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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커스

  • [안경애_영주 문화산책, 지역의 역사인물]이덕홍의 학문과 호국정신이 배어있는 오계서원을 가다.
  • 컬처라인(cultureline@naver.com) 2022-04-04

 

 

이야기가 있는 문화탐방

 

 

이덕홍의 학문과 호국정신이 배어있는 오계서원을 가다.

 

글/사진. 안경애

 

 

鑿壁開菴伴柳陰    절벽 깎아 암자 세우니 버들 그늘 드리우고

溪聲㶁㶁瀉前林    시냇물 콸콸 소리 내며 앞 숲에서 쏟아지네

觀瀾一術從何得    여울 보는 한 가지 방법 어디에서 얻었는가

抱病齋居試養心    병든 몸 서재에 머물며 마음 수양 해보려네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에 위치한 오계서원(迃溪書院)은 1570년(선조 3)에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이 세운 ‘오계정사’의 후신이다. 이덕홍은 오계정사에서 학문과 마음을 수양하고 후학을 양성했는데 위에 시는 이 때 지은 시다.

 

오계정사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00년(선조 33)에 쌍계(雙溪)마을로 이건하였고 1636년(인조 14)에는 홍수로 유실되는 등 여러 차례 이건과 중건을 거듭했다. 1665년(현종 6) 도존사(道存祠)를 건립해 이덕홍의 위패를 봉안한 후 1691년(숙종 17) 오계서원으로 승격됐다.

 

1699년과 1707년의 대홍수로 물길이 바뀌어 서원이 침수피해를 입게 되자 1711년(숙종 37)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724년(경종 4)에 이덕홍의 맏아들 이시(李蒔)를 배향했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9년에 복향(復享)되었고 1978년에 도존사를 재건했다.

 

오계서원을 건립한 조선중기 학자 이덕홍은 이황의 아끼는 제자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스승 이황의 언행을 주로 두고 학문·품성·수양 및 일상생활까지 이황과 나눈 문답을 기록한 책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의 저자다. 뿐만 아니라 역학에도 뛰어나 남다른 통찰력으로 외세의 침입을 대비해 거북선 모양의 군함 귀갑선(龜甲船)을 설계한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명문가 영천이씨 가문

 

간재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의 본관은 영천이다. 할아버지는 습독(習讀) 현우(賢佑)이고 아버지는 증참판 충량(忠樑)이며, 어머니는 나주박씨로 부사직 박승장(朴承張)의 딸이다. 영천이씨는 조선시대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가(名文家)로 대표적인 인물은 조선시대 청백리(淸白吏)로 잘 알려진 농암 이현보(李賢輔, 1467~1555)를 들 수 있다. 청백리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은 이현보의 종택이 안동 가송리에 있는 농암종택이다. 이덕홍은 농암 이현보의 종손자가 된다.

 

본래 영천에 터를 닦고 살던 이덕홍의 집안은 고려 말 낙은(洛隱) 이헌(李軒) 때부터 농암종택이 있는 예안현(안동) 분천리로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이덕홍의 조부(祖父) 광헌(廣軒) 이현우(李賢佑)는 분천마을 상류에 위치한 천사촌(川沙村)에 정착해 살았는데 부친이 결혼하면서 함께 영주로 옮겨와 살게 된 것이다. 이덕홍의 부친 이충량은 관립 교육기관에서 유생들을 가르쳤으며 임진왜란 때 이덕홍이 세자인 광해군을 모셨던 공을 인정받아 사후 병조참판에 추증(追贈) 되었다.

 

 

퇴계 이황에게 학문을 배우다

 

교육기관에서 유생을 가르쳤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독서를 즐기던 이덕홍은 모든 학문에 뛰어났으며 특히, 역학에 밝았다. 다소 늦은 나이인 18세 때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퇴계 이황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10여 년 동안 항상 스승의 곁에서 학문과 마음 수양에 힘썼다. 그 기간 동안 퇴계를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이덕홍은 스승인 퇴계로 부터 보고 들었던 모든 것을 모아 책으로 엮었는데, 그 책이 바로 유명한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이다.

 

이덕홍은 스승 퇴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과도 교유하며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의 학문적 깊이는 그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글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였던 송소(松巢) 권우(權宇, 1552~1590)는 “의리에 분명치 않은 곳이 있어 조목에게 질문하였으나 분명한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의 결단하는 가르침을 바랍니다.” 라며 이덕홍의 의견을 구한다. 이 일화는 이덕홍의 학문적 깊이를 짐작케 한다.

 

 

귀갑선(龜甲船)을 설계하다

 

“귀갑선의 제도는 등 부분에 창검을 부착하고 머리 부분에 쇠뇌(伏弩)를 숨겨 두고, 허리 부분에 작은 판옥(板屋)을 만들어서 사수(射手)가 그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게 한다. (판옥의) 곁으로는 쏘는 구멍으로 통하고, 아래로는 배의 중심부에 통하게 한 다음, 가운데에 총통(銃筒)과 큰 도끼(大斧)를 싣는다. 그리하여 때려 부수거나 포를 쏘아 대고, 쏘거나 들이치면 적들이 비록 많이 몰려오더라도 반드시 (우리 편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위 글은 간재집(艮齋集)에 기록된 내용으로 귀갑선이 이순신의 거북선과 상당히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덕홍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군사적 대책을 제시하는 글을 선조 임금에게 올렸다. 1593년(선조 26)에는 선조에게 상행재소(上行在疏)를 올려 귀갑선의 건조를 제안했고 마지막에 귀갑선도(龜甲船圖)를 첨부했다. 이덕홍은 서애 류성룡과 한 살 차이로 퇴계 문하에서 친밀한 교우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류성룡은 이순신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이후 류성룡은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을 수군의 선봉에 서도록 선조 임금에게 추천했다. 이러한 류성룡의 교우관계와 이덕홍의 ‘간재집’의 귀갑선 그림을 근거로 이덕홍이 거북선에 대한 구상을 류성룡에게 전달했고 이를 류성룡이 이순신에게 전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정진술 순천향대학교 이순신 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간재 이덕홍이 제안한 귀갑선도(龜甲船圖)가 현재까지 원형이 알려지지 않은 거북선의 유래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언급하며, “간재집에 실린 귀갑선도는 임진왜란 때 만든 거북선 원형과 이후 거북선 유래를 깊이 연구하는데 중요한 전거(典據)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문학사적 가치가 높다.”고 강조했다.

 

 

 

간재 이덕홍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다

 

퇴계 이황의 고제(高弟) 이덕홍은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아홉 사람을 천거할 때 제4위로 뽑혀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이 되고 이어 종묘서직장(宗廟署直長)·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를 역임했다. 역학(易學)·산학(算學)에도 정통하여 퇴계의 명으로 ‘선기옥형(璿璣玉衡)’과 ‘혼천의(渾天儀 혼상, 현 도산서원 옥진각 소장)을 만들었는데 그 궁격(窮格)의 묘(妙)에 스승 퇴계도 감탄하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따라 성천까지 호종(扈從)했다. 이 때 상소문에 귀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는 거북선,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했다. 영춘현감 때에는 난리 중에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논어·중용·심경·고문전후집(古文前後集)·가례(家禮) 등을 주석하였으며 사후에 호종의 공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됐다. 저서로는 주역질의(周易質疑)·사서질의(四書質疑)·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주자서절요강록(朱子書節要講錄) 등과 ‘간재집’이 있다.

 

 

 

 

오계서원에는 한석봉의 글씨가 있다. 

 

오계서원의 배치는 전면에 강학(講學) 공간인 강당(講堂)이 있고, 후면에 제향(祭享) 공간인 사우(祠宇)가 배치되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오계서원에는 책판 300장과 각종 현판이 소장되어 있다고 전해지는데 상당수 분실한 후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위탁 관리 중이라 한다. 오계서원에 이덕홍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도존사(道存祠), 강당인 명륜당(明倫堂), 동재인 관성재(觀省齋), 서재인 관서헌(觀書軒), 출입문인 입도문(入道門)이 있다. 입도문을 통해 경내에 들어서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뒤편 다소 높은 지대에 명륜당이, 앞쪽 좌우측에 동재 관성재와 서재 험위료가 마주보고 서있다.

 

동재인 관성재(觀省齋)는 송나라의 학자 장식이 주자에게 ‘동정상수 체용불리(動靜相須 體用不離)’라는 글을 보내자, 주자가 좌우(座右)에 써서 ‘출입관성(出入觀省)’ 한 데서 취한 것으로 편액의 글씨는 석봉(石峰) 한호(韓濩)가 썼다고 한다. 서재인 험위료(驗爲寮)는 응사(應事)에 ‘사지사응 즉험우위(事至斯應 則驗于爲 : 일이 생겨 곧 응하게 되면 실천으로 시험하여 보라)’라는 구절에서 취하였으며 편액은 역시 한석봉의 글씨다. 오계서원에는 각종 현판과 더불어 책판 300장을 소장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상당수 분실한 후 일부는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위탁 관리 중이라 한다.

 

 

자연석 기단위에 세워진 군자정과 네모난 연못 군자당

 

네모난 연못 군자당(君子塘)을 앞에 둔 군자정(君子亭)은 오계서원 옆에 자리한 정자로 이덕홍이 학문을 닦던 곳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건물의 왼쪽 2칸은 통간(通間)으로 된 마루방으로 되어 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는데, 전면에는 쪽마루를 깔았고 계자난간을 설치했다. 마루방은 3면이 판벽(板璧)으로 되어 있으며 전면에 세살문을 설치하고 측면과 후면에는 널문을 설치하였으며, 기둥은 온돌방 부분에는 사각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마루방 부분에는 둥근기둥으로 되어 있다.

 

군자정의 현판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써주었다고 전한다. 군자정 앞 연못 군자당(君子塘)의 네모 모양은 땅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矩)나다󰡑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비가 오려나? 눈이 오려나? 잔뜩 찌푸린 하늘빛이다. 

시간이 허락하면 서원 동편 산기슭 바위 글씨 活潑臺(활발대)를 보고 가려했는데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축복처럼 첫눈이라도 펑펑 내리면 오계서원을 다시 한 번 찾으리라.

활발대에 올라 바위 글씨가 잘 나오도록 사진도 찍고 군자정 마루에 걸터앉아, 사각연못 군자당에 떨어져 사그라지는 눈발에 내 시름도 녹여 보내리라. 

첫눈이 오면...

 

 

 

 

글쓴이 : 안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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