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임은혜_연극으로 만나는 세상]천진난만한 이들의 우정과 연대가 지속되길
- 임은혜
천진난만한 이들의 우정과 연대가 지속되길
- 2013국제환경연극프로젝트를 마치며
지난 해 가을 즈음, 깊은 산 속에서 전기도 없이 노루 토끼처럼 살고 있는 친구들의 집에서 멧돼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멧돼지 녀석이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농작물들을 파헤치고 복숭아나무를 들이 받아서 부러뜨리기까지 했단다. 어미 멧돼지와 새끼 멧돼지가 함께 다니는 모습도 보았고, 누구는 멧돼지의 잿빛 털이 투명하게 빛나는 것이 신비스럽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 즈음, 멧돼지들이 도시 한 복판에 나타나서 먹을 것을 찾는다는 뉴스가 종종 나왔다. 어느 지자체에서는 멧돼지들의 습격으로 인한 농가 피해를 줄이겠다면서 멧돼지의 꼬리를 잘라오는 사람들에게 상금을 준다는 기사도 읽었다. 멧돼지의 개체수의 증가 문제인가,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서식지의 파괴가 문제인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 아닌 동식물의 아픔을 느낄 수 있을까? 인간만이 아닌 생명 있는 존재들의 가치를 생각할까?
올해로 다섯 번째 열리는 국제 환경연극 프로젝트에서 멧돼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단 한 번도 멧돼지를 본 적은 없지만 멧돼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스무 마리의 아기 멧돼지 인형을 만들면서 인간들에게 모욕 받고 시련당하는 멧돼지들을 생각했다. 멧돼지들을 죽이지 않고 이들과 어떻게 공존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착한 농부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리고, 서식지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 떠돌아다니고 있는 멧돼지들을 유대감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는 현대인들과 연결하게 되었다. 해체된 공동체로 인해 파편화 되어있는 존재들, 유동하는 근대, 불확실한 미래, 불안하고 고독한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 거대 인형을 만들고 있는 Deborah Hunt
작년에 이어 올해도 데보라 헌트(Deborah Hunt)가 와서 함께 거주하면서 커다란 어미 멧돼지 인형을 만들었다. 푸에르토리코에 사는 데보라는 육십의 나이에 탈과 거대인형을 제작하면서 직접 공연도 하는 사랑스럽고 열정적인 배우이다. 그녀는 나에게 어미멧돼지와 아기 멧돼지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어떻게 멧돼지를 만들 것인가 생각을 나누었다. 매일 아침, 그녀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나와 공유했고 자기가 맡은 부분만이 아니라 공연 전체의 조화를 생각하며 작업의 전 과정을 두루 살피었다. 데보라는 자신이 거대 인형을 만드는 데 사용하던 재료가 한국에 없어서 대나무 살을 이용해서 뼈대를 만들어야 했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낫을 들고 대나무살을 쪼개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매력적이고 재밌는 재료를 알게 되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특히 낫에 반한 그녀는 재래시장에서 낫을 구입해 푸에르토리코로 가져갔다.
▲거대 고구마 인형 안에 설치된 작은 인형극장
거대한 어미 멧돼지 인형과 거대 고구마 인형 안에는 작은 인형극들이 공연될 수 있도록 인형극장을 설치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구멍 속으로 얼굴을 넣고 인형극을 보게 만들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인형극 배우 마르셀로(Marcelo Barrios)가 이끈 인형극 창작 워크숍에서 만든 두 개의 인형극이 어미 멧돼지 인형극장과 고구마 인형극장 안에서 이루어졌다. 청송 지역의 아줌마들로 구성된 인형극 모임 ‘사과나무 극단’은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 <닷 발 늘어져라>를, 청송 다문화가족 모임은 청송지역의 전설 <호랑부부 이야기>를 만들고 공연했다. 특히, 다문화 가족모임의 인형극은 엄마, 아빠, 아이들까지 참여하는 공연이라서 호응이 좋았다.
올해, 국제환경연극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지역주민을 위해 네 개의 워크숍을 준비했다. 탈춤 워크숍, 인형극 워크숍, 포이(저글링) 워크숍, 힙합-비보이 워크숍이다. 포이와 힙합 워크숍은 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평소, 학교와 학원 공부에 메여있던 아이들이 방학 동안에는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느껴보길 바랬다. 상업적인 방송 댄스를 흉내 내는 게 아니라 리듬감 있는 움직임 속에서 몸의 율동감과 상상력을 얻어가길 바랬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아이들은 평소 에 나무닭움직임연구소의 공연예술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방학을 해도 아이들은 여전히 학교와 학원 공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딱딱한 책상과 걸상처럼 굳어있는 아이들의 몸처럼 아이들의 머리도 영혼도 딱딱하게 굳어가지 않을까. 자유롭게 상상하고 삶을 풍요롭게 일구는 방법도 모르는 채, 주어진 제도와 질서에 그저 순응하며 살아갈 줄밖에 모르는 건 아닐까.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무용수들이 탈춤을 가르쳐줄 거라고 제안했지만 단지 두 개 면의 지역주민들만이 참여했다. 11월에 있는 청송사과축제 때 ‘사과도깨비탈 춤 경연대회’가 있는데 이 워크숍을 통해 사과 도깨비춤을 미리 만들고 준비하자는 취지였다. 7월 말에서 8월 초는 약간의 농한기라서 지역주민들이 많이 참여하길 바랬지만 청송의 8개 읍면 중에서 두 개의 면 주민들만 이 소중한 기회를 누리게 되었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 지역문화를 일구고 만들어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이해관계로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동일한 유대감을 형성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공동체적 가치관과 유대감도 사라졌다. 서로의 몸을 부대끼면서 동고동락하고 서로에게 환대하는 마을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내가 살던 대도시의 지하철 안과 거리에서 보았던 사람들처럼 표정 없는 얼굴, 화난 것 같은 얼굴들을 이곳 시골에서도 보게 된다. 뒤도 안돌아보고 바쁜 걸음으로 사과밭으로 고추밭으로 농약을 치러 가는 어르신들을 볼 때면 돌아가시는 날까지 농약 통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문화예술을 누릴 수 없는 삶은 얼마나 팍팍하고 지루한가.
옛날에는 농사도 마을 공동체가 함께 계획하고 힘을 모아서 했지만 지금은 각 개인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각자가 알아서 감당해야 하고, 각 개인이 알아서 품꾼을 사서 노동력을 해결해야한다. 더불어 하던 일이 사라지니 마을 사람들 간의 유대감도 없어지고, 막걸리 한 잔 걸치면서 노래하고 춤추던 여유도 사라졌다. 그 사라진 자리에 경쟁과 속도, 돈의 가치만이 들어차 있다.
해체되어가는 공동체 문화를 복원하는 데 보탬이 되길 바라면서 시작한 국제환경연극프로젝트가 어느덧 5년 째 지속되고 있다. 전문 예술가들만이 아닌, 예술가들로부터 공연예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쉽지 않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창작시간과 기술을 내 놓고 지역주민이나 청소년들과 공동체 작업을 일구는 경우가 생각처럼 흔치 않다. 자신의 예술적 가치를 시장이나 상업적인 논리에 두지 않고, 공동체의 우정과 환대에 두고자 했던 예술가들이 우리와 함께 이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해마다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청소년들은 이 고단한 창작과 훈련의 시간을 함께 견디는 명예로운 공동체로서, 뜨거운 유대감과 자부심을 얻고 있다. 환경연극 캠프 기간 동안 예술가들과 청소년, 아이들은 모두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우리네 공연 여정을 함께 하는 공동체로 살아내는 것이다.
다시, 퍼레이드 공연 ‘멧돼지 대이동’의 시나리오로 돌아와서 글을 맺으려 한다. 땅 투기업자들과 개발꾼들에 의해 삶터를 잃고 뿔뿔이 흩어졌던 멧돼지 가족이 재회를 한다. 어미 멧돼지는 있는 힘을 다해 아기 멧돼지들에게 마지막 젖을 먹이다가 숨을 거둔다. 어미 멧돼지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아기 멧돼지들에게 거대 고구마가 나타난다. 아기 멧돼지들은 거대 고구마를 따라 달린다.
대자연의 흐름에 온몸을 맡긴 채 대자연이 뿜어내는 생명력을 얻어내는 아기 멧돼지들처럼, 천진난만한 사람들의 우정과 연대가 우리의 환경연극 작업에서 생명력을 갖고 지속되기를 바란다.
- 글쓴이 : 임은혜
- 극작가, '나무닭움직임연구소'는 청송군 청송읍 송생리에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