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황구하_시로 거니는 상주]바다로 가는 나무
- 황구하(guha3049@hanmail.net)
바다로 가는 나무
▲ 남장사 일주문길
저물녘 남장사에 듭니다. 자투리 햇살을 받으며 알록달록 예쁜 옷을 입은 할매들이 관광버스 앞에 무리지어 있습니다. 부처님 앞에 절하고 절 둘레를 절룩절룩 돌았을 걸음걸이가 애틋합니다. 일주문으로 향하는 길엔 상수리나무잎이 수북합니다. 손바닥만한 잎들이 서로 포개져 느릿느릿 걷는 발길을 푹신하게 받쳐주고요. 거기 맑은 새소리가 낙엽을 타고 내려앉습니다.
“스트레스성 장염입니다.” 의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처방전을 써주었지요. 어제 새벽 배가 뒤틀리듯 아파 뒹굴다가 화장실을 들락날락하였습니다. 물만 마셔도 배는 찢어질 듯했고요. 연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기운 빠져 있다가 겨우 병원을 찾았지요. 링거를 맞고 약국에 들러 약을 받아 나오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습이 많아.” 당신이 그랬지요. 며칠 동안 일었던 찬바람이 다시 일었습니다.
일주문을 거쳐 오른쪽으로 조금 걸으니 극락보전입니다. 이렇게 쉽고 빠르게 극락에 이를 수 있나, 한 호흡 쉬어 보는데요. 생각해보면 마음자리 잠깐 바뀌는 순간에 고통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고통으로 들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원래 절의 본전은 보광전이었지만 임진왜란이 끝나고 새로 지으면서 이곳이 본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남장사 극락보전
극락보전 왼쪽 문설주 위에는 「이백기경상천도(李白騎鯨上天圖)」가 있습니다. 이백이 채석강에서 뱃놀이를 하던 중 강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빠져서 고래를 타고 천상으로 갔다는 전설을 간직한 그림인데요. 그림 속 이백의 뒤쪽에는 세상의 산수가 보이고 고래는 안간힘을 다해 험난한 물살을 가르는데, 이백은 마치 말을 타고 있는 듯한 자세로 고래의 등 위에 서 있습니다. 남루한 행색에 초췌한 얼굴의 발아래에는 술병까지 놓여있는, 절에 어울리지 않는 조금은 엉뚱한 그림이라 할 수 있지요.
▲ 이백기경상천도
「이백기경상천도」에 고래 대신 잉어가 그려진 것이나 절과는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은 다른 그림들도 보이는데요. 이는 문학과 마찬가지로 그리는 이의 정신, 당대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광전 옆 교남강당은 승려만이 아니라 상산 선비들의 문회, 시회의 공간이 되어 많은 시문을 탄생시키기도 하였다는데요. 이러한 그림 역시 그런 연유와 맞닿아 있는 듯합니다. 극락보전의 꽃창살이 또 하나의 단풍으로 곱습니다.
▲ 꽃창살
발그레한 담쟁이 이파리가 오종종 매달린 축대 담 사이 돌계단을 오릅니다. 보광전에는 보물로 지정된 유물이 두 가지 있는데 철불좌상과 목각탱이 그것입니다. 신라 말에서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초까지 금동불이 아닌 철불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그 중 하나이지요. 철불 뒤 목각탱은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등 24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보광전 앞에는 파초가 성성한 잎을 드리우곤 했는데 지금은 겨울을 건너는 중으로 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문득 맑은 풍경소리가 바람을 데리고 옵니다. 풍경소리 따라 기억의 웃음이 되살아납니다. 몇 년 전 연초 경북작가회의 모임이 상주에서 있었습니다. 그때 좀 일찍 출발해서 남장사를 둘러보고 싶다는 권선희 시인과 이종암 시인의 기별이 있었지요. 상주문화회관 앞에서 기다리던 중 권선희 시인의 차가 멈추고 조수석에 앉았던 이종암 시인이 펄쩍 뛰어내렸습니다. 그는 뒷자리로 옮기고 나는 앞자리에 앉아 오랜만의 수다로 친구와의 안부를 나누었지요.
▲ 석장승
찬바람 속 석장승을 만나고 절 마당 여기저기를 한가하게 거닐 때 풍경소리가 시끄러우리만치 연달아 울렸습니다. 덩달아 이종암 시인이 수선을 피웠습니다. 지갑이 없다며 옷 주머니마다 뒤지더니 당황스런 기색이 역력했지요. “또 시작이다.” 권선희 시인과 나는 동시에 지청구를 주었는데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면서 휴게소에서 잠깐 쉬었고 그때 커피 값을 계산하고 현찰도 두둑히 뽑았답니다. 시 도반들과 시를 나누고 술을 나누기 위해서였다나요. 예삿일이 아니었습니다. 현금이야 그렇다 쳐도 카드니 신분증이니 뒷일 처리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니까요.
부랴부랴 모두 차에 타고 상주에서 나를 만나기 위해 처음 쉬었던 상주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내내 맘이 편치 않았습니다. 운전을 하는 권 시인의 표정 또한 그랬고요.
권 시인이 문화회관 옆 도서관에 주차를 하는 동안 내가 뛰어내려 문화회관 앞으로 달리고 그 뒤를 이 시인이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참 희한했습니다. 멀리서도 한눈에 지갑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주차관리를 하기 위해 놓여진 바리게이트 밑에 까만 지갑이 얌전히 있었지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인데 말입니다. 이종암 시인은 반가이 지갑을 확인하더니 “야, 내가 여기 오자마자 석장승 어르신한테 먼저 인사해서 덕 본 것 같다. 다 있네. 올해 액땜 다했다.” 며 안도의 “말씀 한 덩이” 내려놓았지요.
|
그래 보인다 퉁방울눈 주먹코 한일 자 입에다 삐죽이 튀어나온 두 개의 송곳니 참 못생긴 돌장승 그대 손이 이렇게 따뜻하네 그런데 너는 상주 남장사 오르는 길섶 모퉁이서 수백 년 지나가는 사람들 보고 또 그 말씀들 다 들었으니 모르는 게 없지
|
“세상의 맺힌 마음들 찾아가 손잡고/술술 풀어내는 내 노래 부르고 싶”(이종암, 「노래―석장승과의 대화 2」 부분(같은 책))어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이 지상에서 뜨겁게 실천하고자 하는 시인의 큰마음이 아니겠는지요.
영산전 가는 오솔길 돌탑에 돌 하나를 얹으며 마음을 덜고 보광전 뒷길로 듭니다. 상수리나무잎이 더욱 수북합니다. 길옆 계곡물은 바짝 움츠러들고 상수리나무숲엔 잎 내려놓은 나무들이 궁륭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이사이 부러진, 몸통만 있거나 뿌리를 드러낸 채 쓰러진 고목도 여럿 보입니다.
▲ 남장사 상수리 고목
‘습’이라는 말에 며칠 끙끙댔습니다. 당신의 직언에 나는 왜 그렇게 유쾌하지 못한 것인지, 왜 상처를 받고, 왜 그것에 연연해서 고민하고 또 한없이 가라앉는 것인지 스스로가 막막했습니다. 자신으로 파고들수록 울퉁불퉁한 이기와 곪아버린 아집으로 한없이 초라했습니다. 애써 도리질해도 나라는 집착으로 망상에 사로잡혀 몸과 마음이 아팠지요.
히말라야에 힐단새가 살고 있다지요. 낮에는 춥지 않아 살만하다가도 밤이 되면 살을 에는 듯 매서운 바람과 추위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날만 새면 꼭 따뜻한 둥지를 짓겠다고 다짐을 한답니다. 그러나 막상 해가 떠오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밤의 고통을 잊고 다시 낮의 삶을 산다는데요. 결국 힐단새는 조상 대대로 둥지를 짓지 못하고 똑같은 고통을 매일 반복하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세상의 온갖 습이 내 뼛속까지 전이된 줄도 모르고 뻣뻣하게도 나는 여전히 세상과의 불화로, 그리하여 처연한 불구로 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
남장사 상수리나무 큰 그늘
|
상수리 고목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침묵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그것은 자신과 삶의 기만성을 꿰뚫어보게 하는 양심의 부름과도 같은 것인데요. 있는 그대로 말을 걸어오고 있는 그대로 듣게 하는 “태초의” 물소리입니다. 세인의 습에 빠져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음을 질책하는 호통이기도 하고요.
고요한 바다에 온갖 형상이 비치고, 온갖 물이 흘러들고, 온갖 것이 갈무리되듯, 일체의 안팎을 두루 명료하게 파악하는 해인삼매인 셈이지요. 어쩌면 딱따구리나 “장수풍뎅이, 사슴벌레, 참다람쥐/아직 태어나지 않은 애기벌레들까지” 오래전부터 그걸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마음은 결국 나에게서 출발하고 나를 넘어 결국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내면 깊숙이 침묵하고 있는 어떤 존재로부터 끊임없이 질문을 받고 응답을 할 수 있겠지요.
어리석고 비루한 삶의 “옹이를 열어젖”히고 “굽은 등걸 속 둥근 물결/거침없이 흘”리며 더 큰 세상으로 자신을 밀고 나아가는 저 상수리나무는 그래서 이미 부처입니다. 온전히 습을 내려놓고, 말라가는 힘으로 색색 단풍들어 저리 가볍게 돌아가는 나무에게 두 손을 모아봅니다.
그리고 “듣고 싶지 않은 소리/삭이지 못한 소리/응어리진 소리/욕된 소리, 소리, 소리//귀가 닫혀/귀가 굳어/귀가 막혀/귀가 어두워//야단법석, 활짝 열어젖히고/이제 그만 다 놓아주”(황구하, 「소리가 뭉쳤다」 부분(불교문예, 2012년 겨울호))라는 ‘소리 없는 울림’에 귀를 기울입니다.
어둠이 내려오는 남장사, 초승달을 띄워놓고 침묵으로 환합니다. 벗을 것 다 벗고 동안거에 든 나무들 품어 안고, 노악산은 바다로 가는 또 한 그루 커다란 나무가 됩니다.
- 글쓴이 : 황구하
-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