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컬처라인_마을이 있는 풍경]산수유와 마늘밭이 있는 산촌마을 숲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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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을 가다
산수유와 마늘밭이 있는 산촌마을 숲실
글 이미홍
말랐던 대지에 물기가 차오르고 나뭇가지에 새잎이 돋아나면 마음은 어느새 봄을 찾아 산으로 들로 걸음을 재촉하기 바쁘다. 따스한 봄바람에 꽃망울을 터뜨리다 찬 기운에 놀란 매화꽃이 담장 안에서 서성거리는 그때쯤 매화와 함께 봄소식을 먼저 전해주는 꽃이 있다. 매화와 더불어 봄의 전령사로 불리는 노란 산수유꽃이다. 누구는 구례 산수유가 좋다 하고 누구는 하동의 산수유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 위쪽 동네에 사는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우리에겐 의성 사곡의 산수유도 빼놓을 수 없다. 그전에는 저 아래 남쪽마을보다 한참 더 있어야 피겠거니 했지만 이즈음 봄은 어디에서나 비슷하게 오는 데다 때마침 발걸음을 서두른 봄바람 덕인지 여기저기 산수유 꽃맞이 행사 날짜도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래서 돌담 사이로 봄바람이 스며드는 어느 봄날, 간밤에 분 봄바람이 산수유를 흔들어 깨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의성 산수유마을로 갔다.
의성군청이 있는 읍내에서 사곡면 하고도 화전리로 들어서는 길, 언제부터인가 길가 가로수에 노란 빛깔들이 언뜻언뜻 스치듯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데 산수유보다도 먼저 내 눈길을 사로잡는 건 도로변에 펼쳐진 초록의 물결이다. 매운 땅 속 겨울을 잘도 이겨내고 싹을 내민 지가 한참인 듯 어느새 봄마중을 끝내고 초록빛으로 곱게 단장을 마친 초록의 마늘밭이다. 마늘의 고장 의성 땅이라는 것을 실감케 하는 마늘밭이 의성읍에서 산수유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인 사곡면 신리리에서부터 화전리로 이어지며 온 들에 가득하다. 그러고 보니 사곡에서 산수유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사곡마늘이라고 들은 기억이 난다. 의성 마늘 중에서도 사곡면 일대의 마늘은 품질이 좋기로 유명한데 사곡면은 의성에서도 마늘의 최대 생산지이기도 하다. 화산 분화구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는 금성산에서 분출된 화산재를 품은 토양과 한지형 기후가 마늘 재배에 최적이어서 사곡면 일대에서 생산되는 마늘에는 벌레가 없고 향기와 매운 맛이 강하고 즙이 많아 옛날부터 사곡 마늘을 높이 쳐준다고 한다. 신리리에서 화전리로 넘어가는 길목의 너른 들인 새들에 차를 세우고 길 안으로 걸어 들어가 초록의 마늘밭이 끝없이 펼쳐진 들녘을 바라보았다.
사곡면 신리리에서 화전리로 가는 길목 마늘밭
신리리에서 화전리로 길게 이어지는 마늘밭의 초록 물결이 남실대는 들을 지나 차를 타고 들어가니 화전3리 산수유마을 표지석이 보이고 어느새 개울과 밭둑 너머로 산수유 노란 꽃빛이 가득하다. 한 구비 돌아가니 건너편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며 군락을 이루고 있는 산수유 숲이 펼쳐진다. 노랗게 물든 들녘과 산골짜기의 산수유는 산골소녀를 닮은 듯 수줍은가 하면 수더분한 시골아낙의 인심처럼 여기저기 스스럼없이 피어 있기도 하다. 마을로 통하는 안길의 늙은 산수유나무도 봄을 잊지 않고 어김없이 꽃을 피웠다.
산수유 노란 꽃과 초록의 마늘잎이 더없이 잘 어울린다. 마늘밭의 초록이 노란 산수유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주기도 하고 때로 산수유가 산쪽으로 멀찌감치 물러나 초록의 마늘밭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기도 하며 의성 사곡 산수유마을만이 가지는 독특한 풍광을 만들어낸다. 마늘밭이 없었어도 산수유 노란 빛이 이렇게 선명하게 와 닿았을까 싶다. 마늘밭 사이로 난 밭둑길을 따라 가거나 개울을 건너거나 골짜기 길을 따라 올라가거나 사곡면 화전리의 길목에는 마늘밭이 있고 그리고 그 길 어디쯤에는 산수유가 있다.
사곡면에서도 화전리는 예부터 산수유가 유명했다고 한다. 화전리 일대에는 조선시대부터 자생한 200~300년생 산수유나무 약3만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며 봄이면 노란 꽃물결의 장관을 연출한다. 오래전부터 자생한 수령이 많은 나무들과 함께 들녘과 산자락에는 심은 지 몇 십 년 된 나무부터 하늘로 가지를 뻗고 올라가는 젊은 나무들까지 같이 어우러지며 샛노란 빛을 보태고 있다. 손이 모자라 수확하지 못한 지난 가을의 붉은 산수유 열매를 아직도 달고 있는 나무들도 계절을 비껴갈 수 없다는 듯 붉은 열매를 단 채로 노란 꽃잎을 내민다. 지난해는 지난 해 대로 두고 또 새로운 열매를 맺기 위해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처음 산수유마을이 조성될 무렵에는 전답의 흙이 폭우에 쓸려 내려가는 것도 막을 겸 논두렁 밭두렁에 산수유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땅이 모자라는 산촌에서 약재로 채취해 팔 요량으로 집집마다 산수유를 심었고, 오랜 세월이 흘러 산수유나무가 자생하면서 논두렁 밭두렁은 물론이고 무리를 지어 산자락에 자리를 잡으면서 오늘날 ‘의성 산수유마을 꽃맞이행사’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흉년을 모르고 풍년이 계속되는 화전1리 안전풍마을 저수지
의성읍내에서 사곡면 신리리를 거쳐 화전리로 들어가면서 처음 만나는 산수유마을이 화전3리다. 전풍(全豊)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선조 13년(1580) 통정대부 호조참의를 지낸 노덕래가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산수유가 제일 먼저 심겨진 마을로 산골에서 먹고 살기 힘든 동네사람들에게 풍병에 좋은 산수유를 심도록 하여 약재로 내다팔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의성 산수유마을 꽃맞이행사’가 열리는 일대는 화전3리 전풍마을과 2리 숲실마을이 만나는 지점이다. 화전교회가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화전교회에서 도로를 따라 위쪽으로 쭉 올라가면 화전(禾全)1리라는 마을사람들의 말에 노란 꽃무리가 보이는 왼쪽 길을 잠시 놓아두고 길을 따라 내처 올라가 보았다. 길모퉁이를 돌아가자 얼마 안 있어 화전1리 안전풍이라 새겨진 표지석이 나온다. 표지석을 왼쪽으로 끼고 안길로 돌아드니 집들이 보인다. 가뭄에도 흉년을 모르고 살았다는 살기 좋은 마을 안전풍마을이다.
화전리(禾全里)는 16세기 중엽 김치화와 노덕래가 개척한 마을로 1,2,3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화전(禾全)1리는 거리전풍마을 위에 있다고 하여 상전(上全), 혹은 안전풍(安全豊)이라고도 하며 16세기 김치화가 개척한 곳으로 의성 김씨 집성촌이다. 김해 김씨와 의성 김씨, 밀양 박씨들이 함께 개척하였다고 전한다. 마을이름에 화(禾)자를 딴 것은 이곳에 못골못, 점락골못, 잘기미못 등 임진왜란 때 팠다는 못이 많아 물이 풍부하여 해마다 벼농사가 잘 되고 풍년이 들어 볍씨 종자를 외지에 나누어 준 데서 비롯되었다. 모든 종류의 농작물이 풍작이 된다고 전풍, 흉년을 모르고 풍년이 계속되는 골짜기 안쪽 마을이라 안전풍이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전풍, 안전풍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함께 지명유래를 찾아보지 않았으면 마을 이름 화전리가 꽃 화(花)자가 아니라 벼, 곡식을 이를 때의 화(禾)라는 사실을 모를 뻔 했다. 안전풍마을을 보지 않았더라면 산수유꽃이 많아서 꽃 화(花)자 화전리인 줄 알고 지날 뻔 한 것이다.
마을주민 중 새로 들어온 두 세집을 빼고는 지금도 의성 김씨들이 대부분이라고 화전1리 경로당에서 만난 어르신이 확인을 해 주신다. 오래된 첨탑이 있는 상전교회는 옛 예배당 자리에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무렵 마을사람들이 같이 지었다고 한다. 마을 안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마을을 감싸고 있는 비봉산 줄기 아래 저수지가 있어 옛날부터 물 걱정 없이 살아 안전풍이라고 강조를 하신다. 마을 뒷산 아래 자연 형태의 못이 있던 것을 90년대에 저수지 제방공사를 해서 불여튼튼 마을에 물 걱정이 없다고 한다. 교회 옆으로 이어진 외길을 따라 올라가니 안전풍마을을 내려다보는 곳에 저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른 적이 없다는 저수지 아래로 마을을 따라 길게 물길이 나 있어 흉년을 모르고 살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 것 같았다. 골짜기 너머 전답에 물을 대어 그전에는 논농사를 주로 지었고 지금은 과수원과 밭농사를 많이 짓는다는 화전1리에는 개울가 밭둑에 오래된 산수유 서너 그루가 노란 가지를 드리우고 있을 뿐, 사과나무가 많고 산수유나무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길을 되짚어 내려와 화전교회 앞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산수유는 화전3리 하고 화전2리에 많다고 제대로 된 산수유를 보려면 숲실마을까지 길 따라 올라가야 한다고 일러준다.
화전교회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 골짜기를 따라 마을 위쪽으로 걸어 올라가며 이 골 저 골 노오란 빛으로 물들이며 어우러져 있는 산수유 군락들을 만날 수 있었다. 화전3리에서부터 이어지는 산수유 마을길이지만 전풍마을에서 화전2리 숲실로 들어가는 길이야말로 산수유를 제대로 만날 수 있는 길이다. 화곡지가 있는 숲실마을 끝까지 걸어보고서야 비로소 왜 이곳이 산수유마을인가를 알 수 있다.
산수유를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남들 다 가는 쉬운 길만 기웃거리거나 여기 한 발, 저기 한 발, 잠깐 발을 들였다 마는 식이 아니라 큰길에서 벗어나 때로 개울도 건너고 밭둑길도 넘나들고 낯선 길섶을 따라 들어가 보기도 하며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한다. 노란 꽃무더기만 보고 가다가 보면 어느새 들 한가운데여서 농부들의 수고가 묻어나는 파릇파릇한 마늘들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도록 저만치로 길을 돌아 나가야 할 때도 있다.
숲실로 가는 길목의 골짜기
큰길가에서 보이는 꽃길을 따라 얼마쯤 걸으며 마을 구경을 하다가 산수유 꽃구경을 온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밭둑길을 지나 개울가를 슬쩍 벗어나 산 아래 골짜기 안으로 내처 들어갔다. 슬쩍 골 안쪽으로 한 걸음 더 걸어들어 갔을 뿐인데 산골짝 안 거기에는 또 다른 노란 빛깔들이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져 한 구비를 돌아들 때마다 새로운 노란 골짜기가 나타났다. 오래된 산수유나무들이 이 골짝에도 저 골짝에도 가득한데 고개 너머 마을이라도 있었던 듯 길가에 나그네가 목을 축이던 샘터의 흔적이 남아 있고 길게 이어진 골짜기 길을 따라 오르노라니 끝도 없이 산수유나무들이 펼쳐진다. 몇 백 년은 족히 되었을 고목부터 땅에 뿌리를 제대로 내리고 가지를 한껏 뻗어나가고 있는 짙은 노랑을 단 장년의 든든한 나무들과 꽃잎마저 여린 노란빛인 푸릇푸릇한 젊은 나무들까지 온 골에 지천이다.
숲실 골짜기 안
새소리, 다람쥐 기척만 남은 깊은 산속 골짜기 안쪽에 사람 손이 닿지 못해 붉은 열매들을 매단 산수유들이 홀로 새 봄꽃을 피우고 있다. 제 몸의 수분을 모두 빼앗기고 삐쩍 메말라 쪼글해진 모습으로 매달려 꽃과 함께 이 봄을 맞고 있다. 햇살에 투명하게 비치는 빨간 산수유가 아까워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한참을 하릴없이 산수유를 땄다. 이로 씨를 꺼낼 수 있으려나 시도해봤지만 바짝 마른 터라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한 종지라도 깔 수 있으면 차 한 잔이나 마실 수 있으려나 하고 혼자 헛꿈을 꾸며 한 움큼을 기어코 챙겨 넣었다. 지난 열매를 매단 나무들은 아무래도 붉은 빛이 남아있어 꽃잎의 노란 빛깔에도 배어나는 무게가 다르다. 열매를 따서 온통 노랗기만 한 나무들도 있어 같은 노랑이라도 가볍고 산뜻한 노랑이 있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노란 빛깔들이 있다. 그것들이 어울려 구름이 가리는 대로 햇빛이 비추었다가 숨는 대로 제 빛깔을 감추었다 드러내었다 춤을 춘다. 봄이 되어도 지천으로 매달린 빨간 산수유 열매들이 덧없어 서글프다.
봄 산수유꽃 사진을 찍기 위해 출사를 나왔던 사진가 한 분이 카메라를 메고 골짜기 안으로 들어와 한참을 머물다 되돌아나가고도 한참을 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도 가도 산수유 꽃길이 끊어지지 않고 꼬리를 물고 쉼 없이 계속 이어졌다. 한 구비만 더 하면서 이 쪽 저 쪽 산자락에 지천인 산수유꽃들을 쳐다보며 한참을 올라가다가 눈앞에 보이는 산수유와 깊어진 산 말고는 인적 하나 없는 골짜기 안 어디쯤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더 너머까지 가보고 싶었지만 망설이다 발길을 돌려 나왔다. 오래된 산수유 고목들과 샘터인 듯 보이던 흔적이 있던 그 고갯길 너머 어디에 꼭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을 것만 같았던 아쉬움이 남아 있는 깊은 산골짝 산수유 핀 그 길이 오래오래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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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실 산수유마을 표지석 |
숲실마을 표지석 |
화전2리 마을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는 길은 온통 산수유 천지였다. 산수유 꽃무더기를 따라 개울가로,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다 보면 어느새 숲실마을이다. 숲실은 300여 년 전 조씨, 최씨가 정착하며 개척된 마을로 사방이 산으로 쌓여 있고 다래와 머루 넝쿨이 우거져 넓은 숲을 이루고 있던 산골이라 하여 숲실, 화곡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감나무가 많이 심어져 사곡감(柿)의 원산지로 사곡감을 ‘수시’ 또는 숲실종이라 하는 것도 마을이름 숲실에서 딴 것이다. 지금은 사곡감의 생산이 많이 줄어들고 있다니 안타깝다.
평지가 드문 산간마을을 개척하고 전풍마을에 이어 산골짜기를 따라 한약재로 쓰이는 산수유를 집집마다 심어 생업에 도움이 되도록 한 이래로 산수유가 숲실골, 갱변들, 세평들 등 숲실골들로 점점이 퍼져 나가 지금의 숲실을 만들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사람이 심은 것도 있고 세월이 흐르면서 산자락으로 번져 자생해온 200~300년 된 산수유나무들도 지천이니 사람과 자연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숲실의 유래를 적은 정자를 지나니 올 정월 대보름에 친 것으로 보이는 금줄이 처져 있고 오른쪽 산 아래 ‘숲실’ 이라는 동그마한 작은 표지석이 보인다. 그리고 표지석 바로 옆 개울 건너에 할배바위 할매바위가 소담하게 서로 기대어 있다. 자식이 없던 부부가 이 할배 할매 바위에 치성을 드려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 뒤로 마을 사람들이 혼인을 할 때면 이 바위에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원을 드리고,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면 제를 올리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도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소박한 그 모습만큼이나 친근한 정이 느껴지는 숲실을 닮은 바위 한 쌍이다.
할배 할매 바위가 있는 풍경
할배바위와 할매바위가 있는 지점에서 마을회관 앞을 지나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숲실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와 화곡지로 가는 길, 개울가 늙은 산수유나무가 붉은 열매를 다 떨구지 못하고 매달고 있는 것을 보고 시골집을 찾은 김에 산수유 꽃구경을 나선 듯 보이는 아주머니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어릴 적 산수유 씨 발라내던 이야기를 한다.
산수유는 봄이면 노란 꽃으로 한 번 피고 가을이면 나무마다 빨간 열매들을 매달고 빨간 꽃을 피워낸다. 서리가 내리고 난 후 잎이 다 떨어지고 가지에 산수유 열매만 알알이 남았을 때 그 빨간 산수유를 따서 씨를 발라낸 다음 약재로 쓰는 것이다.
“우리 클 때 산수유 참 많이도 깠지. 지금은 씨 빼는 기계가 나왔지만 그때는 일일이 사람 손으로 했어. 손으로 까면 손톱 밑이 아파서 이빨로 씨를 빼는데 산수유 씨 빼는 철이면 동네 처녀들 이가 빨갛고 누렇고 그래. 하도 산수유 씨를 이로 빼니까 이가 흔들리고 성할 날이 없었어. 그러면 엄마들이 산수유 판 돈 모아두었다가 시집갈 때 금이빨 해준다고 그랬어. 우리 어매도 나보고 시집갈 때 금이빨 해준다고 맨날 그랬지.”
길이 갈라져 그 친정어머니가 아주머니 시집갈 때 정말로 금니를 해주었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그 시절 늦은 가을이나 추운 겨울날 방안에서 화롯불 끼고 둘러앉아 산수유 씨를 발라냈을 그 어매와 처자들이 살았던 그 시절에는 따지 않고 나무에 매달린 채로 겨울을 나는 산수유를 찾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산수유는 산이 깊고 골짜기 따라 전답이 많지 않았던 산간마을 숲실에서 살림에 큰 보탬이 되는 소득원이었던 까닭이다. 이제는 씨를 빼는 기계도 나왔고 꽃맞이행사도 해서 마을을 찾는 사람들에게 산수유 차도 팔고 약재로도 팔고 산수유 고추장도 팔 수 있지만 그것도 일단 산수유를 따는 일부터 사람의 손이 미쳐야 되는 일, 오래된 산수유 나무들만큼이나 노쇠해진 주민들로서는 들의 밭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한 허리가 휘고 말 일이다. 산수유만 잘 가꾸어도 아들 딸 공부시키고 먹고 살기에 지장이 없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옛 일, 그러니 그저 봄 되면 여느 사람들 같이 노란 산수유 꽃구경이나 할 밖에 수가 없다.
꽃구경을 온 사람들은 온 들이며 개울이며 산자락을 넘나들다 못해 마을 담장 너머까지 기웃거리는데 고추를 심기 위해 밭을 가는 할아버지도 마늘밭에 호미 들고 앉은 이웃 할머니도 바깥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은 그야말로 남의 일이라는 듯 서두르는 법 없이 느긋하게 할 일을 하고 계시다. 그 모습이 그대로 숲실 들녘 풍경 속에 녹아들어 있다.
마을의 집들이 저 아래로 보인다 싶은 즈음에 전망대로 가는 언덕길과 화곡지로 가는 길이 서로 엇갈려 기다리고 있다. 산수유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보고 싶은 욕심에 우선 전망대부터 올랐다. 멀리 금성산이 보이고 그 아래 양쪽 산허리를 띠처럼 두르고 마을이 들어앉아 있는 형국이었다. 사곡면 일대가 생긴 모양이 긴 골짜기가 되어, ‘사실’, 또는 ‘새실’, ‘사곡’, 이라 하여 조선시대에 지명이 사곡면이 되었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 사곡면은 남대천의 상류가 형성한 좁은 곡지가 동서로 뻗어 있는데 그 정점이 화전리 숲실이 아닌가 한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숲실은 긴 골짜기 안 굽이굽이 휘었다 펴지는 언저리에 이르러 마을의 집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고 초록빛이 돋아오는 산자락에 산수유가 길다랗게 노란 봄빛을 더하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산수유마을 숲실
전망대에서 고개 넘어 난 좁은 길을 따라 반대편으로 돌아 내려가면 사곡면소재지인 양지리로 이어진다. 사곡면은 79번 국도와 912번 지방도를 통해 이어지는데 79번 국도는 사곡면을 거쳐 춘산면, 가음면과 연결되어 있다. 산수유마을을 가는 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길은 의성읍 쪽에서 912번 지방도를 따라 가다 중간에 신감리 삼거리 갈림길에서 오상리 마을회관을 지나 79번 국도를 타고 신리리 방향으로 길을 잡아 화전리로 통하는 길이다. 전풍마을인 화전3리부터 화전2리 숲실까지 산수유꽃을 길게 오래 볼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신리리 쪽으로 방향을 틀지 않고 912번 지방도를 따라 사곡면 양지리 소재지까지 곧장 갈 수도 있는데 이 길이 바로 전망대가 있는 고개를 넘어 산수유마을로 가는 길이다. 사곡우체국이 있는 곳에서 마주보이는 음지리 마을 쪽으로 건너가서 임도를 거슬러 올라 재를 넘으면 화전리 숲실이다. ‘노오란 꿈마을’이라는 안내판과 함께 고개마루 전망대에서 산수유를 노래한 시인의 시를 만나기도 하고, 생각지도 않은 순간 산수유를 만나는 즐거움이 있기도 한 길이지만 길이 좁고 가파른데다 커브길이 많아 운전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아직 군데군데 비포장길도 남아있다.
산수유가 피기 시작하는 무렵부터 꽃이 만개할 때까지 두세 번 숲실을 오가느라 사곡면소재지에서 음지리 쪽 길로도 오른 적이 있는데 고개를 넘으며 산수유마을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데다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 숨어있는 산수유꽃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고개를 넘어 전망대를 되돌아 내려가면 바로 화곡지로 가는 갈림길 입구라는 점에서 한번쯤 가볼 만한 가치가 있는 길이다.
화곡지로 가는 길가 수양버들
처음 갔을 때 화곡지는 아직 산수유꽃이 제대로 다 피지 않은 상태였다. 일주일쯤 있다가 다시 간 날 산수유가 핀 화곡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화곡지로 가는 길은 좁고 호젓하다. 화전3리부터 시작된 산수유 마을길이 숲실까지 골짜기를 따라 경사를 이루며 워낙 길게 이어져 있다 보니 제일 꼭대기 화곡지까지 가는 사람들은 가뭄에 콩 나듯이 드문드문 한 두 사람 보일 뿐이다. 마지막 한 구비를 돌아드는데 햇볕을 받은 연초록의 수양버들 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수양버들이 있으면 물이 가깝겠구나 하며 깊은 산속에 홀로 눈부신 수양버들을 한참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한 굽이를 돌아드니 한 걸음 앞에 화곡지가 있다.
화곡지
쌀쌀한 기운에 봄바람이 이는가 싶은데 저수지 안의 물이 찰랑거린다. 저수지를 돌아들어가는 건너편 노란 산수유 빛도 물결 따라 찰랑거린다. 척박한 산골마을에 전답도 적고 먹고 살 방도가 막막해 산수유를 심었다 하더니 그나마 이 화곡지가 있어 참 다행이었겠구나 싶다.
화곡지를 돌아 마을로 내려오는 길, 마을 아주머니들이 전을 펴고 있는 천막에 들렀다. 산수유를 신선이 먹는 열매라 하여 ‘선과’라 했다 한다. 찻길이 불편해 병원에 가는 게 쉽지 않았던 예전에는 화전리 사람들도 열이 나거나 배가 아프면 우선 급한 대로 산수유를 달여 마시곤 했다며 건네주는 따뜻한 산수유 차 한 잔을 얻어 마시고 산수유청을 살까 하다가 산수유를 달여 만들었다는 고추장을 샀다. 마늘이 나는 계절이었으면 마늘도 한 접 샀을 것이지만 아직 일러 ‘마늘이 나는 철에 다시 오마’ 하고 작은 고추장 단지를 안고 마을길을 천천히 되돌아 걸어 내려왔다.
참고문헌: ‘의성군지’ 의성군, ‘의성의 지명유래’ 의성군, ‘고향 경북’ 경북향토사연구회
- 글쓴이 : 컬처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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