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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커스

  • [안경애_영주 문화산책, 지역의 역사인물]순흥 초군청과 민속놀이
  • 컬처라인(cultureline@naver.com) 2018-09-21

 

 

영주 문화산책

 

 

순흥 초군청과 민속놀이

 

 

글. 안경애

 

 

 

▮순흥 초군청

쌀쌀하지만 오는 봄을 막을 수 없는 반가운 계절이 오면 영주 순흥에서는 초군청 민속문화제가 열린다. 한해의 풍요와 기원, 나눔이 시작되는 것이다. 영주순흥 초군청 민속문화제는 묵은 것을 털고 새것에 대한 희망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선대가 전해준 초군청의 의미를 되새겨 계승하고자 매해 개최되는 영주의 대표적인 민속행사이다. 

 

여기서 초군청(樵軍廳)이란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농군(상민)들의 자치기구로, 초군청의 초군은 글자 그대로 농가에서 땔나무를 하러 산에 다니는 나무꾼을 뜻한다. 초군청은 오래 전부터 순흥의 농민들이 스스로의 권익을 보호하고 향중사회의 질서회복을 위해 결성한 조직으로 농민들의 삶의 중심에서 활약해왔다. 지금은 비록 그 기능이 축소되고 기운이 쇠하여 민속의 이름으로 회자되거나 특별한 행사로 유희하고 있지만 때마다 꾸준히 다양한 형태로 현재와 만나 당시 조상들의 삶에 대한 태도를 이해해보는 시간을 시민들에게 선물해주고 있다. 

 

초군청이 언제 어떤 목적으로 조직화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문헌이나 기록은 없다. 다만 조선 말기쯤 조직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초군청에서는 성황제를 주제하고 농사일의 품삯을 조정하며, 풋굿(*음력 7월쯤에, 날을 잡아 술과 음식을 먹고 풍물을 치면서 하루를 즐겨 노는 일)과 읍내 줄다리기 등을 주도해 왔다고 알려진다. 해방이후 그 기능이 쇠퇴했지만 아직도 성황제 주제집단으로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초군청 민속놀이인 성하·성북 줄다리기, 초군청 농악과 초군청 재판놀이 등을 통해 그 맥을 잇고 있다. 

 

「영주.영풍향토지(여강출판사, 1987)」를 집필한 송지향(1918년~2004년, 향토사연구가)은 구전을 토대로 ‘순흥고을 토호들의 나무꾼들이 상전세력에 기대어 나무를 뺏는 등 온갖 횡포를 부리는 악폐를 근절시키고자 토호 김교림(金敎林)이 초군청을 설치하도록 조정에 건의, 조정에서는 이 기구를 인정하는 의미에서 순흥초군청인(順興樵軍廳印)을 만들어 직인처럼 사용하게 됐다’고 한다.

 또한 순흥의 성황제 주제집단의 변화과정을 연구한 이기태(고려사이버대 한국어학과) 교수는 ‘순흥지역 대지주이자 세도가 한 사람이 지역민의 사회적 경제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초군청을 조직화 하고 관인을 만들어 지역민의 결속을 유도하는 한편 성황제를 주제하는 집단으로의 성격을 갖게 함으로써 지역민의 위상을 상승시키는 통합장치였다’고 초군청을 설명하기도 했다.

 

당시 초군청의 위상은 어떠했을까? 김교림의 후손 김훈기(영동대 사회복지과)교수는 “초군청 좌상○○○라는 서명에 그 도장이 찍힌 문서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였고, 초군청 좌상(座上)의 직인은 순흥고을 안에서는 거의 순흥부사의 직인에 맞먹을 만한 효력이 인정되었으며 적어도 그들 세계에 있어서 초군청 좌상은 순흥부사와 대등한 위세를 행사할 수 있었다.” 한다. 

 

 초군청에서는 좌상 등 임원을 선출하고 초군(농군)의 행동억제, 민폐근절에 앞장서고 산림관리, 도벌방지, 난벌방지, 소백산 풀깎기, 길 보수 등 질서에 이바지하였으며 또 머슴들의 임금과 농사철의 임금을 결정하는 등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특히, 두레골 성황당 고사(주신 금성대군)를 주관 하는 등의 자치행정으로 고을의 안녕과 민초들의 권익을 보호 하는 일에 힘을 쏟아 마을주민들의 결속을 다지기도 했다. 

 

출처 : 이기태, 『읍치 성황제 주제집단의 변화와 제의 전통이 창출』, 민속원, 1997

 

 

 

 

 

 

▮초군청 성황제

성황제는 우리나라 전통 민속 중의 하나로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을 전후하여 마을을 지켜준다는 성황신(서낭신)께 드리는 대동제(大同祭)이다. 영주 순흥에도 18개 마을에 18개의 서낭당이 있어 예외 없이 두레풍습의 일환으로 성황제를 지내고 있는데, 그 중 순흥 초군청 성황제는 비봉산 본당제와 두레골 금성대군당제로 나누어 지낸다. 즉, 제의(祭儀) 대상이 두 곳이다.

 

음력 1월 13일 오전 7시(辰時)경에 순흥지역의 주산(主山)인 비봉산(飛鳳山)을 진혼신(鎭魂神)으로 삼은 본당(本堂)에 제사를 지내고, 이어 음력 1월 15일 오후 12시(子時)경에 두레골에서 충신이요 절의(節義)의 상징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신으로 모신 상당(上堂)에 다시 대동제를 지내는데, 이 때 제물은 다른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황소이며 제물로 바쳐진 그 희생(犧牲)을 양반(또는 어른)으로 의인화(擬人化)하여 드리는 것이 특이하다. 

 

 

금성대군을 주신으로 모시는 두레골 성황제는 단종 복위 거사를 도모하다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의 혈석(血石)에서 부터 유래된다. 

조선 후기 어느 때 순흥 고을에 사는 권씨 부인이 꿈을 꾸었는데 금성대군이 나타나 "내 피 뭍은 혈석이 죽동 냇물에 있으니 이를 찾아 거두어 달라."고 하면서 돌의 모양도 알려 주었다고 한다. 이튿날 마을 사람들이 죽동 냇가를 뒤졌더니 과연 그 돌이 발견되었고, 이 혈석을 가까운 죽동 서낭당에 안치하게 되었다. 그 후 순흥 사람들은 매년 정월보름날이면 정성을 모으고 제수를 마련하여 제사를 올렸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인 1930년 경 이 지역에 사는 이화라는 선비의 꿈에 또 금성대군이 나타나 “이 곳에 일본인들이 와서 오줌을 누고 침을 뱉고 욕하니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못된다. 나를 두레골로 옮겨 달라.”고 현몽한다. 그래서 금성대군의 혈석은 소백산 국망봉 바로 밑 두레골로 옮겨서 모시게 되었는데 이 때 이 일을 주관한 사람들이 바로 상민(常民) 자치기군인 순흥 초군청이었고, 이후 매년 정월 보름에 순흥 초군청 주도로 성대하고 특별한 두레골 성황제를 올리게 됐다. 

 

 

 

 

 

 

▮초군청 농악 

초군청 농악은 영주 소백산을 중심으로 전승되어 온 민속 풍물놀이로 독특한 두레농악과 산골지방의 농악이 가미되어 수 백 년을 이어 내려온 영남 북부지방의 대표적인 농악이다. 삼도 접경지역인 충청도와 강원도 그리고 경상도 세 지역의 놀이문화가 어우러진 농악으로 군사적 요충지로 전쟁놀이의 문화가 가미된 듯 투박하면서도 힘찬 경상도의 가락과 강원도의 소박함, 그리고 충청도의 세련된 가락이 골고루 섞여있다. 

 

 

초군청 농악은 일제 때 고 박임백 옹에서, 6.25 전쟁 이후에는 고 김순생 옹 등이 그 맥을 이어오다 지금의 정창순 선생에게 전수되었다. 본래 12마치의 36가락이 전승되어왔으나,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줄당기기 중단과 함께 풋굿이 사라지면서 초군청 농악도 그 전승력이 약화돼 9마치만 남아 전해져 왔다. 그러던 지난 2001년 영주 순흥 선비촌에서 개최된 제42회 전국민속예술축제가 잊었던 가락을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2008년 제49회 전국민속예술축제에는 기존가락에 구술 자료를 더해 선보인 자리에서 입상하는 등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현재는 잊혀져가는 순흥 초군청 농악을 보존하고 영주 순흥 지역의 역사와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고자 상쇠인 정창순 선생을 비롯한 40여 명의 회원들이 그 맥을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순흥 줄당기기 

농경사회의 전통문화 중 줄당기기는 세시풍속 가운데 으뜸으로 농민들의 대동단결과 친목 도모에 크게 기여했던 민속놀이였다. 정월대보름을 맞아 한해의 풍년과 무사를 기원하는 의미로서 과거 순흥이 흥주도호부이던 시절에는 부사 관할로 전 부민들이 동참하여 읍성(邑城)을 기준으로 위아래(上下)로 동네를 나눠 성하·성북대항 줄당기기를 펼쳤고, 조선 말기부터 일제 강점기 이후부터는 순흥 읍내를 중심으로 면민들이 동·서부로 나눠 행해졌다.

줄당기기를 위해 매년 햇 짚으로 줄을 만들고 암줄 쪽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하여 어느 해든 항상 숫줄 쪽에서 양보하는데, 이는 서로 경쟁이 아닌 화합과 단결을 통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아름다운 풍습이라고 할 수 있다.

 

 

 

 

  


▮초군청 재판놀이

‘초군청 재판놀이’는 순흥 지역에 전승되어 온 초군청 문헌과 구전을 토대로  당시의 재판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전통창작마당극이다. 초군들 안에서 일어난 민폐와 고발에 관한 이야기를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이야기로 각색해 2001년부터 영주지역 극단인 ‘극단영주(구 소백극예술단)’가 매년 선비촌 등에서 공연하고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영주시 도시재생구역인 후생시장 빨강인형극장 앞에서, 극장 앞마당을 순흥청사 동헌 무대로 설정하여 공연을 진행하였다. 

 

극은 순흥고을 원님이 등청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원님이 자리를 잡으면 초군 좌상과 육방이 고을 초군들과 함께 들어와 읍례한다. 원님은 상견례 후 “임금님께서 초군청인을 내린 것은 초군들이 자치적으로 민폐를 일삼는 고을 초군들을 잘 다스려 보라고 하는 것이다.” 라며 재판을 참관하는 것으로 극은 본격적인 해학을 펼쳐 보인다. 초군청 좌상은 진사댁 하인(꺽쇠)과 하인, 포졸들을 잡아와 초부들을 괴롭힌 악행을 묻고 죄가 밝혀짐에 따라 형틀에 묶어 태형을 가한다. 이 가운데 악행을 일삼은 자들은 관객석에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관객들이 호응하지 않는 반면 억울함을 당한 초부들 이야기에는 동조하며 큰 호응을 보인다. 초군청 재판놀이는 지역 배우들이 출연하는 만큼 친근한 사투리가 더해진 대사가 맛깔스럽게 들리고, 그 속에서 빚어내는 풍자와 크고 작은 역들의 익살이 보태져 공연을 관람하는 내내 박수와 웃음이 절로 터진다. 

 

장쇠 : 이 자슥 안 되겠구먼. 오늘 한번 니 죽어 바라.(몽둥이로 때린다)

 

돌쇠 : 오늘 벌건 대낮에 산송장 한번 치를까?(넘어진 칠복을 짓밟는다)

 

칠복 : 아이고, 아이고 나죽네!

 

말뚝이2 : 허허 목불인견이라. 눈뜨고 차마 못 볼세 (달려들며) 이러지들 마이소.

           벌건 대낮에 이게 먼 날 강도질이껴? 

 

머슴1 : 이 인간은 어디서 굴러먹다온 개뼉다구로?

 

말뚝이: 강제로 야바위시켜 나뭇짐 빼앗고, 그것도 부족해 사람을 패요.

 

머슴2 : 그러면 머 우리가 사기꾼이란 말이라? 듣자하이 부아가 상하네. 니 죽고 싶제?

        우리가 누군 줄 알고 까부는 거로 어이?

        우리가 바로 저 김진사 댁에 사는 장쇠, 돌쇠란 말이다.

        어디 함부로 나서노 나서길. 쌩판 모르는 놈이- 

 

말뚝이: 아이고 말세다. 집사가 뭐 그리 대단한 직책이라꼬 그 하인 놈들까지 날 뛰니 -

 

머슴1 : 봐라 글쎄. 이놈아가 내가 해 논 나뭇짐을 훔쳐서 달아나다가 걸리서

        이참에 버르장머리 고칠라꼬 안 그래나!

 

농군2 : 아니씨더. 이 나뭇짐은 분며이(분명히) 내꺼씨더 이리주소.

         나무 해논 모양을 봐도 이게 분명이 영락없는 내깨 맞니더.

 

머슴2 : 아이고, 요새, 저런 놈들이 많아서 솔바(귀찮아) 죽겠네.

         해 논 나 뭇짐에 이름이 적해 있는 것도 아니고 왜?

         남의 걸 지꺼라고 우기노. 내가 다시 손 쪼매 봐 줘야겠다. 온나! 

 

- 초군청재판놀이 대본(정갑균) 일부 - 

 

 

 

 

 

 

글쓴이 : 안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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