘게삼』이 있다. 현재 시민사회신문의 전국본부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