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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종화_의성 시가기행, 산들에 대한 이야기]집집마다 표창받기를 희망하다
  • 컬처라인(cultureline@naver.com) 2022-12-26

 

 

안종화와 함께 떠나는 의성 시가기행

 

 

집집마다 표창받기를 희망하다

 

글. 안종화

  

위천 절벽 위에는 병산정이 있다. 바위 절벽에는 김용배 초대 비안군수가 세긴 병산벽이란 글이 있다.

 

 

비안면 지역은 신라 때 아화옥현(阿火屋縣)이었다. 경덕왕(景德王)이 비옥(比屋)이라 고치고 문소군(聞韶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는데 고려 현종(顯宗)이 상주목(尙州牧)에 귀속시켰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는 신라 때 아시혜현(阿尸兮縣)이었던 안정현(安貞縣)과 비옥현(比屋縣)을 병합하였다. 안정현에 감무(監務)를 두고 비옥과 겸임하였다. 조선 세종(世宗) 3년(1421)에는 두 현을 합해서 안비(安比)라 하였으나, 같은 왕 5년(1432)에 치소(治所)를 과거 비옥현 지역으로 옮기면서 비안현(比安縣)이라 고쳐 불렀다.

 

고종 32년(1895) 행정구역 개편 당시 비안현이 군으로 승격되었다. 안정 옛 현 지역이었던 정북(定北), 정서(定西), 정동(定東)과 군내(郡內 ; 縣內 또는 邑內), 신동(身東), 내북(內北), 외북(外北), 내서(內西), 외서(外西) 9개 면을 관할하였다. 1906년에는 상주목(尙州牧)의 속현으로 단밀현(丹密縣) 지역이던 단동(丹東), 단서(丹西), 단남(丹南), 단북(丹北) 4개 면과 보주(甫州)[예천(醴泉)]의 속현이었던 다인현(多仁縣) 지역의 현동(縣東), 현서(縣西), 현남(縣南), 현내(縣內) 4개 면을 이관 받았다. 1907년 외북면(外北面)을 의성군에 넘겨주었으며, 1909년에는 의성군 우곡면(羽谷面)을 넘겨받는 등 번성하였으나, 1914년 의성군으로 병합되었다.

 

유서 깊은 옛 고을의 한가운데를 낙동강의 지류인 위천이 흐르고 있다. 쌍계(雙溪)에서는 팔공산 북사면과 수기령에서 흘러온 물을 모아 군위 땅을 적시며 흘러온 위천 그리고 군내 동쪽 끝에서 발원하여 의성읍을 거치며 흘러온 쌍계천 두 물길이 합류한다. 망북정(望北亭)은 병산정(屛山亭)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절벽 위에 남아 있다. 그러나 관아 객사에 있던 요산헌(樂山軒)과 함께 구요루(懼謠樓)와 쌍명루(雙明樓)는 지금에 없다. 

 

비안현의 풍경을 노래하다

비안현의 읍치는 오늘날의 비안면 동부리와 서부리 일대였다. 관아 또한 이 곳 어디쯤 있었을 것인데 풍경을 묘사한 글이 있다. 객관(客館)의 동헌(東軒)이던 요산헌(樂山軒) 기문(記文)에 남겨진 김지경(金之慶)의 글에, “… 이 헌(軒)으로 말한다면, 여기에 앉아 돌아볼 때 푸른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져 있고, 산골 물이 띠처럼 앞에서 흐르고 있어 실로 산에 오르고 물가에 가는 듯한 멋이 있다. 산수의 즐거움이 모두 갖추어 있는 것이다. 그밖에 제도(制度)의 교묘함이나 단청의 아름다움은 다만 나머지 일이다. 이제부터 이 헌에 오르는 이는 산수의 즐거움을 좌우에서 취하여도 그 근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현의 별호가 본래 병산(屛山 병풍 같은 산)이니, 산수를 병풍에 그리는 것이 산수를 눈으로 직접 보는 것보다 못하다. 이렇게 해서 병풍의 뜻을 취하고, 감히 요산(樂山)으로써 이 마루의 이름을 삼고자 하거니와, 괜찮을 것인지.” 하였다. 이와 같은 산세로 인하여 남겨진 시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을 두 가지 뽑아 소개하고자 한다.

 

 

마을 앞에는 위천이 뒤쪽에는 성황산(城隍山) 목단봉(牧丹峯)에서 병산(屛山)으로 구릉이 이어지고 있다.

 

 

회재 이언적(李彦迪)은 48세 되던 중종 33년(1538) 비안현감에 임명되어 7월 15일 비안에 도착하였는데, 종기가 나는 바람에 18일에 사직하였으나 병으로 오래 머물렀다고 한다. 이 당시 동헌의 시에 차운(次東軒韻)하여 쓴 시가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병산은 누운 용과 유사하고

안개 옅은 나무들은 동헌 담을 끼고 섰네

뜰엔 작은 측백 한 쌍 달빛 아래 춤을 추고

길옆에 선 늙은 소나무들 바람을 맞는구나

경치 아름다울 때 다시 오니 머리 세어 놀라는데

높은 누는 지난날에 열띤 담론 펼쳤던 곳

강호에서 십 년 세월 임금 걱정하였건만

부끄럽게 근시 되어 상소 한 장 못 올렸네

坐對屛山似臥龍

依依煙樹擁官墉

映階舞月稚雙柏

夾路迎風老萬松

佳境重來驚鬢雪

高樓昔日戰談鋒

江湖十載憂君意 

近侍還慙欠一封

 

 

 

 

 

 

 

 

 

 

 

또 하나는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시문집《사가집(四佳集)》에 실린  시이다. 비안제영(比安題詠)이란 제목의 시로 『신증동국여지승람』(비안) 제영(題詠)조에도 실려 있는데, 쌍계에서 두 물줄기가 합쳐 흐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정종주(鄭宗周)는 “쌍계는 얇은 비단 띠처럼 돌았고 雙溪羅帶繞, 겹친 봉우리는 무늬 있는 비단 병풍처럼 둘렀도다 疊嶂錦屛廻.” 하였다. 제방이 없던 시절 동부리와 서부리 앞쪽을 흐르는 강물로 인해 조성된 풍경이다.

 

두 시내가 합하여 감싸 돌아 흐르나니

공관(公館)은 여전하고 도서(島嶼)는 펼쳐졌네

말은 푸른 다리 건너니 자라의 등을 지나는 듯

새가 파란 벽에 날아드니 그림 속으로 들어온 듯

雙溪合抱玉灣回

公館依然島嶼開

馬渡翠橋鰲背過  

鳥飛蒼壁畫中來

 

 

집집마다 봉함 받기를 원하며 차운하다

옛 선인(先人)들은 비안의 옛 이름 비옥(比屋)과 관련지어 시를 많이 지었다. 비옥(比屋)은 비옥가봉(比屋可封)1)의 준말로, 집집마다 다 봉(封)해도 될 만큼 덕행이 뛰어난 인물이 많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풍속을 교화하고자 다른 지역보다 더 큰 노력을 했다.

 

숙종, 경종, 영조 세 왕대에 걸쳐 활동하던 정치가이자 문인, 학자인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이 43세 되던 1711년 6월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한 해를 보내고 돌아갈 즈음 도내 산천과 풍속을 낱낱이 읊었다. 비안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비옥의 동서는 부용국2) 같으니

고을 관아 그윽하여 산중에 구름 겹겹이네

주진촌3)에 순후한 풍속 아직 남아 있으니

성군이 지금 나오신다면 마땅히 봉함을 받으리라

比屋東西似附庸

縣居幽閴峽雲重

朱陳淳俗看猶在

聖作于今合受封

 

 

 

 

 

 

 

하륜의 기문(記文)에 박서생의 요청으로 객관 동쪽 누각을 ‘구요루(衢謠樓)’라 이름 짓게 된 사연이 전한다. 비안고을 옛 이름 비옥(比屋)이니 요순시대와 같이 집집마다 책봉을 받는다면 비안고을 부터일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태평시대를 구가하는 강구요(康衢謠)가 불려 질 것이다. 그때 누각 위에 올라서 그 노래를 듣는 즐거움을 생각하면서 ‘구요(衢謠)’라는 이름으로 정하자는 것이다.

 

고려 후기의 문인이자 학자인 이곡(李穀)이 북경에서 지은 ‘종전대회(㯶殿大會)’라는 시의 끝 구절이 ‘집집마다 여러모로 표창 받을 수 있기만을(比屋多方儘可封)’이다. 비안의 옛 이름과 같은 비옥(比屋)이란 글을 담고 있어, 비안에 왔던 어떤 사람이 차운하여 맨 처음 동헌 벽에 쓰게 되었다. 비옥가봉을 위하여 검소(儉素)하기를 당부하는 바위 글도 어느 시기에 새겨졌다.

 

회재 이언적(李彦迪)이 벽 위의 글을 보고서 ‘차동헌운(次東軒韻)’이란 제목의 시를 쓴 이후 1583년 경상도관찰사로 서애 유성룡(柳成龍)이 부임한다. 다음 해에 비안에 도착한 그는 벽 위에 있는 시에 차운하여 교관 고백량(응경)에게 보내는 시를 지었다. 제목은 <갑신이관찰사도비안 차벽상운잉기교관년형(甲申以觀察使到比安 次壁上韻仍寄敎官年兄)>이다.

 

산에는 부소가 있고 습지에는 용이 있네4)

미인이 서로 생각하며 높은 높은 담장에 기대네

찬 구름은 어두워 돌아가는 기러기 헤매게 하고

어슬어슬 지는 해는 아득히 먼 소나무 아래로 떨어지내

늙어감에 도무지 덧없는 세상에 생각 없으나

지난 날 이야기에는 날카로움이 여전히 드러나네

관찰사로 교화 베푸는 일 돌이켜보니 오히려 헛되고

야박한 풍속 어찌 집집마다 책봉됨을 논하겠는가6)

山有扶蘇隰有龍 

美人相憶倚高墉 

寒雲黯黑迷歸鴈 

落日蒼茫下遠松 

老去都無浮世戀 

談來尙露舊時鋒 

還慚按節虛親5)化 

薄俗寧論比屋封 

 

 

 

 

 

 

 

 

 

 

산에는 부소가 있고, 습지에는 용이 있거늘 특별히 뾰족한 성격의 한 사람을 만났나 보다. 덧없는 지난 이야기에도 날카롭고, 교화에도 야박한데 고을의 이름을 들어서 집집마다 가봉됨을 논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모두가 책봉되길 희망하는 건 무리일까? 

 

서애 이후 10년이 지난 1594년 7월 이로가 병산(屛山)현감으로 오게 된다. ‘병산7)의 향교 누각에서 서애가 교관 고응경에게 보낸 시에 삼가 차운하다.(屛山黌樓謹次柳西厓 成龍 寄高敎官伯樑 應擎 韻 甲午)’라는 제목의 시를 짓게 된다. 이 한 수의 작품에 대해 차운한 작품이 이어졌다.〈又和前韻十首〉〈再疊〉〈高趙二君和示前韻因又步贈〉〈三疊〉〈四疊〉〈又次前韻贈李上舍明之〉〈燈夕又次前韻戱贈僉君〉등 55수로 차운하였다. 

 

문명을 만나 이로우니 굳세고 강한 용인데

어느 해에 새매를 담장에서 맞힐 것인가8)

맑은 시 예전부터 동산 가시밭에서 노래하고

굳센 절개 이제는 골짜기 소나무에 기대네

유수곡9) 연주는 화답하기 부끄럽고

병산의 벽 위에 새겨진 필봉을 감상하네

가련하도다 떠돌아다니며 누구를 의지할까

회복하면 응당 봉작 주는 곳에 놀 것이네

利見文明矯矯龍

幾年鷙隼射于墉

淸詩夙昔歌園棘

苦節如今倚壑松

流水絃中慙和曲

屛山壁上賞詞鋒

可憐旋轉憑誰仗

恢復端應游錫封

 

 

 

 

 

 

 

 

 

 

휴식과 심성수양의 공간 누각과 정자 위의 문화

누정 건립의 연대는 오래되어 삼국유사 기록에도 보인다. 물론 잔치나 연회를 위한 장소로 많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대체로 휴식과 심성수양(心性修養)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조선 후기의 여항(閭巷)시인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의 문집에 전해오는 ‘비안(比安)’이라는 제목의 시는 이곳 병산벽을 노래하고 있다. 그야말로 비안 고을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았다.

 

쌍봉의 비취빛에 반해 옷을 적시고 보니

시냇물은 물굽이 치며 휘돌아가는구나

큰 집 좋은 밭은 역호로 바뀌었고

이끼 낀 흰 돌에 물결 부딪치니 물고기 흩어지는데

산길을 잘 걷는 것이 신령을 보는 것과 흡사하구나

채소가 단 것이 이를 자극할 뿐만 아니라 살을 찌우겠기에

저녁 무렵 깊고 서늘한 빈 객사에 쉬노라니

비안현에 머무는 팔월에 나르는 개똥벌레 보는구나

雙峯翠色欲霑衣

溪術灣灣往復歸 

大屋良田環驛戶

蒼苔白石散漁磯 

山行勝似通靈畵 

蔬具甘於刺齒肥 

稅駕幽凉虛舘夕 

比安八月見螢飛

 

 

 

 

 

 

 

 

 

 

 

 

 

쌍계천과 합류하기 이전의 위천 모습

 

병산(屛山)은 위천 3경(景)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후세에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불릴 만큼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던 선조(宣祖) 말의 대표적 문인으로 최립(崔岦 1539~1612)이 있다. 고을의 관아가 있던 병산(屛山)의 수석(水石)이 매우 아름다웠다(縣治有屛山 水石甚佳)고 하면서 ‘비안(比安)의 시원(試院)에서 동년(同年) 고숙명(高叔明)의 시에 차운하다.’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다.  

 

버들이 일찌감치 춘광(春光)을 홀로 차지하니

 둑에 남은 풀빛이 오히려 가을만 같소 그려

 거울 같은 호수 위엔 두세 마리 해오라기

 병풍 둘린 산속에는 오고 가는 소들이라

 어떡하면 이 산을 반으로 나누어서

 물머리 함께하며 즐겁게 살아 볼꼬

 청담 속에 더러움이 말끔히 씻겨 나가는 듯

 신선 누각 단약(丹藥)인들 이보다 더 나을까

柳占煙光早

堤留草色秋

鏡中三兩鷺

屛裏去來牛

安得分山半

相將共水頭

淸談消鄙吝

勝似餌神樓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성현에는 문소루와 조양관 밖의 봉생루(鳳笙樓)와 봉서정(鳳棲亭), 능파정(凌波亭) 그리고 빙계서원 남쪽 세심정(洗心亭) 등 5개소에 누각이 있다. 반면 비안현에도 구요루(衢謠樓), 쌍명루(雙明樓), 객관 동쪽의 범성루(泛星樓) 등 3개소나 있어 적지 않았다. 특히 망북정(望北亭)으로 불리던 병산정(屛山亭) 주변의 풍경이 좋았다. 1755년 중춘 초하룻날 서울로 돌아가기까지 번암 채제공의 부친 채응일이 이곳 병산(지금의 비안)현감으로 있었다. 그래서 비안현에 자주 머물렀던 모양이다. 돌아가는 길에서도 시를 지었는데, 남겨진 3수의 시 중에 한 수를 옮겨본다.

 

붉은 단풍 푸른 벼랑 가을날에 선명하니

관아에서 보는 경치 선경(仙境)이라 할 만하네

둘러싼 들 밖에선 굽이도는 물 만나고

툭 트인 기둥 앞엔 하늘이 끝없어라

동헌의 모퉁이엔 갈매기 놀라 깨고

역정에서 피는 연기 솔 그늘이 누르네

건너편 숲에 사는 소군10)을 불러 놓고 

시내 달이 둥근 밤에 거문고를 연주하리

紅樹蒼崖秋正鮮

官居有此合稱仙

回環野外相逢水

豁達楹前未了天

鷗夢每驚山縣角

松陰低壓驛亭煙

隔林喚取蘇君至 

抱得瑤琴溪月圓

 

 

 

풍속(風俗)을 교화(敎化)하는 바위 글(巖刻)

 

모재와 서애 상국11)께서 옛날 시를 써 놓았네

경계하신 말씀이 백세의 스승되네

어찌하면 다시 함께 비옥봉을 논하리오

한 번쯤 외우면서 오랜 시간 서 있노라

慕齊厓相舊題詩

警語誠爲百世師

那得共論封比屋

一回莊誦立多時

  

관찰사 심재(沈梓)의 시이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모재 김안국과 서애 류성룡이 경계하며 남긴 시가 귀감이 된다는 것이다. 서애가 고백량에게 보낸 시는  이 고장의 풍속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위의 시는 어떻게 하면 풍속을 교화하여 비옥봉을 논할 것인지, 한 번쯤 외면서 오랜 시간 서 있었다는 것이다.

 

비안 고을의 풍속을 논할 때 “백성은 순박하고 풍속은 검소하여 옛날 풍습이 남아 있네.”라는 박결(朴潔)의 시를 인용하곤 하였다. 사치를 억제하고 검소함을 숭상하는 풍속을 지켜낼 수는 없을까? 교화하여 옛 풍속을 되살리고자 노력한 흔적이 있다. 1517년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 중에 시 한 편씩을 지어 60여 도내 학교 강당에 걸어 놓게 한 권학(勸學) 시로 모재 김안국의 ‘권시비안학자(勸示比安學者)’가 있다. - 공은 비안지역에 상공제(相公堤)라는 못도 막았다.

 

학교에서의 가르침은 별다른 게 아니며

성현의 수많은 말씀에도 그 뜻 많지 않다

오로지 소학 공부에 쉬지 말고 부지런히 힘써

모름지기 갈고 닦고 또 가다듬도록 하시게

膠庠設敎更無他

賢聖千言意不多

小學功夫休間斷 

要須切琢又磋磨

 

소학은 일상생활의 예의범절, 수양을 위한 격언, 충신 효자의 사적 등 유교 사회의 도덕  규범 중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내용을 담은 유학교육의 입문서에 해당한다. 아동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편찬한 수양서이다. 비옥가옥을 위해 소학 공부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1624년에 영남 관찰사가 된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는 각 고을의 풍속을 묘사하였는데, 비안현의 풍속으로 지명에 견주어 “비옥에 살며 표창받을 것 생각하네.”라 하였다. 장춘리의 두모들 남쪽 쌍계 물가의 바위에 검소함을 강조하며 새겨놓은 검암(儉巖)이라는 큰 두 글자가 있다. 그 옆에는 그보다 작은 글씨로 “사치하면 이지러지기 쉽고, 검소하면 기울어지지 않는다. 앉은 자, 가는 자 바위의 글을 보라.(奢則己虧 儉故不傾 坐者行者 視此巖銘)”는 16자를 새겨 두었다.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길 바랐던 것이다. 최초의 글자를 두고 조선 후기의 학자인 한운성은 그의 입헌집(立軒集)에 남겨놓은 ‘검암(儉巖)’이라는 시에서 여헌 장현광 선생이 직접 쓴 글이라 하였으며, 1917년 중각(重刻)하면서 간행한 검암중각계첩(儉巖重刻契帖)은 고운 최치원 또는 퇴계 이황이 쓴 글이라고 하였다. 반면 전해오는 전설은 퇴계 선생의 글씨라 하였다.

 

그 옆에는〈임리재 권도겸 실행명〉이 새겨져 있다. 1829년 경상도에 기근이 발생하자 영해지역의 유학 권도겸이 두 번에 걸쳐서 많은 재산을 진휼 기금으로 바치자 경상도 감사 이면승이 논상(論賞)을 주청하였고, 1840년 비안현감으로 부임한 김노상이 다음 해 그 사실을 바위에 새겼다. 명(銘)은 실행록에 남겼다. 옛 군자들이 풍속을 안타까워하며 쓴 것이 틀림없다.

 

두 명문(銘文)은 왕래가 빈번한 바위벼랑에 새겨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또한 도로를 내면서 허물어진 것을 중각하였다. 1758년에 간행한〈비안여지승람〉에 검암은 현남 수리에 있다고 하였으며, 길을 내면서 허물어진 것을 정사년(丁巳年 1917) 다시 새겼다고 한다. 오래 이전부터 바위 글이 있었음이다. 검암(儉巖)이란 글로서는 사치함을 경계하고 검소하게 생활할 것을, 실행명으로는 권도겸의 선행을 널리 알리고자 한 것이다. 이 모두 비안현의 풍속을 되살리고자 한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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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비옥가봉(比屋可封) : 《한서(漢書)》권99 〈왕망전(王莽傳)〉에 “요순시대는 집집마다 다 봉해도 되었다.〔堯舜之世 比屋可封〕”는 고사에 의한 것이다. 한(漢)나라 왕충(王充)의 《논형(論衡)》에는 “요순의 백성들은 집집마다 다 봉해도 되었고, 걸주의 백성은 집집마다 다 죽여도 되었다.〔堯舜之民 可比屋而封 桀紂之民 可比屋而誅〕”라고 하였다.

2)부용국(附庸國) : 봉토가 작은 제후국을 말한다. 원래 춘추전국 시대 큰 제후국에 복속된 작은 제후국을 말하였다.《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천자의 제도는 땅(영토)의 넓이가 1,000리이고, 공(公)과 후(侯)는 모두 100리이고 백(伯)은 70리이고, 자(子)와 남(男)은 모두 50리이다. 50리가 못 되는 작은 나라는 직접 천자국에 통할 수가 없어서 인근의 제후국에 붙으니, 이것을 부용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3)주진촌 : 당(唐)나라 때 서주(徐州) 고풍현(古灃縣)에 있던 외딴 마을로, 이곳은 주씨(朱氏)와 진씨(陳氏) 두 집안만이 살면서 대대로 서로 혼인하여 화목하고 순박하게 살았다고 한다. 백거이(白居易)의 〈주진촌(朱陳村)〉이라는 시로 인해 널리 알려졌는데, 이후로 순박하고 인심 좋은 고장을 가리키게 되었고, 또 혼인 관계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였다. 

4) 《시경》정풍(鄭風) 산유부소(山有扶蘇)는 “산에는 부소가 있고, 습지에는 연꽃이 있거늘, 자도(고대 미남의 이름)는 만나지 못하고, 미친 놈만 만난단 말인가.〔山有扶蘇 隰有荷華 不見子都 乃見狂且〕”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5) 《서애별집(西厓別集)》 권1 〈갑신이관찰사도비안차벽상운잉기교관년형(甲申以觀察使到比安次壁上韻仍寄敎官年兄)〉에는 ‘친(親)’ 자가 ‘선(宣)’ 자로 되어 있다.

6) 요순시대 백성은 집집마다 책봉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7) 병산(屛山) : 비안의 별호이다.

8) 《주역》〈해괘(解卦) 상육(上六)〉에 “공이 높은 담장 위의 송골매를 쏘아 잡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公用射隼于高墉之上 獲之 无不利〕”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곧 패역스러운 소인(小人)들을 제거하여 천하를 평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9) 유수곡(流水曲) : 훌륭한 곡조를 말한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백아(伯牙)가 비파를 타면 종자기(鍾子期)가 그것을 감상하였는데, 백아가 산을 두고 타거나 흐르는 물을 두고 타면, 그것을 금방 알고 감탄하였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10) 소군(蘇君) : 한 문제(漢文帝) 때 계양군(桂陽郡)에 살던 소선공(蘇仙公)이 학을 타고 날아갔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읍성의 누대에 학이 날아와 앉았다. 어떤 사람이 학을 향해 탄알을 쏘자 학이 누대의 판자를 발톱으로 할퀴었는데, 그 자국이 “성곽은 그대론데 사람은 달라졌네. 삼백 갑자 지나서 돌아왔으니, 내가 소군이거늘 어찌하여 탄알 쏘나.[城郭是, 人民非. 三百甲子一來歸, 吾是蘇君, 彈何爲?]”라고 쓴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神仙傳 蘇仙公》 여기서는 단순히 학을 지칭하는 말이다.

11)상국 : 재상을 일컫는 말, 서애 류성룡을 말한다.

 

 

 

 

 

 

 

글쓴이 : 안종화
사)경상북도산악연맹 학술정보이사 조문국연구원 연구위원 의성군청 주민생활지원과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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