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

문화포커스

  • [백소애_쑤세미의 골방에서 만화읽기]기묘하고 아름다운 설화 <묘진전>
  • 컬처라인(cultureline@naver.com) 2023-12-13

 

 

쑤세미의 골방에서 만화 읽기 

  

기묘하고 아름다운 설화

<묘진전>

 

  글 백소애  

 

 

 

어릴 적, 태화동 한옥에 살았었다. 개량한옥으로 지어진 집에는 입식 부엌과 다락방이 있었는데 다락방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아빠의 바둑판, 엄마의 카스테라 오븐기, 큰언니의 세고비아 기타, 오빠의 일기장과 교련복 따위가. 나는 그곳에서 오빠의 일기장을 몰래 읽어보기도 하고 녹색 교련모를 쓰고 기타를 치기도 했었다. 오빠의 따분한 일기에 좀 더 스펙타클한 내용이 나오길 기대했으나, 어느 날 “누가 내 일기를 훔쳐 읽는 것 같다.”는 글귀를 본 후부터는 다른 것을 읽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아빠가 ‘세계명작동화’, ‘세계의 민담’ 전집 시리즈를 구입하셨다. 오남매에게 마음의 양식을 선물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영업사원이었던 친구의 딱한 처지를 외면하지 못해 월부로 사들인 책이었다. 엄마의 잔소리가 이어졌으나 우리 오남매는 행복했다. 행복한 왕자, 미국 인디언 이야기, 브라질 민담, 페르시아 민담을 읽고 또 읽었다. 다락방에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들기도 하고 꿈에서 페르시아 왕자를 만나기도 했다. 빨간머리 앤의 초록지붕 집처럼 태화동 한옥은 나의 어린 시절 서사를 풍부하게 채워준 공간이었고 그곳에서 읽었던 세계의 민담은 더욱 그러했다.

 

 

새삼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 것은 <묘진전>을 만났기 때문이다. <묘진전>은 수묵담채화 같은 담박한 그림에 흡입력 있는 스토리, 옛날 옛적으로 시작하는 민담의 매력이 더해진 구전설화와 같은 만화다. 천계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잔혹한 신 ‘묘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각기 다른 운명을 지닌 인물들의 처절하고 지독하면서 처연한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묘진이 존재하는 세상은 세 가지로 나뉘어 있다. 푸른 하늘에 꽃들이 만발하고 배고픔, 병마, 추위와 더위가 없는 아름다운 천상계, 인간이 사는 지상,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굶주리고 더러운 땅 오니. 내일 따위는 없는 땅 오니에서 자란 묘진은 처절한 싸움을 통해 천상계 십이지 신 중 하나가 된다. 천상계에서 정동쪽 별에 앉아 언제고 태양을 바라보는 가장 빛나는 인생의 순간을 보낸 것도 잠시, 묘진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는 천상계의 신들은 묘진을 지상으로 떨어뜨리고 만다.

 

 

<묘진전>은 더는 살생을 하지 않고 덕을 쌓아야만 다시 천계의 신이 되어 하늘로 오를 수 있는 묘진, 그런 그와 한쪽 눈을 나누어 부자(父子)의 연으로 얽혀버린 산, 지독히도 불행하고 처절한 삶을 살게 되는 막만(달래), 증오의 화신이자 악랄한 영혼으로 절대적 힘을 갈망한 진홍의 파란만장한 이야기이다.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거나 맞서고, 그러다 죽음과 맞닥뜨리고 절망 속에서 삶의 가치와 마주한다. 그래서일까 작품의 분위기는 어둡고 치열하다. 온몸과 온 마음으로 부닥치고 깨지고 아파하며 깨닫는다. 얽히고설킨 인연 속에서 서로 반목하고 화해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불행과 고통 속에서 묘진과 막만은 각기 다른 목적으로 길을 나선다. 이들의 여정은 색다른 여로형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세상의 밑바닥에서 천상계로 올랐다 지상을 떠도는 시니컬한 묘진과 의술로 세상을 구하고 싶었으나 운명에 아파한 산, 비루한 삶 속에서 얼굴에 돋아난 비늘처럼 가슴 한편에 자리 잡은 복수심으로 괴로워하는 막만, 온갖 악행을 저지르나 타고난 운명을 거슬러 최고의 힘을 갖고자 했던 진홍의 이야기가 시종일관 무채색 먹빛 배경에 펼쳐진다.

 

 

병풍 속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풍경과 인물이 오래된 설화처럼, 전설처럼, 차곡차곡 쌓여 밀도 있는 서사를 보여준다. 무속신앙과 판타지, 동양철학과 기묘한 이야기의 조합은 어린 시절 내가 다락방에서 꿈꾸었던 옛날 옛적 고요했던 이야기의 한 자락과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무섭도록 잔혹하고 아름다웠던 이야기에 이끌렸던 그 시절 말이다.

 

묘진전1~4권/ 젤리빈 글 그림/ 영컴/ 2014년 

 

 

 

 

글쓴이 : 백소애
강원도 태백 출생. 아이큐는 낮지만 머리가 좋다고 굳게 믿고 있음. 변덕이 심하고 우유부단하나 따뜻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조카들에게 헌신적이며 인간성 또한 좋다.....고 믿고 있다. 학생 때 교무실에서 밀대자루로 바닥 밀면서 은밀히 훔쳐본 생활기록부에는 ‘예의 바르나 산만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한참을 갸우뚱 하다가 담임이 수학선생님이었기에 그냥 이해하기로 함. 다소 후진 취향을 지니고 있으나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쓸데없는 걱정과 호기심이 많음. 같은 계획을 몇 년째 하고 있으며 역시나 올해도 다이어트와 앞머리 기르기에 도전할 생각이며 과메기에 없어서는 안 될 다시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 웹툰도 괜찮지만 만화책은 역시 종이책으로 보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날로그 건어물녀. 좋아하는 것은 무한도전, 오뎅으로 만든 떡볶이, 삼겹살에 매실소주, 비오는 날, 생활의 달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괴짜가족 류의 저질유머. 비 오는 날 무한도전 틀어놓고 배 깔고 누워 만화책 보면서 빈둥거리며 사는 것이 꿈.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