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임은혜_연극으로 만나는 세상]거리와 마을에서 연극을 만나다
- 임은혜
삶의 환경으로서의 연극
2009 여름, 청송군 송생리 후평 마을에 홍콩, 베이징, 상해, 대만, 한국의 연극인 10명이 연극 캠프를 쳤다. 이들은 환경연극 국제 레지던스 사업의 일환인 ‘Trainers' Training Workshop1)'에 참여한 예술가들로, 나무닭움직임연구소 작업장에서 한 달 동안 공동체 생활과 더불어 연극 작업을 했다. 후평마을 한가운데 있는 나무닭움직임연구소 작업장은 마을 어디에서나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후평마을 사람들은 타국에서 온 배우들이 한 달 동안 무엇을 하며 생활했는지, 어떻게 연극 작업을 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배우들은 아침 7시30분에 아침 식사를 마치고, 9시부터 몸을 풀고, 소리와 몸 훈련을 한다. 오후에는 마을 곳곳에서 '물‘에 대한 1인극 공연을 했고 각국의 전통과 공동체 연극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해체되어가는 공동체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했다. 그리고 워크숍 교환을 통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연극 기술을 서로에게 전수했으며, 이 모든 과정을 통합하여 환경연극 ‘물’이라는 합동 작품을 만들어냈다.
▲ 동아시아 연극인들의 1인극, 송생리 후평마을에 있는 당산나무 앞.
이들이 생활공동체를 이루며 작업 했던 한 달 동안 ‘연극’은 후평마을을 이루는 또 하나의 환경이 되었다. 배우들의 훈련, 리허설, 공연 일체가 삶을 둘러싼 환경 속에 자연스럽게 놓여있었다.
당산나무 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며 노래하는 배우가 있다. 그 건너편에서 수레를 끌고 오시던 아주머니가 발길을 멈추시고 우연히 마주친 1인극을 바라보신다. 마당에서 세 살배기 손자를 돌보다가 공연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오시는 아저씨, 공원에서 전신주를 수리하다가 우연히 공연을 보게 되는 전기 수리공... 그들이 거리와 마을에서 경험했던 연극은 ‘보여주기’ 위해 기획된 공연이 아니었다. ‘보여주는 자’와 ‘보는 자’로 분리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동일한 삶터 이곳저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삶의 환경이었다.
동아시아 연극인들의 합작 '물
동아시아 배우들은 20일 동안의 워크숍과 1인극을 통합하여 합동공연을 만들었다. ‘연극’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모였지만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작업의 방식이 다른 10명의 예술가가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기까지 많은 갈등과 충돌이 있었지만 결국엔 ‘공연물’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 마지막 리허설을 마치자마자 안개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한다. 배우들은 공연의상과 소품을 다듬으며 비가 잦아들기를 기원한다. 마이크와 앰프에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비닐을 덮었다. 내레이션을 하고 기타를 연주하는 장소에도 천막을 세웠다.
공연 시작 30분 전,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지만, 배우들과 청송 아이들은 길놀이를 진행하기로 했다. 탈을 쓴 배우들이 타악기를 연주하며 길을 나선다. 장다리를 탄 청송 아이들이 그 뒤를 따른다. 마을 공동체와 함께 하는 공연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그들을 모시고 공연장으로 들어온다.
▲ 공연 전 행사로 길놀이를 하고, 오곡과 함께 소원담기를 하고 있다.
공연장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청송 아이들이 관객을 맞이한다. 관객들은 주로 송생리에 살고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고 아이들의 부모님과 형제, 이웃들이다. 아이들은 이들에게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을 안내한다. 빨간 종이 주머니를 나누어주고 오곡을 담아서 소원을 쓰게 한 후 정해진 장소에 놓는 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관객들이 편히 앉아서 보실 수 있도록 비료부대를 객석에 깔아드린다.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르고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겨루는 일이 없는 물과 같이, 공동체의 평안과 풍요를 염원하는 노력이 아이들의 손끝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신을 부르는 노래와 함께 공연이 시작된다. 베이징 배우가 중국의 전통 무가(巫歌)를 선창하고, 나머지 배우들이 깃발을 들고 신들을 부르는 몸짓을 한다. 공연은 인간의 탐욕에 의해 더럽혀진 물과 지구촌의 아픈 존재들을 위로하고, 죽어가는 존재들에게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인간과 자연의 협력을 소망하는 내용이었다.
▲ 대만의 민속춤과 관객들의 대동춤으로 공동체의 평화와 풍요를 기원하고 있다.
마을 분들은 비가 오는 데도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공연에 집중하셨다. 관객들이 소원을 담았던 오곡봉투를 태우자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른다. 배우들은 관객들을 모시고 연기 속으로 들어가 춤을 춘다. 대만에서 온 배우 쇼신(Showshine lee)이 안무한 이 민속춤은 마을 공동체의 건강과 풍요를 기원하는 춤이다. 사람들이 연기 속을 통과하면 그 해 병을 앓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춤이라고 한다. 하모니카 소리와 공(중국 징), 장구의 울림이 한 데 어우러져 춤추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발끝부터 머리까지 휘감아 돈다.
리차드 쉐크너2) 는 환경연극이란 ‘위장하지 않는 예술, 만든 사람과 관람자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적인 내면의 예술,’논평‘이나 ’비평‘할 수 없는 예술, 다시 말해 하나의 이벤트’라고 했다. 이벤트는 형식적인 연극이거나 축제, 하나의 의식일 수도 있으며, 스포츠 경기, 정치적 집회, 콘서트 등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 이벤트는 ‘허구(fiction)'가 아니며 ’바로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성‘이 강조된다. 즉, 환경연극에서 연극을 만든다는 행위는 곧 연기자들을 포함한 모든 공연 참석자들이 함께 들어가 살 하나의 ’환경‘을 창조하는 일과 일치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환경 안에서는 ’행위자‘와 ’보는자‘ 사이를 구별 짓는 무대와 객석과 같은 이분법적 공간구조가 없다. 관객과 배우마저도 하나의 생활공동체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고, 이런 현상은 삶의 연장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3)
어두운 극장이 아닌 마을과 거리에서, 삶의 환경이 곧 무대가 되는 환경연극은 어떻게 공연되어지는가. 공연에서의 시간, 공간마저도 삶의 실제와 같다. 가령 작품의 배경이 ‘물’이 있는 곳이면 극장에 ‘물’을 세팅해놓고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물’가에서 이루어진다. 작품의 시간이 해질녘부터 새벽까지라면 공연도 실제로 해질녘부터 새벽까지 진행되는 게 환경연극이다. 환경연극은 극장 안에서 조명의 변화를 줘가며 시간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게 아니라, 바다도 아닌데 음향과 세팅으로 효과를 주면서 물가인척 연기하지 않는다.
나무닭움직임연구소 작업장에서 공연한 ‘물’은 환경연극에서 있어서의 시간과 공간의 실제성을 실현하기엔 제약이 있었다. 연못이 필요하여 운동장 한가운데에 웅덩이를 파고 그곳에 물을 채워 공간을 변형시켜야 했다. 주왕산 국립공원 자하교 부근에서 이루어진 공연은 실제로 ‘물’ 속으로 들어가 공연을 했지만 그곳은 배우들이 훈련하고 작업했던 생활공간과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고, 국립공원이라는 공간의 제약 때문에 그곳의 환경을 총체적으로 활용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이곳의 주 관람객은 주로 관광객들이어서 ‘보여주는 자’와 ‘보는 자’ 사이의 간극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삶의 현장과 연극 환경이 분리되지 않았던 송생리 후평 마을에서의 공연과 주왕산 국립공원처럼 불특정의 관객이 오가는 곳에서의 공연이 얼마나 큰 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영양군 용화리 주민들과의 만남
동아시아 연극인들의 워크숍 주제는 ‘전통과 현대 그리고 공동체’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연극 작업만이 아닌, 워크숍을 통해 습득된 기술을 갖고 공동체와 만나는 것을 계획했다. 영양군 용화리 ‘대티 마을’주민들이 이들을 초대했다. ‘생태 치유마을’이라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 이 마을의 주민들은 매우 활기차고 적극적이었다. 15명 정도의 마을 주민들이 3박 4일 동안 매일 저녁 7시 30분부터 10시까지 공동체 연극 워크숍에 참여하셨고 마지막 날엔 마을 잔치를 열어서 그 결과를 발표했다.
워크숍 첫날, 마을 주민들이 수줍은 얼굴로 워크숍 장소에 나타나셨다. 단 한번도 연극에 대한 경험이 없으신 60대 가량의 어르신들이 외국 배우들과 연극으로 소통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뜨거운 여름날 고단한 농사를 마치고 주무셔야할 시간에 워크숍 장소로 와서 3시간씩 몸을 움직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이분들은 매일 밤 벅찬 마음으로 워크숍에 참가하셨다고 한다.
워크숍을 진행하는 배우들에겐 ‘연극은 어려운 것’이라는 편견을 깨는 것이 급선무였다. 배우들은 어떻게 하면 쉽고 재미있게 워크숍을 진행할 수 있을지,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공연물을 만들 것인지 지혜를 모아서 워크숍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 용화리 대티마을 주민들의 ‘공동체연극 워크숍’
워크숍 장소는 아직 완공되지 않은 공장 건물 안이었다. 30여 명이 움직이기에 충분한 공간은 아니었지만 음료수 박스를 의자 삼아 둥글게 모여 앉아서 서로의 마음을 열고 노래하고 춤추기에 오붓한 장소였다. 마을 주민과의 워크숍 진행은 홍콩에서 온 배우 ‘에릭(Eric)'이 맡았다. 워크숍 전날 열심히 한국어를 익혔지만 서툴 수밖에 없는 그의 한국어 말투가 오히려 외국에서 온 배우들과 대티 마을사람들 사이에 있는 벽을 허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워크숍은 배우들이 마을주민들에게 연극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배우들이 마을 주민들에게 노래와 춤을 배우고 이것을 자연스럽게 공연물로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기획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타국에서 온 배우들에게 온몸으로 한국 노래와 춤을 가르쳐주셨다. 말이 아닌 몸짓으로 소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히려 사람들의 몸을 크게 열어주었다.
마지막 날, 마을주민들과 동아시아 배우들은 마을잔치를 열고 손님들을 초대했다. 영양군 관계자들과 이웃 마을 주민들이 대티마을 사람들과 동아시아 연극인들이 협력하여 만든 공연을 보기 위해서 왔다. 이날 공연은 3일 동안의 워크숍에서 노래했던 ‘뱃노래’와 ‘산토끼’ ‘학교 종이 땡땡땡’을 춤과 움직임으로 엮은 것이었다.
▲ 영양군 용화리 주민들의 마을 잔치와 발표회.
용화리 주민들은 자연스러운 몸짓과 웃음으로 편안하게 공연을 했다. 워크숍 첫 날의 긴장감은 일찌감치 사라졌고 3박 4일 동안 마을 주민들이 어떻게 타국에서 온 배우들과 문화 공동체를 이루고 정성껏 마을 잔치를 기획했는지, 넘쳐나는 자부심을 보여주셨다.
이번 워크숍을 통해 삶과 분리되고 단순한 볼거리로만 전락했던 연극이 대티마을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 발표했던 노래와 춤이 대티마을 특유의 것이 아니라는 점, 영양군 용화리 고유의 공동체 문화를 볼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쉽다. 이 마을에도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공동체의 노래와 춤이 있었고, 민담이나 전설이 있을 텐데 이것들이 오늘의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묻혀있는 것이 안타깝다.
마을 공동체 문화의 복원, 그것은 일과 놀이와 예술이 자연스럽게 통합된 삶의 환경을 만들어내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번 공동체 연극 워크숍이 불모화된 지역 문화를 일으키는 불씨가 되기를, 지역주민들이 함께 일하고 노래하고 춤추며 만들어냈던 우정과 환대의 문화가 영양군 용화리 대티마을에서 지속되길 바란다.
- 주 -
1) 동아시아 젊은 예술인들이 교류와 협력을 통해 공동체 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문화예술 활동가를 육성하기 위한 레지던스 프로그램이다.
2) 리차드 쉐크너(Richard Schechner, 1934∼ )현 미국 뉴욕대학 티쉬 예술학부 공연학부 공연학과 교수. 연극학자 겸 연극연출가. 환경연극 창시자. 1960년대 '퍼포먼스 그룹' 대표. 공연학 전문 계간지 『드라마 리뷰(TDR)』편집자. 연극인류학과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음.
3) 최치림, “환경연극의 공간에 관한 연구”에서 참고함.
- 글쓴이 : 임은혜
- 극작가, '나무닭움직임연구소'는 청송군 청송읍 송생리에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