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효선_동해연안의 문화여행]이월 영등
• 남효선 2009-03-05

- 이월 영등 -

전통사회를 떠받쳐 온 힘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처음 낯 선 곳에서 자신들의 삶의 보따리를 풀고 그들의 터전인 마을을 가꾸기 시작했을 때 자연과 삶을 어떤 방식으로 체계화하고 구체화했을까.

사람들은 처음 마을을 가꾸면서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생태환경의 온갖 신비로움과 낯섬을 자신들의 세계관 속에 가지런하게 재 정돈했다. 이른바 마을을 지키는 신(神)들의 세계와 가정을 지키는 신(神)들의 질서가 그것이다.

전통사회에서 마을구성원들은 마을공동체의 강녕을 위해 자연생태계를 인간과 신의 세계로 재구성하고 엄격한 비의를 수행해 왔다. 사진은 울진 월송마을에서 정월보름 마을제사(동제)를 지내기 위해 서낭당 입구에 쳐 놓은 금줄 모습. 금줄이 둘러지면 이곳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신성공간으로 전화한다.

사람들은 마을의 주산에 마을 최고신인 산신을 모시고 마을의 어귀에 성황(城皇, 서낭당)을 세웠다. 또 마을을 화재나 수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마을 앞산에 '간물단지(소금단지)' 를 묻었다. 마을과 마을이 만나는 경계에는 숲을 가꾸어 '쑤(藪)' 를 조성하거나 '솟대' 나 '장승' 을 세워 외부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비보풍수(碑補風水)'를 적용시켰다.

이는 모두 모둠살이 구성원들이 꿈꾸어 온 우주관의 구체적인 실현물이자 모둠살이의 공간을 안정과 번영의 터전으로 가꾸려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정보화시대와 첨단과학이 세계질서를 장악하고 있는 현재에도 우리나라 곳곳의 농어촌 마을에는 과거보다는 덜 왕성하지만 여전히 이같은 전통문화체계는 그 구성원들의 인식 속에서, 또 일상 속에서 매우 구체적인 문화양상으로 남아있다.

바람신이 펼치는 축제

지난 2월 28일은 음력으로 이월 초하루이다. 이월 초하루는 전통사회, 특히 해촌에서는 '영등할미가 오는 날'이라 하여'설' 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 명절이다.

'영등' 은 '바람의 신' 이다. 바람은 해촌사람들에게는 생명을 버팀해주는 자연조건이다. 일년내내 바람의 성격에 따라 해촌사람들은 배를 띄우고 그물을 놓았으며 '짬(미역바위)' 을 관리해 왔다. 때문에 해촌사람들은 바람의 성격을 매우 정교하게 분류했다.

신마파람(남남동풍), 새마파람(남동풍), 칼바람(남서풍), 마파람(남풍), 샛바람(동풍), 높새바람(북동풍), 하늬바람(서북풍), 높하늬바람(북풍), 서마파람(서서남풍), 늦하늬바람(서풍) 따위가 그것이다.

이월 영등은 자신의 생존을 절대적으로 판가름하는 '바람' 을 정령화한 구체물이자 '바람 신' 을 모시는 의례이다.

울진지방에서 영등은 '영등할매' 로 구체화된다.

  "영등할매는 이월 초하루날 아침에 내려와서 이월 보름에 올라가니더. 이월 초하루날에 바람이 세게 불거나 진눈깨비가 내리거나 날이 궂으면 며눌애기를 데리고 오고 날이 좋으면 딸을 데리고 온다 하니더. 며눌애기를 데리고 와야 한 해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믿니더"

조상님들이 하던대로 칠십이 넘도록 바닷가마을을 지키며 자식을 키워 온 박철재(72, 덕천리 25번지)할아버지의 '영등신'에 대한 얘기이다.

  "이제 우리 마을에서도 영등지내는 집이 별로 없니더.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누가 요즘 옛날 하던거를 할라 하니껴. 그래도 우리 집은 지금까지 꼭 하니더. 엣날처럼 큰 시루에 시루떡은 하지못해도 꼭 오곡찰밥해놓고 자식들 잘돼고 농사잘 돼 달라고 빌지요"

영등 전 날에 해촌의 아낙들은 오곡으로 찰밥을 가득 짓고 지난 해 봄에 캐서 잘 말려놓은 묵나물과 콩나물로 나물국을 끓이고 큰 시루에 시루떡을 하느라 부산하다. 또 영등 전 날에 바다로 나가 잡은 고기 중에서 가장 크고 싱싱한 생선은 '영등할매가 타고 내려온다'고 믿는 '까꾸리' 에 걸어둔다.

이월 초하루 날 첫 시간에 미리 마련해 둔 오곡찰밥과 나물국과 시루떡과 생선을 차려 고사를 지낸다.

영등 전 날 해촌의 아낙들은 오곡찰밥과 나물국, 시루떡과 싱싱한 어물로 영등젯상을 장만하여 이월초하루날 첫 시간에 영등고사를 지내고 식구 수대로 소지를 올리며 가정의 안녕과 가족의 건강을 빌었다.

고사는 대개 안방 '도장(도방)' 앞에서 가주(家主)가 지낸다. 오곡찰밥 위에 식구 수대로 숟가락을 꼽고 술을 올린 뒤 가주는 식구 수대로 '소지(燒紙)' 를 올리며 가정의 안녕과 식구의 건강을 빌었다.

영등고사를 지낼 무렵이면 마을은 비의(秘儀)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등날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절대로 배를 띄우지 않으며 자그마한 집안 일도 하지 않는다. 고사가 끝나면 온 식구가 둘러앉아 오곡찰밥을 나눠먹는다.

  "갓 시집 온 새댁들은 영등날 저녘에 삽작문 붙잡고 울었니더 영등날 지나면 쌔가 빠지게 일하러 댕겨야 하니까"

집집마다 의례가 끝나면 마을은 엄숙을 깨트리고 왁자해진다. 마을축제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영등음식을 나누며 하루종일 마을은 놀이판을 벌이며 혼돈의 세계로 곤두박질친다.

  "예전에 갓 시집온 새댁들은 영등날 저녘에 싸리문짝 붙잡고 울었니더. 제발 영등할마이 하늘로 올라가지 말라꼬. 이 날이 지나면 다음 영등 때까지 ‘쌔(혀)’가 빠지도록 일해야 하니까네"

영등날이 지나면 해촌의 아낙들은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일상으로 들어간다. 그물을 깁어야 하고 바다일 틈틈이 보리밭을 매야하고 아이도 건사해야 하는 등 끝없는 노동의 연속이다.

때문에 영등은 한 해의 노동의 시작을 알리는 '노동축제'이자 '바람의 축제'이다.

올 이월 초 하루날에는 밤부터 진눈깨비가 내렸다. 영등할매가 ‘미운 며눌애기’를 데리고 내려왔기 때문이다.

  "올 농사 잘될것이더. 영등날 아침부터 진갈비(진눈깨비)가 내리고 했으이"

울진 덕천리 마분마을에서 시집 온 지 50년이 지나도록 영등고사를 한 해도 걸러지 않고 지내 온 주춘랑(69, 덕천리 25번지)할머니의 믿음이자 우주관이다.

글쓴이 : 남효선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안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공부하였다. 1989년 문학사상의 시 부문에서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였다. 한국작가회의, 경북작가회의, 안동참꽃문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둘게삼』이 있다. 현재 시민사회신문의 전국본부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