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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커스

  • [백소애_쑤세미의 골방에서 만화읽기]정년이
  • 컬처라인(cultureline@naver.com) 2022-01-10

 

 

쑤세미의 골방에서 만화 읽기 

 

 

정년이

 

 글 백소애  

 

 

내 나이 여섯 살 때였나, 동네에 가설극장이 들어섰다. 천막이 서고 그 안에 큰 무대가 세워졌다. 분칠을 한 뽀얀 얼굴의 배우들이 노래하고 춤을 췄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넋 놓고 있는 내게 옆자리 아줌마가 사과를 건넸다.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치맛자락에 쓱싹 닦아 악력으로 쫙 쪼갠 사과를 내밀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나는 천막 아래로 기어 들어가 엄마 없는 아이처럼 홀로 서성였다. 곧이어 정문으로 셈을 치르고 온 엄마와 합류했다. 무대 위 연극은 호동과 낙랑의 이야기였고 극이 끝나자 배우들은 바구니와 꽃을 들고 다녔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세워졌던 가설극장이 떠나자 천막이 섰던 빈 공터엔 먼지만 날렸다. 내 기억 속 가장 근대의 공간이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았던 시절이다.

 

특이한 건 낙랑을 연기한 배우도 호동을 연기한 배우도 모두 여자로 기억된다는 것이다. 왕자 분장을 한 여자 배우는 매우 아름다웠다. 공주인 낙랑보다 더 예뻤는데 중성적 매력이 더해져 요염해 보이기까지 했다. 들고 있는 꽃바구니보다 더 아름답고 화려한 분 냄새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정년이>를 보고 나서야 그것이 ‘여성국극’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정년이>에서는 여성국극을 이렇게 설명한다. ‘연기로 승부를 거는 연극과 다르고, 한 사람이 모든 배역을 도맡는 판소리와도 다르다. 춘향이부터 향단이, 방자부터 이몽룡까지 배우는 모두 여자이고 노래, 춤, 연기가 모두 되는 최고의 여성들만이 무대에 오를 수 있다. 그중 가장 뛰어난 여성은 왕자가 사라진 이 시대의 왕자가 되어 인기와 명성을 얻게 된다.’

 

당시 시대상 성인 남녀 배우가 애정 신을 연기하기 힘든 이유도 있겠으나 국극의 인기는 전후 근대 여성들의 인식 변화와 여성 예인들의 끼와 실력이 한데 어우러져 시너지를 이룬 것으로 추측해 본다.

 

<정년이>는 2019년부터 네이버에 연재된 웹툰이다. 2부까지 연재가 완료되고 현재 휴재기를 거쳐 6월 7일부터 3부가 연재될 예정이다. 

 

 

때는 1956년 목포, 정년은 소리 잘하는 열여섯 소녀다. 시장에서 모시조개를 내다팔며 살지만 소리 한 곡조 뽑은 대가로 돈 버는 일에 더 재주가 있는 소녀다. 

 

정년의 엄마는 유명한 소리꾼 채공선,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서용례로 살면서 국극단을 ‘사탄 소굴’이라고 한다. 크게 데였던 모양이다. 엄마는 “소리 버젓한 걸 허긴 혔지만 영 신통치 않아 그만뒀다.”고 했다. 정년은 서울로 상경해 국극으로 부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정년은 자신이 벌어다 준 돈을 성당의 배고픈 아이들에게 줘버리는 엄마처럼 살긴 싫다. “자기만 아는 사람은 좋은 소리꾼이 될 수 없고 입이 고달퍼도 남을 돕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엄마가 따분하기만 하다. 

 

어느 날 목포극장에 여성국극단인 ‘매란국극단’이 온다. 가출을 감행한 정년은 우여곡절 끝에 매란국극단의 연구생(연습생)이 된다. 하지만 극단의 많은 연구생은 그저 서 있는 촛대 역할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현실. 시장바닥에서 거칠게 자라온 정년 또한 장승도 좋고 돌멩이도 좋으니 작은 역할이라도 맡길 원한다. 오직 부자만을 꿈꿨던 정년에게 어느덧 국극에 대한 진지한 열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정년이>는 소녀 윤정년의 국극 배우로서의 성장기를 다룬 만화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인 정년은 라이벌 허영서와 함께 매란국극단을 이끌 차세대 배우다. ‘왕자’역을 하는 배우의 인기는 오늘날 아이돌의 인기와 비슷하다. 팬들은 숙소 앞에 진을 치고 배우들에게 선물공세를 요란하게 편다.

 

중절모를 쓴 고사장부터 매란국극단 단장 소복, 매란국극단의 왕자 문옥경, 윤정년의 짝선배(사수) 백도앵, 단짝친구 홍주란까지, <정년이>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모두 여성이다. 이 여성들은 모두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어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현실에서 ‘나’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이다. 무대 위에서는 예인으로, 무대 아래에서는 생활인으로, 뛰고 구르고 울며 웃는 정년이의 1950년대의 삶이 야무지게 펼쳐진다. 장터의 춤꾼, 동네 시건방진 학생의 특징을 익힌 정년은 인생 처음으로 오른 무대에서 자신만의 방자역할을 소화해 낸다. 

 

정년이의 멘토 중 한 명인, 겉모습이 남자인 채로 살아가는 고사장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까막눈 하인인 그에게 주인집 아가씨는 글을 가르쳐준다. 그런 아가씨와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는 우정을 나누고 문학작품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을 정도가 됐다. 빨래를 널던 하인 고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제인 에어는 언제 읽어도 좋아요, 어떤 고난에도 맞서잖아요.”

 

정년이는 고난에 맞선 근대의 많은 여성 중 한명이다.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집을 나섰고 자신의 노동으로 밥벌이를 했다. 박제된 삶을 거부하고 운명보다 강했던 여인, 이런 씩씩한 여인이 바로 우리 어머니 세대의 여성이 아닐까? 50년대에서 90년대까지 우리 곁의 정년이는 지금도 꿈을 향해 고난에 맞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년이1,2 / 서이레 글, 나몬 그림/ 문학동네

 

 

 

글쓴이 : 백소애
강원도 태백 출생. 아이큐는 낮지만 머리가 좋다고 굳게 믿고 있음. 변덕이 심하고 우유부단하나 따뜻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조카들에게 헌신적이며 인간성 또한 좋다.....고 믿고 있다. 학생 때 교무실에서 밀대자루로 바닥 밀면서 은밀히 훔쳐본 생활기록부에는 ‘예의 바르나 산만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한참을 갸우뚱 하다가 담임이 수학선생님이었기에 그냥 이해하기로 함. 다소 후진 취향을 지니고 있으나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쓸데없는 걱정과 호기심이 많음. 같은 계획을 몇 년째 하고 있으며 역시나 올해도 다이어트와 앞머리 기르기에 도전할 생각이며 과메기에 없어서는 안 될 다시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 웹툰도 괜찮지만 만화책은 역시 종이책으로 보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날로그 건어물녀. 좋아하는 것은 무한도전, 오뎅으로 만든 떡볶이, 삼겹살에 매실소주, 비오는 날, 생활의 달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괴짜가족 류의 저질유머. 비 오는 날 무한도전 틀어놓고 배 깔고 누워 만화책 보면서 빈둥거리며 사는 것이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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