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郊 이건우의 현상(玄霜)

또 가을이란다.

늦은 더위와 때 아닌 태풍에 시달리는 동안,

하늘은 저만큼 높아졌고 공기는 솜털이 돋게 차가워졌다.

옛사람들은 추고기상(秋高氣爽)이라고 했다는데,

머리를 젖히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하루가 다르게 멀어지는 저 하늘,

달력도 없던 시절에는 그저 하늘만 보고 계절이 바뀌는 걸 알았을까.

날씨를 천기(天氣)라고 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하늘과 상관이 있나 보지.

그렇게 하늘만 한참을 쳐다보니 슬슬 눈이 시리다.

다른 해보다 늦었기 때문인지 쳐다보는 동안에도 한 뼘씩 높아가는 가을 하늘.

파랗다 못해 아득하게 가물거린다.

모았던 초점을 풀고 코를 살짝 문질렀다.

찬 공기가 쨍하게 폐부까지 달려들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파란 하늘이 어느새 가슴 깊이 들어왔다.

아득하다.

그래서 하늘빛은 현(玄)하단다.

검다는 뜻이지만 흑(黑)이 아니고, 아득히 멀어 가물거리며 그 색을 다 잃었기에.

오묘한 글자. 안에 담긴 의미가 심원해서 쉬 알기 어렵다.

차다.

이맘때에는 한낮의 햇볕이 따가워서 오직 새벽녘에만 한겨울보다 더 새파란 냉기를 느끼는 법.

그건 서리요, 그래서 서슬 퍼런 단호함을 가을의 서리라 부른다. 추상(秋霜)같다고.

서교 이건우의 그림을 본다.

미술에는 문외한이요, 그림을 느끼는 감상안도 기르지 못한 주제에,

그의 독특한 그림에서 두 글자를 떠올렸다.

화폭을 가득 채운 먹.

그리고 슬쩍슬쩍 보이는 흰 바탕.

현(玄)은 묵(墨)과 같아 아득한 하늘이구나.

상(霜)은 백(白)과 같아 점점이 선명하구나.

형색(形色)을 다 벗어 마침내 먹물로 하늘을 삼았으니 그 오묘함을 짐작조차 하기 어렵지만,

정신(精神)이 추상같이 오롯하게 바탕의 단서를 드러내니 얼핏 숨겨진 진체를 엿볼 수도 있겠다.

형신(刑神)을 뒤집어 현상(玄霜)에 감추었던 것일까.

아니, 그 현상이 사실은 현상(現象)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아무 것도 모르는 문외한은 제멋대로 망상에 빠져들 뿐이다.

작자의 뜻이 어디에 있던지,

감상은 오로지 보는 이의 몫.

다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중문학박사 직하 전영일

작가의 글

안동 제비원 삼층석탑에서 화순 운주사의 기억을 더듬는다. 오래된 절에 유적으로 남은 석탑과 불상, 그 속에서 인간의 간절한 바람의 기도를 생각한다. 기도의 공간에서 기원하는 사람의 마음을 그리면서 절실하게 인간성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탑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은 유일신의 희생적 가치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과 닿아 있다고 생각되었다. 

사람의 믿음은 종교와 지역과 인종을 넘어서 서로 어울려 잘 살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간절하다. 이 전시는 다르게 보이는 신앙의 표상을 동일한 그림으로 인식한 이유를 가만히 늘어놓아 보았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자유, 그리고 그 신념을 숭고한 가치로 지키는 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믿음의 실재와 환영의 쳇바퀴를 돌면서 그림은 형과 색을 잃어간다. 먹과 현상을 통해 믿음의 현상이 드러내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려 한다. 

운교당에서 서교 이건우

서교 이건우 LEE, GEON WOO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및 동대학원 졸업

영남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미술디자인학과 미술전공 수료

몇 번의 개인전 및 다수의 기획전, 교류전, 그룹전에 참여하고 1996년부터 현재까지

안동 길원여자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 있음.

경북 안동시 녹전면 능신길 29-43 운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