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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커스

  • [이미홍_영덕을 만나다]미역을 품은 봄바다와 사색의 공간 대소산봉수대
  • 컬처라인(cultureline@naver.com) 2024-01-10

 

 

영덕을 만나다

 

 

미역을 품은 봄바다와 사색의 공간 대소산봉수대

 

 

글 이미홍

 

 

바닷가 사람들에게 봄은 미역과 함께 온다는 말이 있다. 겨울바람이 잦아들고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3월 말부터 미역을 채취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날이 차면 4월이 되어서야 미역을 채취하기 시작한다. 수온에 따라 조금 빠르거나 늦을 수도 있지만 대개 4월말이나 5월 초순까지 한 달 남짓한 기간이 미역 채취에 적기다. 차가운 바다 밑에서 겨우내 매서운 북풍을 견디고 자란 동해안의 자연산 미역은 전국에서도 그 진가를 알아준다. 영덕 바다가 키워낸 자연산 미역은 그 참맛을 아는 이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다. 요즘은 수확량도 많지 않아 늦으면 제대로 맛을 보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미역이 바다 위로 검푸른 제 몸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봄이면 동네 어촌계며, 물질할 해녀들이며, 지난 가을부터 미역밭을 일군 이들까지 모두 마음이 바빠진다. 봄이 무르익어갈 즈음 7번 국도를 따라 길을 나선다면 어디쯤인가에서 미역을 따서 말리는 풍경을 만날 수도 있다.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던 3월 초순을 지난 어느 날, 미역을 품은 봄바다를 보러 무작정 영덕으로 길을 나섰다. 처음 도착한 마을에서 열흘에서 스무날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답을 들었다. 그래도 좋았다. 햇빛 사이로 제 존재를 드러내며 띠처럼 길고 널따랗게 검은빛으로 일렁이며 검푸르게 넘실대는 미역을 품은 바다. 그 싱싱한 생명력에 압도되어 한참을 서서 보았다.

 

산골에서 자라 바다만 보면 무작정 좋아했던 내가 미역을 키워내는 바다와 그 바다에서 미역밭을 가꾸어 수확하는 이치를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바닷가에 가면 할머니들에게서 미역을 사서 돌아오곤 했고, 포구나 바닷가 한쪽에서 미역을 말리는 모습을 더러 보기도 했지만, 크게 마음에 두지는 않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미역을 따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봄이 되면 바닷 속 미역이 어느 정도 자랐을지 괜스레 궁금해지기도 했고, 널어놓은 미역이 보이면 그 동네 어른들께 올해 미역농사는 잘됐는지 묻고 싶어졌다. 아마도 그 장면들 속에 우리 아버지 같고 엄마 같은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7번 국도를 오르내리면서 여러 번 영덕의 바닷길을 지나다녔다. 그 숱한 날들 중에는 미역을 따는 몇 번의 봄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푸른빛으로 넘실대는 봄바다가 그렇게 많은 미역을 품고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해인가 그 길을 지나다 차를 멈추고, 파도가 여울져 들어왔다 돌아나가는 바다 모퉁이에서 긴 장대를 들고 파도가 밀어내는 미역을 건져내는 노부부를 보았다. 처음 그 장면을 보았을 때는 단순히 바다에 들어가기 힘들어진 바닷가 어른들이 그렇게 해서라도 미역을 건져 갈무리하시나 보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여기가 미역이 많이 밀려오는 곳이냐는 물음에, 많이 나던 곳인데... 이제 미역철도 다 돼 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후 늦게 다시 나와 봐야겠다는 말씀에 어렴풋이 이것이 바닷가 어른들이 미역이 나는 철에 늘 해오던 일이구나 생각되었다. 그 후 가끔씩 그 언저리를 지날 때마다 미역을 건져 올리시는 할머니 모습을 눈으로 찾게 되었다. 바닷가 마을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미역을 따는 분들이 있는지 살피는 버릇이 생겼고, 어쩌다 한 번씩 그 길의 다른 모퉁이에서 비슷한 장면들을 만나기도 했다. 미역이 나는 곳에는 보통 크고 작은 나지막한 바위들이 있었다. 미역이 잘 자라는 곳은 바다 수심이 얕고, 조류가 빠르며, 바닥이 암반으로 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바다 쪽으로 한 발 더 나가 있는 큰 바위들과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작은 바위들, 그런 바위들과 방파제 사이에서 장대를 들고 미역을 건져 올려 포대자루에 담는 할머니와 오토바이를 타고 와 미역이 담긴 포대를 지고 어머니 손을 잡고 둔덕을 올라가던 아들을 보기도 했고, 잠수복 같은 옷을 덧입고 미역을 건져 테트라포드에 올려두고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가던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알게 됐다. 이것이 봄철 바닷가 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라는 것을.

 

 

안동에서 7번 국도를 타고 가다 내려선 곳은 블루로드 2코스 어디쯤에 있는 경정리였다. 경정3리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아직은 미역 채취하기에 이르다고 하셨다. 직접 따서 말린 미역을 팔려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전을 펴고 앉은 할머니들은, 우리는 적어도 3월 말은 돼야 미역을 건지기 시작할 거라고 하셨다. 저기 큰 바위가 보이는 중간쯤부터가 우리 마을 구역이라며 동네가 크지 않아 미역이 다른 곳보다 많이 나지 않지만, 아직도 직접 바다에 들어가 미역을 채취하는 해녀 출신 할머니들이 네 분이나 있다며 경정리 마을을 소개하셨다. 미역 채취하는 날이 되면 기별을 해주시겠다는 말씀이 고마워, 연락처를 드리고 주머니를 털어 자연산 미역 두어 오리를 사서 길을 재촉한다.

 

 

 

대탄리를 지나는데 운이 좋게도 미역을 채취해 널어 말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올해 첫 미역작업이라고 답을 해준다. 대탄리는 이제 해녀 일을 하는 이가 없어 멀리 고성이나 창수에서 미역을 채취하는 선수, 물질하는 이를 사온다고 한다. 이날 볕이 좋다고 해 물질하는 이와 날을 잡았는데, 아직 바닷물이 차가워 바다에 들어간 선수가 채취를 오래 하지 못하고 물 위로 올라왔다고 했다. 그래도 첫 수확이라 그런지 오전에 수확한 햇미역을 쨍한 햇볕에 널고 마지막으로 미역귀를 씻어서 말리는 작업을 하고 있던 아주머니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4월이 되어 두 번째로 찾은 날은 본격적인 미역 철이라 저마다 일손이 바빠 누구를 잡고 물어볼 틈조차 없었다. 미역줄기를 고르고 가지런히 채에 넌 뒤 햇빛을 따라 자리를 바꿔주고 뒤집어주는 사람들, 바다에서 자란 미역들이 바닷바람과 해가 내리쬐는 뜨거운 기운에 제 몸을 말릴 수 있도록 펴놓은 모습까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며 만들어내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다시 바다로 길을 나선 날, 도착한 곳은 대진리였다. 대진리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남편이 수온을 보려고 아침에 바다에 들어갔다 건져 올린 미역을 높이 쳐진 줄에 널고 있었다. 봉화에서 바닷가로 시집와 자식들을 키울 때 미역농사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때는 봄에 미역해서 먹고 살았지. 옛날에는 다 공동작업 했지. 지금은 어촌계에 돈을 내고 구역 짬을 사, 미역밭이지. 우리 거는 저 앞 바우 있는 데서 저기 돌 있는 데까지가 우리 짬이래. 전에는 마을에 60집이 있으면 한 짬을 보통 여섯 집씩 공동으로 작업을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개인이 하는 형태가 대부분이래. 동해안에서도 이쪽은 4월 19일 정도 되면 미역이 한창이래. 그때 되면 저 아랫동네부터 이 윗동네 할 것 없이 미역하느라 바쁘다.”

 

사람도 햇빛을 봐야 하듯 미역도 빛을 봐야 줄기가 실하고 맛이 더 좋다며, 바닷바람과 햇빛이 잘 들라고 줄에 넌 미역줄기를 뒤집어준다. 오랫동안 바닷가 사람들에게 미역은 바다에서 나는 자원 가운데 가장 가치가 높은 고마운 해산물이었는데, 이제는 바다 환경이 달라져 미역이 예전 같지 않다고 걱정하신다. 자연산 미역은 멍게줄에 미역씨가 들러붙어 자라는 것이고, 돌미역은 돌에 미역씨가 붙어서 자라는 것이라며 귀찮아하지 않고 알려준다. 어디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자신이 어떻게 미역 짬을 가꿔서 자식들을 키워냈는지를 이야기하는 표정 속에 살아온 날들에 대한 당당함이 묻어난다. 그제야 내가 내내 궁금했던 것은 미역이 아니라 미역을 따는 바다 사람들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았다. 차가운 바다 속에 들어가 미역을 따고, 파도와 싸우며 미역을 건져 올리는 일을 기꺼이 감당하는, 그들의 생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만나고 싶어 그렇게 봄바다가 그리웠던 것일까?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대진에서 고래불해수욕장을 뒤에 두고 되짚어 내려오다 멀리 ‘죽도산전망대’가 보이면 축산이다. 예전 축산항은 미역을 채취하는 해녀들로 유명했지만 죽도산전망대와 관광객을 위한 시설들이 포구를 따라 들어서면서 이제는 미역도 많이 나지 않고 채취를 하는 이들도 거의 없다고 한다. 영양 남씨의 발상지이자 ‘블루로드 C코스’로 이어지는 지점이며, ‘대소산봉수대’를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잠시 머무는 포구이기도 하다. 블루로드 C코스는 역사 속 인물들의 삶과 이야기가 곳곳에 숨어 있어, 길 이름 뒤에 ‘목은 사색의 길’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목은 사색의 길’이라 이름 붙여졌지만 나는 굽이굽이 돌아드는 그 길의 모든 곳, 바닷길과 안쪽 마을, 산길, 때때로 차를 멈추고 걸었던 그 모든 언저리의 길들을 사색의 길이라 인식한다. 경정리 차유마을에서 축산으로 넘어가는 산길은 진달래가 잔잔히 피어 동행과 소담을 나누기 좋고, 사진리의 할배할매당을 찾아 소주 한 잔을 올리는 모습은 돌과 나무에 기대는 원초적인 믿음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 봄, 그 사색의 길에서 만난 제일 인상 깊은 장면이 바닷사람들이 건져 올리는 미역이었다면, 사색의 길의 진수는 단연 대소산봉수대였다.

 

 

대소산봉수대로 오르는 길은 축산에서 영해로 가는 지름길이어서 예전에는 많은 이들이 오갔던 길이다. 또 축산항을 뒤로 하고 블루로드 C코스를 여는 길이기도 하다. 죽도산전망대가 끝나는 지점에서 길을 건너 대소산봉수대로 오르는 산행길도 좋지만, 이정표는 축산항에서 경정리로 향하다 염장삼거리에서 20번 지방도를 따라 영해 방면으로 가는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영해방면으로 500m 정도 가다 보면 도로변에 대소산봉수대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를 보고 길을 돌아들면 바로 영명사가 있고, 영명사에서부터 봉수대까지는 임도가 만들어져 있어 차량으로도 갈 수 있다. 길이 끝나고 통신사의 철탑이 보이는 곳에서 몇 걸음 걷다 보면 봉수대가 있다. 푸른 산빛과 어우러진 긴 나선형의 단은 소박하면서도 힘이 있다. 대소산은 축산면 축산리, 영해면 사진리와 괴시리 뒤에 있는 산이다. 무엇보다 바다와 가까워 먼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영양의 별반산봉수대가 있던 풍력단지도 한눈에 들어오는, 사방으로 시야가 열려 있는 산이다. 높이는 278m에 불과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왜 이곳에 봉수대가 자리했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나저나 옛날의 통신수단이었던 봉수대 옆에 현대인의 통신을 위한 철탑이 세워진 것이 절묘하다.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동해안 변방의 급한 소식을 중앙으로 전하던 대소산 봉수대는 영덕 남동쪽 해안의 주동으로 조선시대 초기에 만들어졌다. 산의 제일 꼭대기에 방어벽을 돌로 쌓고, 그 중앙에 원추모양으로 직경 11m, 높이 2.5m로 봉돈을 쌓은 모습 등 마치 봉분처럼 생긴 조선시대 봉수대 형태가 뚜렷하게 남아있어, 경상북도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수대에 오르니 죽도산전망대와 축산항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이 사는 마을들이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고 망망한 동해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 내가 올라본 그곳은 사색하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였다. 찾는 이 아무도 없는 날에도 묵묵히 그 자리를 사수하며 제 임무를 다하고 있는 돌과 흙으로 빚은 지기가 있는 곳, 특별한 꾸밈도 없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풀꽃들을 흔들고 석벽을 휘돌아 나가도 흔들림 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파수꾼의 단단함을 만나는 사색의 자리다. 일부러 찾아가야 하는 길이라 온전히 지켜졌을지 모를 대소산의 절정, 마음이 허허로운 날, 산 위에서 묵묵히 영덕의 바다와 땅을 지키고 서 있는 ‘대소산봉수대’에 가보길 권한다. 

 

 

 

 

 

글쓴이 : 이미홍
경북 안동 출생. 안동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한국문화산업전문대학원 융합콘텐츠학과를 졸업하고, 민속학과 박사과정 중에 있으며, 저서로 안동의 문화인물『하남 류한상』, 안동문화100선『안동댐』등이 있다. 현재 웅부문화원연구소부소장, 안동문화원 동지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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