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백소애_쑤세미의 골방에서 만화읽기]이희재 단편집 <<간판스타>>
- 쑤세미
이희재 단편집 <<간판스타>>
담장아래 핀 꽃, 누이 같고 아부지 같은 민들레
TV드라마 <투윅스>와 <주군의 태양>이 같은 시간대에 방송됐지요. 방송관계자들은 MBC드라마 <투윅스>가 시청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거라 예상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소현경 작가의 전작이 워낙 세대불문 히트를 쳤고(찬란한 유산, 내 딸 서영이) 스토리가 탄탄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SBS드라마 <주군의 태양>의 홍정은, 홍미란 작가의 작품은 인기는 많지만 폭넓은 시청자를 아우르는 스타일은 아니기 때문에(최고의 사랑, 빅) 마니아를 양산할 거라는 예상이 많았죠. 하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면서까지 스트레스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요즘 사회가 그렇죠. 자기 현실도 힘들어 죽겠는데 드라마까지 주인공이 내내 누명쓰고 힘들어하고 마지막에 가서야 반전이 나올법한 드라마를 보는 것이 힘겨운 거죠. 그러니 자연히 좀 더 가볍게 볼 수 있는 쪽으로 시선이 가게 마련인가 봅니다.
만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만화를 즐거운 오락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힘겨운 일상을 보여주는 ‘진지함’을 굳이 만화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드라마를 보거나 일상생활에서도 말이 안 되게 황당한 일이 일어나면 “이게 무슨 만화 같은 일이냐”라고들 하죠. 그만큼 사람들은 만화는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는 매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 가슴 먹먹해지는 수작을 한 번씩 만나게 되는데, 그런 작품들은 웬만한 문학작품보다 더 우리를 울리기도 합니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리얼리즘 작가 이희재의 작품을 보면 아마, 그럴 겁니다. 즐거움은 꼭 유쾌함을 동반하진 않습니다. 이 무던하고 진득하고 미련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만화를 보다보면 우리는 우리 삶의 진리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여운을 남기고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문화예술작품이 가지는 최대의 미덕 아닐까요. 웹툰이 컬러판에 길들여진 지금에 보면 촌스럽고 소박한 그림과 글이지만 <<간판스타>>는 지나간 시대의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보잘 것 없는 삶이란 없음을 알려줍니다. 그 시대의 진정성을 통해 바로 오늘을 볼 수 있습니다.
만화평론가 선정 해방 이후 좋은 우리 만화 1위에 빛나는 이희재의 <간판스타>는 1986년 발표됐습니다. 이후 1996년, 단편집이 <<간판스타>>를 이름으로, 표제작 <간판스타>를 비롯 <새벽길> <민들레> <김종팔 씨 가정 소사> <성질수난> <운수 좋은 날> <승부> 등 총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출간됩니다. 출판사 사정으로 한동안 절판되었던 이 책은 독자들의 문의와 성원 전화가 500통이나 걸려올 정도로 독자들이 기다렸던 작품이라고 합니다. <<간판스타>>는 변화의 바람이 부는 농촌과 산업화 속의 도시빈민들, 때론 비겁하나 정 많은 소시민들의 일상을 다룬 작품입니다. 작가는 지난한 세월 속 현대화라는 바람 속에 스러져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토끼꼬리만한 전답을 부쳐 겨우 연명하던 동촌리 이씨네 큰딸 경숙이가 추석을 맞아 금의환향합니다. 미국으로 운동화를 수출하는 회사에 다니는 누나가 자랑스러운 동생 경남이는 동네 아이들에게 운동화며 축구공을 자랑하기 바쁩니다. 논 두어 마지기 값을 갖고 내려온 경숙이를 맞이하는 동네는 시끌시끌합니다. 중학교 3학년도 마치지 못했던 경숙이가 6.25때 다쳤던 아버지의 다리도 고치고 집안을 일으켜 세웠으니 동네에서 효녀로 불릴 법도 합니다.
처녀가 다 된 친구들은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부추김에 일어난 경숙이는 멋들어지게 트롯트를 부르죠. 세련된 경숙이가 부러운 친구는 자신도 고향 촌구석을 뜨고 싶다고 도움을 청하기도 합니다. 동네를 들썩이게 한 경숙이가 떠나고 사람들은 모두들 효녀 경숙이를 동촌리 ‘간판스타’라 칭송하지요. 자신의 일터로 돌아온 동숙이가 손님들 앞에서 트롯트를 부릅니다. 동촌리 이경숙에서 술집 ‘동백섬’의 간판스타 진보라 양으로 돌아와서요.
이 씁쓸하고도 서글픈 이야기는 연탄가스로 자식을 잃은 환경미화원의 처절한 삶을 그린 <새벽길>, 노가다꾼 황씨를 통해 민들레처럼 질긴 이 땅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민들레>로 이어집니다. 아들 봉식이는 고주망태 아버지 황씨가 늘 부끄럽고 못마땅합니다. 친구들 앞에서조차 아버지가 아니라고 합니다. 황씨는 곤드레만드레 행색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애비가 부끄럽냐고 묻자 아들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합니다. 마누라 먼저 보내고 큰아들도 저 세상으로 가서 낙이 없다고, 그래서 저렇게 폐인처럼 살아간다고 동네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하지만 황씨는 공사현장에서 대패질을 하다가 통나무 틈바구니 속에서도 뿌리를 박고 질긴 생명을 이어가는 민들레에 감동하는 그런 소박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화사한 봄을 어느 누가 막겠냐고 홀로 껄껄거리는 인삽니다.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민들레를 짓밟던 야생 개 한마리가 어느 날 동네 아기를 물어갑니다. 혼이 빠진 사람들은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방범대원이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그때 황씨가 나섭니다. 술에 취해 동네를 휘젓던 그 화상 황씨가 말이죠. 두 눈 부릅뜨고 감히 니깟 짐승이 사람을 해코지 한단 말인가, 하고 말이죠. 금수 따위가 사람을 넘봤으니 근신을 못하게 요절을 내주겠다고 개와 맞짱을 뜹니다. 봉식이는 우연히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봅니다. 눈에 핏발을 세우고 개 허리를 끊어 삼킬 듯 힘을 쓰는 아버지의 모습을요. 아기는 무사하고 동네사람들은 ‘그 오작구가 사람구실 할 때가 있다.’고 웅성거립니다. *오작구 (문제아를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
개와 거친 싸움을 하고 다친 몸을 이끌고 항상 갔던 대폿집에 앉아 술 한 잔 하며 주인장에게 잔소리나 듣습니다.
‘이보, 참말 댁 같은 팔푼이도 없을 거요. 그놈의 4.19인지 목청 돋우다 다리몽둥이 부러졌담서 여차하면 나서기 일쑤니 어쩐단 말이오’ 하고 말이죠.
아들은 대폿집 담벼락에서 눈물을 훔칩니다.
황패한 시멘트 틈 사이에서 혹은 통나무 틈바구니 속에서 질긴 생명력으로 민들레는 꽃을 피웁니다. 시대의 불의에 맞서는 시민으로, 산업의 역군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험한 일을 하는 도시빈민과 가난한 농촌의 아들딸들은 오늘도 민들레처럼 질긴 생명으로 살아가지만 언제 바스러질지 모르는 연약한 풀포기일 뿐입니다.
- 글쓴이 : 백소애
- 강원도 태백 출생. 아이큐는 낮지만 머리가 좋다고 굳게 믿고 있음. 변덕이 심하고 우유부단하나 따뜻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조카들에게 헌신적이며 인간성 또한 좋다.....고 믿고 있다. 학생 때 교무실에서 밀대자루로 바닥 밀면서 은밀히 훔쳐본 생활기록부에는 ‘예의 바르나 산만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한참을 갸우뚱 하다가 담임이 수학선생님이었기에 그냥 이해하기로 함. 다소 후진 취향을 지니고 있으나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쓸데없는 걱정과 호기심이 많음. 같은 계획을 몇 년째 하고 있으며 역시나 올해도 다이어트와 앞머리 기르기에 도전할 생각이며 과메기에 없어서는 안 될 다시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 웹툰도 괜찮지만 만화책은 역시 종이책으로 보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날로그 건어물녀. 좋아하는 것은 무한도전, 오뎅으로 만든 떡볶이, 삼겹살에 매실소주, 비오는 날, 생활의 달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괴짜가족 류의 저질유머. 비 오는 날 무한도전 틀어놓고 배 깔고 누워 만화책 보면서 빈둥거리며 사는 것이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