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류명화_봉화를 걸으며]띠띠미 산수유 마을
- 류명화
띠띠미 산수유 마을
야~ 봄이다!
봄이 또 오고야 말았구나!
간밤엔 봄비까지 내려 언 대지를 녹이고 봇도랑을 흐르는 물소리가 정겹기만 하다.
하늘은 참 공평도 하시지!
어느 한 곳 섭섭잖게 단비를 내려주시니 땅에 뿌리를 내린 생명은 싹을 틔우고 꽃들을 하나둘 피워낸다.
꽃망울 부풀어 하나 둘 터질 때 마다 까닭 없이 설레는 이 마음은 또 어쩌란 말인가.
바람 끝이 알싸한 아침. 산수유가 있어 봄이 일찍 오는 띠띠미 마을로 봄나들이, 꽃 나들이를 나선다. 어쩌면 나도 다시 피지 않을까 하는 엄청난 기대와 함께.
▲ 산수유 꽃
미처 다 감싸지 못해 담장 밖으로 뻗치고 나와 암팡지게도 핀 산수유처럼 봄은 현기증이 나도록 온통 노란빛 이다. 복수초, 양지꽃, 민들레, 생강꽃, 꽃다지, 개나리..... 세상은 온통 샛노란 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 와란 소나무 숲
띠띠미 마을은 봉화에서 36번 옛 국도를 타고 7km쯤 지나면 동양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다시 좌측으로 2km 더 들어가 위치한 마을이다. 띠띠미로 들어서는 입구엔 수령이 대략 70~80년은 족히 된 소나무 숲을 중심으로 길은 좌우로 나눠지고 솔숲을 지나면 다시 한길로 이어진다.
이 조그마한 마을은 와란(臥蘭)은 본디 순흥부(順興府) 와단면(臥丹面)이고 이 와단 이라는 지명에서 와란으로 불렀으며 제법 규모가 큰 면소재지였다고 한다.
소백문화권과 강원도 태백문화권의 중간에 위치해 강원도를 가려면 꼭 이곳을 거쳐 가야만했다. 내성장을 보고 와란에서 하루를 묵어 아침에 출발하면 태백도, 영월도, 단양도 하루거리가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지리적 요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행상인들은 이곳 와란에서 하루를 묵어갔고 마을 입구 느티나무 숲은 객주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신작로가 뚫리기 전만 해도 행상들의 거점지가 되던 곳이다. 그래서 생겨난 지명 '말목재'는 인근 주막이나 객주에 든 사람들이 말을 맡겼던 마방이 있어 불러진 지명이다.
신작로가 뚫리고 자동차가 생겨나면서부터 사람들은 먼 길을 걸어 다니지 않아도 됐고 영남 북부권 교통의 요지 역할을 해오던 와란은 번화했던 과거와 달리 띠띠미 산수유 마을과 함께 동양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조용하고 아늑한 마을로 굳혀져 간다.
와란엔 "동명서원(東溟書院)'이란 큰 서원이 있을 만큼 규모가 큰 동네였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서원은 없어지고 지금은 그 터에 블루베리 과수원이 자리하고 있다.
▲ 띠띠미 마을 초입
오늘의 목적지 띠띠미를 가려면 동양삼거리에서 와란을 거친다.
신기하게도 1km남짓 되는 공간 안에 나무를 중심으로 길이 좌우 두 갈래로 나눠지는 곳이 세 곳이나 있다. 보통 길을 낼 때 나무가 있으면 베거나 비켜 갈 텐데 도로 가운데 우뚝 선 고목들은 여느 곳에선 볼 수 없는 이색적인 풍경이다. 수백 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떡하니 길을 막고 서 낯선 이방인을 검문하더니 조금 지나면 다시 소나무 숲이 길을 막고 있어 2차 검문을 한 뒤 최종 띠띠미 마을 입구에서 3차 검문을 거친 후에야 낯선 방문객을 받아들인다. 산골 마을이 다 그렇다지만 이곳 띠띠미 마을은 유독 입구가 좁고 막혀 있어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 마을이다. 들 구멍은 있지만 날 구멍이 따로 없는 막힌 형상 때문에 두곡(杜谷)이라 불렀나보다.
‘띠띠미’ 마을을 ‘띠띠물’ 또는 ‘두동’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어원은 두곡(杜谷)이 후곡(後谷)으로 불리어 후곡의 의미 뒷듬마, 뒷드물, 뒤뜨미, 디뜨미, 띠띠미 이렇게 다양하게 불리어지며 띠뜨물, 또는 띠띠미라는 지명이 정착하게 됐다고 한다.
‘두동’ 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 지명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두곡으로 표기하지 않고 마을 동자를 쓰면서 ‘두동’ 이라 불러지게 됐다. (남양 홍 씨 종손인 홍대교선생님의 설명을 인용함)
‘띠띠미’ 마을 이름은 마을 풍경만큼이나 독특하고 예쁘다.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의 남쪽 지맥 문수산을 두른 마을이니 풍수를 모른다고 해도 명당임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아늑하고 고요한 마을이다.
▲ 옥류암
이 마을은 개절공(介節公)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선생이 400년 전 이곳에 터를 잡았으며 두곡은 연산군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참의공 한(瀚)의 5대손으로 선조 때의 명신 문장공 홍가신(洪可臣)의 손자이기도 하다.
두곡은 마을 이름인 두곡을 호로 썼으며 뜻은 막힐 두(杜), 골 곡(谷)자로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선생님의 의지가 숨어 있다 고 한다.
두곡 선생이 이 마을로 들어 올 당시 이천에서 산수유나무 두 그루를 가지고 와 심었는데 '자손들은 절대 공부를 시키지 말고 자연과 더불어 산수유를 가꾸어 먹고 살라' 고 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출세 보다 마음이 편안하기를 바랬나보다.
두곡 홍우정 선생께서 은거하던 정자로 문수산 아래, 마을 뒷산 자락에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건축특성으로 전면에 조성한 3개의 연못이 있고 연과 구기자, 소나무, 대나무 등을 심어 ‘태백오현’의 당대 추앙받던 학자들의 회동 교류장소였다고 한다.
▲ 각금당 심장세 선생의 묘
비탈진 자갈밭에 변변한 논 한 뙈기 없는 것으로 봐 오래 전부터 산수유가 유일한 수입원이였을 것이다. 그래서 "과실천냥, 명주천냥, 산수유천냥" 이란 말이 생겼나보다.지금도 이 마을 주민 절반 이상이 남양 홍(洪)씨로 대부분 산수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며칠 후면 봄도 깊어 마을이 온통 산수유 꽃으로 물들고 비탈진 밭에는 초록빛 청보리가 꽃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룰 것이다.
어디 봄만 장관일까 빨간 루비 알 같은 산수유가 가을엔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만 해도 설렌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대문이 닫힌 큰 고택이 있고 그 좌측으로 돌아가니 따뜻한 봄볕을 마주하고 마루 끝에 앉아 산수유를 고르고 계시는 할머니 한분을 만날 수 있었다.
▲ 3월 말경에서 4월 초 산수유 만개하는 때를 맞춰 봉화문인협회에서는 이곳에서 ‘산수유 시낭송회’를 매년 개최한다.
2013년 산수유 시낭송회는 4월 13일에 개최되었다.
해맑게 웃으며 맞아주시는 임씨 성의 이 할머니는 열여덟에 상운면 기촌에서 이곳 띠띠미 홍씨 네 집으로 시집을 왔다고 한다.
"할머니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하고 물으니
- "남사스럽게 나이는 왜 묻니껴?"
"이 나이가 되도록 죽지도 못하고 이러고 사니 우야면 좋을 니껴?"
"우야믄 죽는지 죽는 방법을 알면 나 좀 갈촤 주소"
"이젠 가야 될 나인데 명이 길어 아직 못가고 있니더마는 명을 마음대로 못하니 우짭니까 갈 날 올 때까지 이러고 살아야제"
"아직은 건강해 보이시는데 왜 가시려고 하세요?"
- "올해 내 나이 아흔 넷이여"
▲ 상운면 기촌리에서 시집 온 임씨 할머니
- "영감 보낸 지 14년째 드는데 곧이곧대로 살아오신 영감님 덕에 세상모르고 살았으니 이젠 나도 영감님 보러 가야지"
뽀얀 머리에 주름은 깊어도 선하고 맑은 눈빛이 곱기만 하다. 내내 여기서 사셨냐고 물었더니
- "아이여 아들 어릴 때는 산수유 따서 여그서 먹고 살았지만 보다시피 논삐알 하나 변변한 게 없으니 애들 공부 시킬라꼬 영주 나가 30년 살다 다시 들어 왔제"
- "예전엔 고목도 많고 산수유도 마이 달려 많이 할 때는 천여 근씩 했는데 시방은 열매도 덜 달리고 고목은 또 돈 된다고 외지인들한테 팔아먹어 전 같이 마이 못해"
- "허기야 이 나이에 마이 달린들 내가 어떻게 하겠노. 숨이 붙어 있는 동안 할 일 없으니 이러고 하제"
▲ 봄볕을 쬐는 화초들
날이 좋아 내 놓은 화분들은 할머니가 직접 기르는 것들이냐고 여쭤 봤더니
- "요것들은 영감님 생전에 키우던 화촌데 당신께서 늘 나없어도 물만 주면 사는 것들이니 나 없어도 화초들 죽이지 말고 잘 키우라고 당부를 하고 가셨기에 내가 사는 동안은 영감님 보듯 기르고 있제"
- "겨울에는 방에 들여 놓았다가 봄 되면 내 놓지" 이 많은 화초를 방에 들여 놓으면 할머니는 어디서 주무시냐는 질문에 "내 몸띠 하나 누일 틈만 있으면 되이까 방에서 내 캉 같이 겨울을 나니더"
영감님과 사이가 각별해 보여 자제를 몇 두셨냐고 여쭸더니
- "너이 낳니더. 마이 낳제?"
"아니요. 그 시대에 넷이 뭐가 많아요?"
- "아들은 너이고 또 딸이 둘이 더 있제"
"그런데 왜 넷이라고 하셨어요?"
- "출가외인이 자식인가? 남의 집 귀신 될 딸은 남의 자식이지 어째 내 자식인가?"
잠시 대화가 멈췄다. 아직도 딸은 내 자식으로 치지 않는다는 할머니 말씀이 같은 여자 입장에선 좀처럼 이해가 되질 않는다.
94세 임 할머니는 그 옛날 열여덟 시집오던 그 시대에 아직 머물고 계신다. 어쩌면 남양 홍 씨 양반가로 시집온 며느리들이 대부분 그렇게 살아 왔을 것이다. 비단 이 마을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삼종지도로 평생 목소리 한번 크게 내보지 못하고 이 터를 지켜왔을 여인들의 삶이 문득 애처롭게 느껴진다.
▲ 깐 산수유를 말리는 과정
할머니는 지난 가을에 따다 놓은 산수유 열매를 더디게 고르고 계셨다. 눈도 침침하고 손놀림도 전 같지 않아 온 종일 고르고 까도 한 근 이상 깔 수 없다고 하신다.
예전 같으면 겨우내 까 백여 근 아니 천근도 깠다고 하시니 이 마을 산수유량이 얼마나 많다는 얘긴가!
그렇다면 이 무수히 많은 산수유나무들의 할머니인 시조 목이 궁금해진다.
"할머니 이 동네 시조 목이 어디에 있어요?"
- "요 아래 개울가 심 씨네 가서 물어봐"
"서너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해마다 꽃을 피우고 새순이 나오니 신기한 나무라 카이"
그렇다 셀 수도 없이 많은 후손을 거느린 시조 목이니 신기할 수밖에. 이 마을 산수유 시조 목처럼 할머니도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바라며 일러준 개울가 시조 목을 찾아 나섰다.
비탈진 돌밭이나 개울 가로 수 백년 넘은 산수유나무가 빽빽이 자리하고 있다. 곡식을 심을 수 없는 자투리 공간에 산수유를 심었던 조상들에 삶의 지혜가 보인다.
▲ 개울 따라 자리 잡은 산수유
개울을 따라 내려가니 지탱하기 힘든 가지는 다 떨어져 나가고 오래된 몸통만 남아있다. 두곡선생이 병자호란 때 들어오셨다니 얼추 400년 가까운 시간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셈이다. 무성하고 우람할 것이라는 기대는 빗나갔다. 중심부에 새로 난 잔가지로 산수유 꽃이 망울망울 달렸다.
▲ 산수유 시조목
아이러니하게도 자손들이 공부해 출세하지 않기를 바랐던 두곡선생님의 산수유나무는 자식들 대학공부 시키는 효자목이 되었고 집집마다 대학나무로 산수유를 심었던 것이다.
터가 좋은지 가문이 좋은지 알 수는 없으나 두곡선생님의 당부가 무색하게도 남양 홍 씨 집안엔 국회의원도 학자도 이 마을 출신이 많다.
▲ 쑥버무리
400년 시조 목을 둘러보고 개울 따라 내려오다 노인정에 들리니 마을 할머니들은 점심준비로 분주하시다.
빈손으로 들려 염치없지만 오래 전부터 이 마을에서 먹어 오던 팥잎 밥을 안쳤다고 하니 그 맛이 궁금해 넉살 좋게 자리를 비집고 들어섰다.
띠띠미 마을에선 어린 콩잎을 말려 묵나물로도 해 먹고, 팥잎을 말려 묵나물로 먹기도 했는데 오늘은 묵은 팥잎에 밀가루를 묻혀 밥 위에 앉힌 팥잎 밥이다. 강원도 산간지방에서 먹는 곤드레 나물밥과 비슷한데 재료가 팥잎이라는 것과 밀가루를 묻혀서 찌는 것이 조금 다르다. 식미에 따라 달래간장으로 비벼 먹어도 괜찮지만 깨소금 듬뿍 넣은 맑은 간장에 비벼 먹으니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 정말 좋다.
시래기 된장국을 곁들인 띠띠미 마을에서 먹는 팥잎 밥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음식으로 기억 될 것 같다.
▲ 팥잎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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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띠미 산수유 꽃 피거들랑
- 류명화 -
기다림이 가지마다 조롱조롱 영글어
겨우내 뽀얀 먼지를 이고
기다림으로 응집된 사랑은
얼었던 대지 위로 아지랑이 빠져 오르면
그대, 아시나요?
뽀얀 강냉이 튀밥이 허공을 튀어 오르듯 |
봄이면 고택과 어우러져 산수유 꽃이 만발하면 따뜻한 봄날 꽃 멀미를 할 지경이니 사랑이 싹트는 연인도 좋고, 다정한 내외간도 좋다. 이 봄이 다가기 전 띠띠미 마을에서 산수유 열매같이 영근 추억하나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 글쓴이 : 류명화
- 1972년 청명한 식목일 오후 2남7녀 중 아들이길 바랐던 부모님의 서운한 마음과 상관없이 일곱째 딸로 태어났다. 똑똑하진 않지만 나름 삶을 즐길 줄 알고 퉁퉁한 아랫배와 홀쭉한 주머니 사정에 스트레스 받지 않는 건강한 여성이다. 지금은 봉화의 아름다운 자연자원을 바탕으로 숲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